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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유는 헐리웃과 아카데미영화상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영화와 영화제도가 근대적인 영어 제국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촌 대부분의 영화제들과는 달리 미국의 "아카데미 영화제"는 오직 영어로 시나리오가 만들어진 영화들만을 다루고, 영어가 아닌 영화들은 대부분 취급하지도 않으며 단지 몇몇 영화들만 외국어 영화상 후보들로 올린다. 오늘날 미국인으로 존재하는 수없이 많은 스페니쉬, 아시안, 혹은 이슬람이나 아프리칸 아메리칸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미국이 지니고 있는 지구촌 세계에 대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백인 앵글로 색슨 개신교도(WASP)" 중심의 영어 제국주의는 "아카데미 영화제"를 지배하고 있는 동시에 미국 영화들의 질을 하락시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2011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의 아카데미 영화제보다는 차라리 영어권 국가들을 포용하고 있는 영국의 런던,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캐나다의 밴쿠버,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 국제영화제가 차라리 영어권 나라들이 만드는 영화들의 새로운 가능성을 더 많이 간직하고 있다.
문제는 미국의 영화들이나 헐리웃의 영화관계자들이 아니다. 문제는 미국의 헐리웃 영화시장에 지배를 당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형 극장들과 세계 3대 영화제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베를린, 깐느, 베니스 영화제"는 약간의 관심을 갖거나 아예 무시하면서 오직 미국의 "아카데미 영화제"만을 신처럼 받들고 있는 우리의 저널 매체들과 영화정책 입안자들이다. 나탈리 포트만을 2011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타게 만든 <블랙 스완(Black Swan)>이나 코믹 배우 잭 블랙의 연기 이외에 별 볼일 없는 18세기 소설가 조나단 스위프트의 동명 소설보다도 못한 영화 <걸리버 여행기>는 버젓이 대형영화관에 걸려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10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아르헨티나의 후안 호세 캄파넬라 감독의 <엘 시크레토>는 대형영화관에서 상영조차 하지 않았다.
2006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영국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공동으로 만들고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한 <초찌(Tsotsi: 깡패)>와 200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존 쿳시(John M. Coetzee)의 소설을 오스트레일리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공동으로 제작하고, <존 말코비치 되기(1999)>로 국내에 알려진 존 말코비치가 주연한 <불명예(Disgrace, 2009)>는 국내에 소개조차도 되지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 멕시코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과 함께 중남미 탈근대 영화들을 이끌고 있는 감독들 중의 하나인 아르헨티나의 후안 호세 캄파넬라 감독의 <엘 시크레토(비밀의 눈동자)>를 국내 영화관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헐리웃 영화배급사의 지배에서 벗어난 씨네 큐브, 모모, 아트 씨네마 등등의 수많은 소형 영화관들에서만 오직 볼 수 있는 영화를 사랑하는 축복들 중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의 하나이다. <엘 시크레토>는 미국의 헐리웃 영화들이 새로운 영화적 상상력의 빈곤을 기존의 근대문학이나 예술로 치유하기 위하여 반복하고 있는 세익스피어나 18세기나 19세기 소설가들의 소설들, 혹은 유태인 학살 이야기 등등을 회상하는 것처럼 25년 전 과거의 아르헨티나를 다시 상상하고 과거와 다른 현재를 재구성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헐리웃 영화들의 과거 회상들과 <엘 시크레토>가 만드는 과거 회상의 차이는 헐리웃 영화들이 대부분 세익스피어나 18세기, 혹은 19세기의 과거에 안주하려고 하는 것과는 달리 <엘 시크레토>는 현재의 삶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과거를 현재로 재구성하면서 과거와는 다른 또 다른 현재를 새롭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근대적인 1960년대의 영화 <하녀>와 탈근대적인 2010년의 영화 <하녀>가 서로 다르고, 1970년대와 80년대의 근대적인 영화 <만추>와 2011년의 탈근대적인 영화 <만추>가 서로 다른 것과 유사하다.
II. "기억"과 "기억의 기억"이 지니는 사건의 차이
<엘 시크레토>는 25년 전 과거의 아르헨티나 검찰과 독재정부의 추악함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은둔하여 살고 있는 벤자민 에스포시토(리카르도 다린 분)가 25년 전 살인사건을 소설로 다시 쓰기 위하여 25년 전의 과거를 다시 추적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25년 전 자신이 경찰로 근무했던 직장의 법원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꾸었던 아름다운 여인의 살인사건을 다시 구성한다. 폭력으로 얼룩진 나체로 죽어있는 여인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여인을 사랑했던 지극히 평범한 남자. 그는 그 아름다운 여인과 그 여인을 사랑하는 평범한 남자를 위하여 살해범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마치 1980년대 한국사회를 공포에 떨게 했던 경기도 화성 살인사건을 다시 추적하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처럼 21세기 아르헨티나 판 "살인의 추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과거 속에서 현재로 돌아와 미완의 추억으로 끝이 나지만, <엘 시크레토>는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가 현재의 새로운 삶을 만드는 사랑, 즉 새로운 현재의 생성으로 끝을 맺는다. 그것은 나체로 죽은 여인의 아름다운이나 그 여인을 기억하는 평범한 남자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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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의 아르헨티나는 당시의 대한민국처럼 독재와 군사정권의 시대였다. 그러나 독재와 군사정권은 지배자들이 만드는 폭력이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권력이나 자본으로 서열화되어 있지 않다. 권력자들과 지배자들의 눈에는 미국 하버드 대학(권력자들에게 미국의 대학은 모두 하버드 대학이고, 서울의 대학은 모두 서울대학이다)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새로운 검사로 임명된 이렌 메넨데즈 해스팅스(솔레다드 빌라밀 분)와 검사보로 일하는 에스포시토, 그리고 그의 밑에서 일하는 릴리아나 콜로토(칼라 쿠에브도 분)가 권력의 서열로 이루어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보이지만, 그들은 단지 나이와 성의 구별을 벗어나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료들일 뿐이다. 그들은 심지어 그들이 함께 일하는 법원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잊고 친구처럼, 혹은 연인처럼 해스팅스는 에스포시토를 도와 범인의 자백을 받아내고 콜로토는 에스포시토를 위해 그의 사진을 숨기면서 나이가 어린 에스포시토를 위하여 자신이 대신 죽는다. 그들에게 권력과 자본의 서열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1970년대와 80년대의 대한민국처럼 1970년대 중반 아르헨티나의 독재와 군사정권은 그들의 친구관계와 연인관계를 파괴하고 평범한 시민을 범죄자로 만든다.
