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의 섬, 생일도는 신화의 섬입니다. 섬 곳곳이 신화와 전설의 무대이지요. 섬의 수호신인 여신이 좌정한 당집은 여전히 신성시 되고 두려움에 주민들이 아직도 나뭇가지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당숲은 신령함으로 가득합니다.
생일도 금곡리 뒷산에는 예언의 샘도 있습니다. 옛날 옛적 어느 해 이 샘 앞에 산신령이 나타나 이 물이 세 번 마르면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고 합니다. 또 금곡리에는 무려 ‘하느님’이라고 불리던 분까지 살았다 합니다. 전설이 아니라 실화입니다. 생일도 사람들은 초계 최씨의 6대조 할아버지인 이 분을 생일도의 하느님 할아버지로 부르고 우러렀다지요. 게다가 금곡리 용난골에는 몸이 아픈 환자들을 낫게 해주는 치유의 샘까지 있습니다. 이런 동화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섬이 어디에 또 있을까요!
11월의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 제65강은 11월 4(토)∼5일(일), 1박2일 일정으로 남해바다 신화의 섬 생일도로 갑니다. 생일도는 신화와 전설들뿐만 아니라 수려한 풍광의 해안 둘레길, 그리고 다도해의 섬들이 발아래 펼쳐지는 백운산 트레킹길 또한 더없이 좋습니다. 늦가을 신화의 섬, 신화 속으로 들어가 보실 회원님들을 초대합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1월 답사지인 <생일도>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여신의 섬
세계의 많은 섬들이 수호신으로 여신을 숭배하고 있다. 하와이 섬들의 수호신은 화산 분화구에 거처하는 펠레 여신이다.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난 비너스는 서풍에 밀려 키프로스 섬으로 갔는데 거기서 계절의 여신들이 옷을 입혀주자 사랑과 미의 신이 됐고 마침내 키프로스 섬의 수호신이 되었다. 제주도는 설문대할망이란 여신이 창조했다. 통영 섬들의 창조신은 마구 할매다. 진도 바다의 지배자는 영등할미 여신이고 부안 앞바다를 관장하는 신은 계양할미 여신이다.
완도의 섬 생일도의 수호신 또한 여신이다. 생일도 여신의 이름은 마방 할머니다. 마방 할머니가 좌정해 계시는 생일도 서성리 당은 완도 일대에서도 영험하기로 이름 높았다. 생일도의 기독교 신자들도 당집 앞에 가면 가슴이 울렁거리고 할머니나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고백할 정도다.
그래서 생일도에서는 여신인 마방 할머니에 대한 신앙심이 깊다. 생일도는 제주에서 육지로 말을 보낼 때 말의 기운 회복을 위해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이었는데 이 말들을 지키던 이가 마방 할머니였다고 전해진다. ‘마방’은 ‘마굿간’의 방언이다. 하지만 나그네는 생일도의 마방이 운반 과정의 제주 말들에게 먹이를 공급해주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보다는 생일도 자체가 국영목장이었기에 마방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조선 전기에는 전국 159개 국영목장에서 4만 필의 말들이 키워졌다. 목장터가 뚜렷이 남아있는 인근의 거금도처럼 많은 섬들이 국영목장이었다. 생일도 또한 국영목장 중 하나였을 것이다. 생일도에도 선조 때 말목장과 말을 기르는 것을 감독하는 관리가 거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마방 할머니는 생일도가 말 목장이었을 때부터 생일도와 말들의 수호신이었을 것이다. 그 마방 할머니가 수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생일도의 수호신이다.
서성리 당집에는 수많은 영험담이 전해진다. 그래서 여전히 주민들은 당숲의 나무에 손을 대는 것을 두려워한다. 썩거나 부러진 나무들일지라도 손을 못 댄다. 그래서 정월 여드렛날 당제를 지낼 때 전부 모아서 한꺼번에 태운다. 당집은 늘 잠겨 있다가 당제 때만 문을 연다.
당집 안에는 철마가 신체로 모셔져 있다. 철마는 신이 아니라 당집의 주신인 마방 할머니가 타고 다니는 말이다. 과거 당집은 자주 개축을 해야 했다. 당 주변에 나무가 우거지다보니 습해서 금방 썩어버렸던 까닭이다. 새로 짓는 당집은 온 마을 사람들이 합심해서 단 하루 만에 지어야 했다. 그러던 당집이 40년 전 시멘트 집으로 개축된 뒤에는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대부분의 섬들에서는 당제가 사라졌거나 당의 영향력이 축소되어 형식적으로만 당제를 지내는 경우가 많은데 서성리 당제는 여전히 정성껏 모셔지고 있다. 그것이 모두 당의 주신인 마방 할머니의 영험함과 마방 할머니에 대한 생일도 주민들의 믿음이 큰 까닭이다. 이 나라에서 토착신앙이 이처럼 잘 전승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만큼 전통문화로서 가치가 큰 것이다. 더구나 섬의 수호신이 여신이라는 점은 그 역사적 의미가 더욱 크다.
