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정치와 집권의 실현 가능성이 여전히 불투명한 현재의 상황에서 다소 때 이르지만 현재의 흐름에는 중요한 몇 가지 전제들이 빠져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인가 김용익 교수(참여정부 시민사회수석)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요즘 내가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한나라당의 재집권이 아니라 우리(진보개혁진영)가 집권한 후 능력 부족과 분열로 또 다시 실패하는 경우입니다."
그렇다. 지금의 논의들은 너무 권력 장악의 수단에만 초점을 두고 있지 집권 이후 통치의 과정에는 관심을 놓고 있다. 선거연합이냐 단일야당이냐, 누구를 참여시키고 배제시킬 것인가라는 정치적 사안에만 목메고 있다. 논의되고 있는 정책협약의 내용 역시 구체성 없이 복지와 평화를 맴돌고 있다. 나는 지금의 논의들이 정당이나 엘리트 수준을 넘어 국민적 열망과 기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내용들과 병행되어야만 한다고 믿고 있다.
복지담론 시대의 박현채는 어디에?
이병천 교수는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이 박정희의 개발독재노선에 대항하는 아주 유력한 실현가능한 진보적 대안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그는 민족경제론과 대중경제론 즉 경제이론과 정치실천의 만남이 유신체제의 수립에 맞선 한국현대사에서 의미심장한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두 이론의 만남을 통하여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단순한 학술 이론의 성격을 넘어서 개발독재체제에 대항하는 현실적 대안의 정치경제학이자 구체적인 정책 담론이라는 역사적 위상을 갖게 되었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 역시 민족경제론과 만남으로써 분명한 체계와 새로운 이론적 요소를 수혈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민주당이 주도하고 있고 진보개혁진영이 동의하고 있는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보육, 반값등록금 정책이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보다 시대에 적합한 바른 정책이라는데 적극 동의한다. 또한 '복지국가 소사이어티'가 선도하고 있는 복지담론이 여권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개헌논쟁보다 미래지향적이고 건강한 논의라는데 이견이 없다. 그럼에도 불안한 까닭은 복지구상을 뒷받침 할 산업정책, 노사관계, 금융시장 등 생산 레짐(régime : 체제)에 대한 논의가 여전히 취약하다는데 있다.
진보개혁진영의 경제구상은 노무현 정부의 산업정책으로부터 얼마나 다듬어졌는가? 이미 알려진 바이지만 그 골간은 2003년 2월 삼성경제연구소가 출간한 <국정과제와 국가운영에 관한 아젠다>였으며, 여기에는 국제경쟁력을 갖춘 10개의 산업과 10개의 기업을 육성해 국민소득 2만 불을 달성한다는 'Global 10-10 전략'이 수록되어 있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제시하였던 벤처기업 및 혁신형 중소기업 육성 역시 정책 혼선 속에서 지지부진한 성과를 낳았음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진보개혁진영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케인즈가 아니라 정치의 요체인 민생문제를 민주적으로 해결할 포괄적 경제정책이다. 그 방식에 있어 '복지국가 소사이어티'의 실험은 매우 유용한 힌트를 제공해주고 있다. 최근 대통령제 국가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정책 생산의 두드러진 특징은 비슷한 지향을 가진 연구소들이 머리를 맞대고 공동으로 집권 플랜을 창출하는 싱크탱크 정치이다. 어느 탁월한 정치인이나 연구자 개인이 아니라 보편적 복지를 지향하는 연구자들이 '복지국가 소사이어티'를 설립해 복지국가의 단일 비전을 만들어 냈듯이 진보개혁정당의 산하 연구소와 진보적 학술 및 시민단체 등이 모여 산업정책, 노사관계, 금융시장, 자영업과 부동산 등 경제문제에 대한 단일 비전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미국 민주당 집권의 지침서가 된 <The Plan>의 한국판이 될 것이다.
노무현, 강금실, 문재인, 천정배가 있었는데도 검찰 개혁은 왜 실패했는가?
집권보다 통치에 관심이 있는 정치인이라면 노무현 정부 초기를 냉철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권변호사 출신의 노무현 대통령, 개혁 성향의 강금실 법무부장관, 문재인 민정수석, 집권 여당의 천정배 법사위원장이 당·정·청에 포진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최근 조국 교수가 말하고 있는 드림팀의 원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가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부연할 필요가 없다.
