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자상 ⓒ프레시안 |
1월 17일 중국 대표격 인터넷 싸이트인 인민망(人民網)은 "천안문 광장 부근에 공자상이 세워진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무려 22만명이 참여한 이 설문조사에서 "지지한다. 이는 전통문화를 홍양(弘揚)한다"는 항목을 선택한 이들이 30%였고, "박물관 앞에 공자상이 선 것은 엄숙하지 못하고, 유학(儒學)은 모든 이가 추앙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는 항목을 선택한 이들이 70%에 달했다. 양자택일적인 이 두 항목의 내용이 좀 엉성하긴 하지만, 대체로 공자상 건립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중국 내에서는 이렇게 예상 밖의 설문 결과가 나온 데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다. 가장 보편적인 정서는 '너무 돌연적'이라는 것이었다. 중국인들은 '천안문 광장'에 '공자(孔子)'라고 하는 문화코드를 '급작스레' 결합시키는 것에 대해 정서적인 걸림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심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후진타오 주석이 일찌감치 중국 전통문화의 부흥을 홍양하고, 이를 기점으로 중국 전역에서 수많은 전통문화 복원운동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왜 시간이 더 필요했을까?
주지하다시피 '천안문'과 '공자'는 중국 근현대사에서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더 심각하게 말하면, 이 두 문화코드는 화해가 불가능한 적대적 관계였다. 중국 근현대 역사 속에서 천안문 광장이 새로운 '실험'의 장이었다면, 공자는 이에 반하는 '도태'의 대상이었다. 천안문이 '현대화'의 상징이었을 때 공자는 '봉건'의 수괴였고, 천안문이 '민주화'의 함성으로 들끓었을 때 전통의 화신이었던 공자는 전혀 설 자리가 없었다.
공자는 천안문 광장을 기점으로 한 운동에서 두 번 '타도(打倒)'되었다. 1919년 5.4 운동을 기점으로 증폭된 신문화운동에서 공자는 '타도공자점(打倒孔子店)'이라는 구호를 맞으며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전반서화(全盤西化)의 시대적 대세와 공산주의 운동의 여명기 속에서 공자는 타도의 대상이었다. 1973년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쩌둥은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을 전개했다. 공자는 또 다시 반혁명의 상징으로 매도되면서 철저하게 응징되었다. 항일 시기 일본군마저 비껴갔던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가 이 시기 홍위병에 의해 무자비하게 난도질당했다. 이처럼 공자는 봉건의 잔재였고 반혁명의 상징이었다.
이렇게 규정되었던 공자가 역사박물관과 혁명박물관이 통합된 새 박물관의 얼굴로서 등장한 것은 중국 현대사에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 공자가 중국 현대화의 상징인 천안문 광장 옆에 세워지도록 용인되었다는 사실 또한 매우 심대한 의미를 지닌다.
▲ 천안문 광장 ⓒ프레시안 |
공자상의 건립은 역사 단절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역사 계승, 역사 복원의 시대가 도래함을 알리고 있다. 공자상의 등장은 이데올로기가 주류를 이루었던 혁명의 시대에서 중화문명과 전통문화로 대표되는 소프트파워의 시대로 전환되고 있는 시대적 흐름을 상징한다. 공자상 건립의 용인은 현대화와 전통문화가 '세불양립(勢不兩立)'의 코드에서 조화를 귀중하게 여기는 '화위귀(和爲貴)'의 코드로 대체되었음을 의미한다.
천안문 광장 옆의 공자상을 바라보면서 여전히 생뚱맞게 받아들이는 중국인들의 심정은 가희 이해할만하다. 1919년 당시 '전반서화(모든 것을 서구화하자)'의 구호가 대세였다면, 21세기 초엽 중국에선 전통의 재해석과 국학의 부흥을 통한 소프트파워의 강화가 시대의 요청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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