생일도는 당집과 마방 할머니 이야기 외에도 섬 곳곳이 신화와 전설의 무대다. 금덩이가 나왔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생일도 금곡리의 뒷산에는 예언의 샘이 있다 지금은 약수터라 부르지만 신비로운 이야기가 전해지는 샘이다. 옛날 옛적 어느 해 이 샘 앞에 산신령이 나타나 이 물이 세 번 마르면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샘은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강제로 병합시켰던 한일합병 때와 한국전쟁 때 딱 두 번 말랐다고 한다. 그러니 이제 한번만 더 이 샘이 마르게 되면 세상은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것이 언제일까. 세상의 미래는 이 샘물에 달려 있다. 지구의 미래가 궁금한 사람은 꼭 이 샘으로 가봐야 할 것이다!
그뿐인가! 금곡리에는 무려 하느님이라고 불리던 분까지 살았다 한다. 이건 전설이 아니라 실화다. 생일도 사람들은 초계 최씨의 6대조 할아버지라는 분을 생일도의 하느님 할아버지로 부르고 우러렀다 한다. 무슨 사이비 종교 교주도 아닌데 실존 인물이 하느님이란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은 그 분이 얼마나 대단한 어른이었는지를 알려준다. 하느님 할아버지는 눈이 크고 눈썹이 흰 생일도 최고의 장사였다는데 이분 앞에서는 다들 벌벌 떨었다 한다. 마을의 분쟁들도 이 분이 재판을 하면 다들 따랐다고 한다. 이런 동화 같은 이야기가 어디 또 있을까? 게다가 금곡리 용난골에는 몸이 아픈 환자들을 낫게 해주는 치유의 샘까지 있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데도 물맛도 좋다. 이 물을 먹고 나병 환자가 치유됐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지는 것을 보면 진정 약수임에 분명하다.
구름도 쉬어가는 백운산
391세대 723명의 주민이 사는 생일도(生日島)는 완도군 생일면의 중심 섬이다. 개발의 바람에서 비교적 비껴 있었던 덕에 섬의 자연환경은 거의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다. 그 생태적 가치가 크다. 전복과 다시마 등의 양식업이 주된 소득원이다. 생일도는 남해바다의 작은 섬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글로벌한 섬이다. 이 섬에만 무려 5개국 출신의 주민들이 어울려 살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중국, 라오스, 필리핀, 태국 등에서 결혼 이민을 와서 정착한 여인들과 양식장에서 일하기 위해서 섬으로 온 외국인 노동자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난다.
여객선이 출입하는 서성리 선창가 대합실 건물에는 커다란 생일케이크 조각상이 앉아있다. ‘생일’이란 이름에 착안하여 만든 상징 조형물인데 조악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정겹기도 하다. 진지함을 의도하고 만든 것이겠지만 재미라도 주고 있으니 나름 성공적인 조각품이라 할 수 않을까!
여신의 신전과 함께 생일도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은 섬의 랜드마크인 백운산(482m)이다. 백운산은 해발 0m에서 시작되니 섬의 산 치고는 꽤 높은 편이다. 하지만 백운산 트레킹 길은 가파르지 않고 완만해 쉬엄쉬엄 걷다보면 금방이다. 트레킹길 입구는 여러 곳이지만 여객선 터미널이 있는 서성리 당산나무 부근 임도에서 시작하는 것이 무난하다.
백운산 능선에 서면 다도해의 섬들, 가깝게는 고금, 약산, 신지, 완도, 금일도부터 멀리 소안, 청산, 보길, 대모, 소모, 횡간도 같은 완도의 섬들이 사방으로 펼쳐진다. 그야말로 황홀경이다. 힐링이 대세인 시대. 지방자치단체들은 힐링을 관광상품화하기 위해 예산을 들여 자꾸 인공적인 무언가를 만들려 한다. 그러나 대자연의 품에 안겨 바라보는 장엄한 풍경보다 더 좋은 힐링 상품은 없다. 섬은 그 자체로 힐링 공간이다.