어째서 이러한 결과가 나왔을까? 필자는 근본적 원인은 대통령의 의지와 당·정·청의 소통 부족이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재벌개혁이든 언론개혁이든 대통령 의제(Presidential Agenda)에 해당하는 사안들은 당·정·청의 긴밀한 협력체계가 구축되지 않고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집권 이후 복지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를 원한다면 복지부장관이 아니라 당·정·청 라인을 보편적 복지의 철학에 동의하고 이를 실현할 능력 있는 인사를 라인-업으로 구성해야 한다. 동시에 그들에게는 공동 성과와 책임을 묻는 평가 및 인사 시스템을 고안할 필요가 있다. 임면권을 지닌 대통령제 하의 공직인지라 진보와 보수를 떠나 혼자라도 잘하고 싶은 경쟁과 승리의 욕구를 제어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연합정치라는 담론이 만발하면서 개별 정당이든 연합정부이든 국정지표인 대통령 의제와 분야별 의제를 가다듬으며 실력을 배양하는 준비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드림팀은 단순히 개혁지향적인 선한 사람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그것은 선출직인 당과 임명직인 정·청간의 자칫 주도권을 두고 다투기 쉬운 이중 권력을 대통령의 리더십을 통해 정책 공동체로 만드는 지난한 과정이다. 더 이상 김태동 교수나 이정우 교수와 같은 개혁적 인사 한 분을 리바이어던 같은 경제부처의 수장이나 경제수석으로 임명해 놓고 가시적 개혁조치를 기대하거나 그렇지 못했다고 실망하는 아마추어리즘을 반복하지는 말자. 연합정치를 말하려거든 먼저 자신들이 조각해 놓은 당·정·청 인사와 운용방안을 구상해 보라.
가변적인 시대, 변덕스런 국민과의 소통 방안
성공하는 정부의 또 다른 조건은 정확하고 신속한 국민과의 소통 체계의 구축이다. 정보화의 첨단을 걷고 있는 한국사회의 단임 대통령제는 국민들의 과도한 기대와 급속한 실망의 표출을 주기적으로 반복하여 왔다. 따라서 여론에 깔려 있는 민심의 가파른 흐름과 기대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자기들만의 정부나 계몽군주로 전락하기 쉽다.
다음의 표는 한국사회의 민심이 얼마나 빨리 표변하고 있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2002년 대통령 선거 때만해도 부패척결, 정치개혁, 권위주의 타파 등과 같은 정치적 이슈에 대한 기대감이 보다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국민들의 관심은 급격하게 변화되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 때 두드러졌던 정치 관련 이슈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반면 실용적이고 경제적 문제에 대한 관심은 크게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특히 2004년 탄핵과 총선을 치른 이후 국민들의 관심사는 정치 이슈로부터 실생활과 관련된 사회경제 이슈로 급격히 옮겨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정상호 |
이러한 민심의 급격한 변동은 2008년 총선과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발견된다. 2010년 4월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KSOI)의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2006년 지방선거와 2008년 총선을 휩쓴 이슈인 뉴타운-재개발, 특목고 유치 등 지역개발을 강조하는 후보와 사람중심의 복지를 내세운 후보가 맞붙을 경우 응답자의 65.1%가 복지공약을 내세운 후보를 선택할 것이라고 답하였다. 또한 한국매니페스트실천본부가 2010년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국민들은 성장중시(28.5%)보다는 분배우선 (72.5%) 정책에 대한 주민선호를 확인하였다.
국민과의 긴밀한 소통 방안은 여론과 홍보 기능을 강화하는 것으로는 결코 실현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정치제도 측면에서는 의회 특히 야당과 지방정부, 언론과의 협의와 협력을 일상화해야 한다. 또한 정책결정 과정에 국민과 시민단체, 이해관계자들의 참여를 대폭 활성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환류과정을 걸쳐 국정운영의 목표와 방식을 유연하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바라는 바를 실현하는 정부가 성공적인 개혁정부이다. 이제, 그러한 정부를 만날 때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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