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들어, 그나마 지금은 약발이 떨어진, 삼호주얼리호 구출작전 성공을 제외하곤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없다. 1월에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가 만신창이가 된 채 자진사퇴하면서 고질적인 청와대 인사 문제가 불거졌고 당청간 불협화음이 터졌다.
대통령의 의중이 명확해진 개헌 문제도 아직까진 득보단 실이 많아 보인다. 이전 정권에 책임을 돌릴 수도 없이 자신의 대선공약이 부메랑처럼 돌아오고 있는 과학비즈니스벨트·동남권 신공항 문제는 한나라당의 지역적 기반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와 대통령은 "뚜벅뚜벅 일하는 모습을 보이겠다. 어차피 우리 전공 과목은 '일'이다"며 '마이웨이'다. 하지만 끝을 모르는 구제역 파동은 '실력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 수도권을 강타하고 있는 '전세값 폭등'이 이명박 정부에게 결정타를 날릴 가능성이 점쳐진다. 지난 3년간 그나마 선방했던 것이 부동산 문제인데, 이제는 화약고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 집권 4년차에 터진 전세난을 이명박 대통령이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프레시안 |
임기 후반기에 터진 지뢰들
집권 기간 내내 아파트값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노무현 정부와 달리 이명박 정부 3년 동안 집값은 대체로 안정적이었다. 종합부동산세가 사실상 폐지됐고, 지난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들이 앞다퉈 내놓았던 뉴타운 약속도 불쏘시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정부나 정치권의 들쑤심, 부동산 광고로 먹고 사는 언론들의 '집값 바닥론' 설파와 달리 국민들 사이에선 "이제는 집 사서 돈 버는 시대가 아니다"는 논리가 힘을 얻었다. 간혹 "부동산 경기가 너무 죽었다. 좀 살아나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였다.
어쨌든 부동산이 안정화된 탓에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상황에서 정부는 여러 재정정책을 쓸 수 있었다. 국토부는 별 부담 없이 4대강 사업에 '올인'할 수 있었고 주식시장은 호황을 누렸다. G20 정상회담을 개최하면서 "이제는 우리가 세계 경제를 리드하는 나라다"는 축포까지 터졌다.
양극화, 자영업의 몰락, 청년 실업률 문제가 심화되긴 했지만 "구조적 문제다", "이명박 정부의 탓으로만 돌리긴 어렵다"는 항변도 설득력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작년 하반기부터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배추값 파동을 신호탄으로 물가가 슬금슬금 올라가기 시작했고, 집값엔 큰 변동이 없었지만 전세값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2011년이 되면서 잠복했던 지뢰들이 다 터지고 있다.
뒤늦은 경고음에 허둥대는 뒷북
"아파트에서 다세대 주택으로 집을 옮겼다", "집 때문에 약혼자와 싸워서 파혼 위기에 처했다", "서울에서 못 버텨서 경기도로 나갔다", "집주인이 요구하는 월세를 감당할 수 없다"는 뉴스들이 주먹만한 활자로 신문을 도배하고 있다. 보수적 신문과 진보적 신문의 차이도 없다. 여기에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물가 이야기가 장단을 맞춘다. 정부와 청와대도 안간힘을 쓰는 눈치지만 뒷북에는 딱히 답도 없다.
이미 노란 불이 들어왔던 지난 해 9월 정종환 국토부 장관은 "현재 전세난은 매년 이사철에 나타나는 수준으로 예년에 비해 심각한 수준이 아니다"고 말했었다. 정 장관은 12월에도 "매매 대기수요가 전세로 눌러앉으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심각한 상황이 아니다"고 말했었다. 대출규제 완화와 지방 미분양아파트 매입 등 매매 활성화 대책만 나왔다. 집값을 떠받치느라 전·월세 시장은 관심 밖이었다.
그러다가 2011년 '대란 수준'의 전세값 파동을 맞이하니 대책이라고 나오는 것이 "전세값 감당하게 돈 더 빌려주겠다", "돈 있는 사람들이 집 더 사서 임대사업하면 세금 깎아주겠다"는 식이다. 그러면서 청와대 비공개 4대강 보고회에선 대통령과 장관 사이에 "올해 내에 완공하자"는 굳은 다짐이 오간다.