나체로 살해당한 여인의 아름다움과 그 여인을 사랑하는 평범한 남자의 열정을 위하여 에스포시토와 콜로토가 온갖 고생을 하면서 체포하고, 에스포시토의 열정에 감복한 해스팅스의 재치로 범인의 자백을 얻어낸 강간살해범. 그러나 그는 그 폭력적 능력의 과감한 열정을 인정받아 군사정권의 좌익사범 테러를 위한 최고 권력의 정보원이 되고, 대낮의 법원 엘리베이터 안에서 권총으로 에스포시토와 해스팅스를 공포에 떨게 만든다. 독재정부와 군사정권은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열정을 폭력으로 해결하도록 유인하고, 이 세상의 모든 친구관계와 연인관계를 파괴하여 권력과 자본의 서열관계로 보도록 각인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폭력과 파괴의 세계에서 해스팅스와 에스포시토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은 친구와 연인이 아니라 권력의 핵심부인 미국의 자본과 연결된 권력자의 딸이고 평범한 법원의 직원이다. 법원이 지니고 있는 권력의 일부를 구성하는 검사와 그의 밑에서 일하는 평범한 형사로 스스로를 보도록 강요받는 것이다. 그들이 독재정부와 군사정권에서 살아남는 길은 그러한 권력과 자본의 서열관계를 강요하는 법원이라는 권력기구에서 탈영토화하는 길 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독재정부와 군사정권이 만드는 폭력의 공포에 노출된 에스포시토의 눈에도 해스팅스는 친구나 연인이 아니라 권력자의 딸이고 법원의 검사일 뿐이다. 권력과 폭력으로 강요된 기억이다.
권력과 폭력의 공포가 만든 기억에서 벗어나는 길은 기억을 잃어버리고 싶은 기억으로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삶이 만드는 사랑과 우정의 열정을 폭력의 열정으로 만드는 기억에서 벗어나 삶에 대한 기억의 기억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것이 영화이고 소설이다. 그리고 우리가 영화를 필요로 하고 소설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바로 공포의 기억에서 벗어나 현재적 삶을 위한 기억의 기억을 재구성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소설을 쓰기 위하여, 혹은 자신의 사랑과 우정의 열정을 되찾기 위하여 25년 전의 기억으로 되돌아 간 에스포시토는 평범한 사랑을 그에게 보여주었던 은행원 리카르도 모라레스(파블로 라고 분)를 다시 찾는다. 그의 평범한 삶의 열정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 하면서. 아니나 다를까? 그의 현재적 삶도 25년 전의 기억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법원이나 국가나 사회가 해야 할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제도가 권력과 자본의 폭력적 서열관계만을 유지하기 위한 공포의 도구가 되었을 때, 우정과 사랑의 열정을 지닌 평범한 소시민들은 스스로 폭력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부인을 잃고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범인을 벌주고 있는 모라레스처럼 독재정부와 군사정권이 만든 개개인의 폭력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III. 사랑과 우정이라는 열정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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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동안 자신의 삶을 파괴하고 이 세상과 유리시킨 25년 전 과거의 기억을 현재적 삶을 위한 기억의 기억으로 재구성한 에스포시토는 25년 전 과거의 연인이었던 해스팅스를 다시 찾는다. 해스팅스 또한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에스포시토가 쓰는 소설의 완성이기도 하고, 또한 후안 호세 캄파넬라 감독이 과거와 다른 현재의 아르헨티나를 보여주는 영화 <엘 시크레토>의 결말이기도 하다. 25년 전과는 달리 현재의 에스포시토와 해스팅스는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다. 같은 직장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서로 다른 가족을 구성하였거나 구성하고 있다. 그들은 너무나 오랜 동안 서로서로 다른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 다른 삶은 독재정부와 군사정권이 만든 권력과 자본을 중심으로 한 서열관계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아직도 남아서 평범한 은행원, 모라레스의 삶을 갉아먹는 과거의 기억이 만드는 폭력적 틀의 자그마한 일부이다. 25년 전에 만들어진 잘못된 폭력의 틀에서 벗어나서 다시 그 때처럼 사랑과 우정의 열정을 되찾는 것은 해스팅스의 말처럼 너무 "복잡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일이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라도 그 일은 누군가에 의해서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는 일이다. 그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하기 위하여 소설이 있고 영화가 있는 것이 아닐까?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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