전세값 문제에 대한 경고음이 만약 정권 초부터 나왔다면 중장기적인 대책이 강구됐을 것이고 지금 쯤은 효과를 발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권 초 부동산이 안정되다 보니 이명박 정부에선 임대주택 등 주거안정 대책은 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로또'로 불렸던 보금자리 주택, 서울시의 장기전세주택(시프트)는 오히려 물량이 줄어들었다. 뉴타운 지역에서 이제 나오는 주택 물량들은 대부분이 실수요와 거리가 있는 중대형 아파트들이다.
정권 초 촛불에 크게 매를 맞은 탓에, 현 정권의 정치적 내성은 커졌다. 왠만한 정치적 사안에 지지율이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부동산은 그와 정반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악화된 지역 민심에 수도권 민심도 가세
동남권 신공항, 과학비즈니스벨트 문제, 나아가 구제역 파동도 수도권에선 다소 체감 지수가 떨어지는 사안들이지만 전세값 문제는 다르다. 수도권을 직격하고 있다. 전세값 폭등 문제는 다른 사안들과 파괴력 자체가 다르다.
총리실 민간인 사찰 논란 등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징후가 보였지만 그야말로 먹고 살기 힘든 '서민'들에게까지 와닿는 문제였다고 보긴 어렵다. 개헌 논란도 그렇다. 반응이 싸늘하기 하지만, 역설적으로 보면 '나하고 상관 없는 문제'라 폭발력이 덜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참여정부 청와대 고위직을 지낸 인사는 최근 <프레시안>과 통화에서 "우리 집권기에 정치 문제, 언론과의 갈등 등 여러 가지가 많았지만 가장 발목을 잡았던 것은 바로 집값이다. 집값을 못 잡아서 실패한 것"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이 인사는 "서울시장 시절부터 지난 대선, 총선까지 뉴타운으로 '재미' 본 이 대통령이지만 전세값 문제로 큰 코 다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청와대 관계자도 "전세값 문제가 정말 걱정이다"면서 "우리 취약계층인 수도권 3, 40대를 직격하는 문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과학비즈니스벨트, 신공항, 구제역 문제 등이 지역 민심을 악화시키고 있는데 전세값 문제로 수도권 민심까지 폭발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지역 악재와 수도권 악재가 역(逆)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야권의 전략통인 민병두 전 의원은 "전세값이 작년 가을부터 꿈틀거렸는데 아직 여론 시장에 그 여파가 완전히 반영된 것 같진 않다"면서 "2월부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갈지 모른다"고 풀이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말이다.
민주당 서울 성동갑 위원장인 최재천 전 의원도 "부동산중개소 하는 당원들을 만나보면 아예 전세 물건 자체가 없다고 한다. 민심이 부글거리고 있다"면서 "2008년 총선 때 부동산으로 지역 주민 재구성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런 사태가 또 닥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2008년 총선 당시 뉴타운으로 인해 서울 시내 토박이 주민들이 서울과 인접한 경기도 도시로, 서울과 붙어있는 도시 주민들은 더 외곽 도시로 밀려나면서 각 정당의 전통적 표밭이 변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 바 있다. 이번 전세값 파동으로 인해 또 다른 변동이 나타날 조짐을 보인다는 이야기다.
'전공과목'이라던 경제가...
수도권 지역구의 한 한나라당 현역 의원은 "아주 어렵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당장 뾰족한 답도 없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당장 공급을 늘릴 수도 없고 전세의 월세화를 법으로 막을 수도 없는 것 아니냐"고 덧붙였다.
전세값 급등, 전세의 월세 전환은 서민 계층의 가처분 소득을 잠식하기 마련이다. 여기에 물가급등은 울고 싶은 이들의 뺨을 때리고 있다. 가처분 소득 저하로 인한 내수 침체의 결과는 모두가 다 안다. 정부가 '관치경제'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내수기업들의 주리를 틀며 물가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도 같은 이유다.
부동산 문제는 처음엔 신문 경제면에 등장하다가 사회면으로 확장되고 정치면에 착륙하면서 집권 세력의 발목을 붙잡기 마련이다. 현재 사회면에 안착한 전세값 기사들은 정치면을 넘보고 있다.
이 대통령 본인은 늘상 "나는 정치권 출신도 아니고~"라며 정치에 대해 '관심 없음' 혹은 '재주 없음'을 선선히 털어놓았다. 지금 정치를 잘하냐 못하느냐와 별개로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도 '경제'였다. 정치에 대해선 백번 양보해서 "그러려니"도 가능하지만 경제는 다르다.
건설회사 CEO출신인 대통령이 주전공에서도 낙제점을 받는다면? 성적표는 이명박 대통령 본인 뿐 아니라 여당의 다음 대통령 후보에게도 날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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