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힐링이 시작된다. 백운산 능선길은 생일도 최고의 힐링 포인트인 셈이다. 발 아래 펼쳐지는 다도해의 장관을 보며 걷거나 넋 놓고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온통 정화되는 느낌이다. 산 중턱의 학서암은 섬에서는 드물게 300년이나 된 고찰인데 오랜 세월 생일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백운산이나 당숲 말고도 생일도에는 잘 보존된 빼어난 숲이 많다. 굴전리에는 구실잣밤나무 군락지가 50만㎡나 남아 있고 금곡리의 동백숲도 15만㎡나 된다. 이 동백 숲으로 인해 생일도의 겨울은 그야말로 동백의 화원이다. 금곡리에서 용출리까지 3.7㎞의 옛길인 금머리 갯길은 내내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는 황홀한 트레일인데 여기에도 자생 구지뽕나무 군락지가 보존돼 있다.
숲과 바다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생일도는 더 보태지 않아도 남도의 최고 보물섬이다. 생일도는 과거 완도에서 배가 다녔지만 이제는 연륙이 된 고금도와 약산도까지 차로 들어가 약산도 당목항에서 30분 남짓만 배를 타면 쉽게 도달할 수 있다. 생일도에 가는 길, 약산도 갯벌에는 굴 양식장이 많다. 굴 탈각장에서는 싱싱한 굴을 직접 사먹을 수도 있다.
미각의 제국, 섬
토속신이 지배하는 섬답게 생일도는 다양한 토속음식들이 전승되는 미각의 제국이기도 하다. 잣밤밥, 가포래밥, 톳밥, 가사리범벅, 굴참몰국, 파래김치, 파래냉국, 파래된장국, 진달래문지(화전) 등의 토속음식이 전해지고 한갈쿠(엉겅퀴)나, 아주까리뿌리, 금강초 등으로 만든 다양한 토속 막걸리들도 전승되고 있다. 갯바위에 붙어사는 해물들도 자주 상에 오른다. 국과 스프의 중간쯤 되는 해물 탕국은 주로 잔치나 제사상에 오르던 것들인데 외국의 어떤 해산물 요리에도 뒤지지 않을 빼어난 맛이다. 삿갓조개(배말)탕국은 입에 착착 감기고 거북손탕국은 게살스프보다 달콤하다. 다른 해산물 요리들도 자뭇 개미지다. 군소무침은 쫄깃하고 생해삼을 데쳐서 만든 해삼무침은 질기지 않고 입에서 살살 녹는다.
생일도 양식 어민들은 지상 최고의 사육사다, 호랑이나 사자는 물론 고래 따위도 시시해서 사육하지 않는다. 어민들은 바다 그 자체를 사육한다. 어민들의 밧줄에 꽁꽁 묶여 꼼짝도 못하는 바다. 어민들은 그 사나운 바다를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 유순해진 바다는 다시마며 미역, 톳, 전복 같은 해산물을 키워준다. 그래서 내해와 외해의 경계인 청정 해역에 자리한 생일도 해산물들은 양식이지만 자연산 못지않다. 생일도 다시마는 눈이 시리도록 투명한데 그 빛깔은 첫 사랑의 속살만큼이나 유혹적이다. 큼직하게 썰어낸 생일도 전복은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최고의 맛을 인증한다.
생일도 특산 다시마와 표고, 굵은 참멸치로 우려낸 국물이 일품인 가사리된장국은 삼년 쌓인 술독까지 깨끗이 씻어내 준다. 이토록 다양한 맛의 왕국 생일도 음식 중에서 단연 압권은 배말(따개비)구이다. 조리법은 간단하다. 갯바위에서 채취해온 삿갓조개를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 뒤 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넣고 볶아내듯 구우면 된다. 전복구이보다 고소하고 달고 쫀득하다. 보기에도 군침이 도는데 더 이상 무슨 수사가 필요하랴. 자연산 홍합구이 또한 생일도의 별미다.
생일도는 바다뿐만 아니라 산에서도 먹거리를 얻어올 수 있다. 그중 단연 최고의 맛은 잣밤나무 열매다. 잣밤은 밤과 잣의 중간 정도 맛인데 한때 항암에 특효라 해서 약용으로도 많이 팔렸다. 하지만 옛날 섬에서는 약용 이전에 아주 좋은 간식거리였다. 잣이나 밤처럼 밥에 넣어서 잣밤밥을 해먹기도 했다. 군락지는 도로공사 와중에 중간이 잘려나가기는 했지만 아직도 굴전리나 용출리 등에는 50ha가 넘는 잣밤나무 군락지가 남아 있다.
산에서 나는 또 하나의 특산물은 볼개나무 열매다. 볼개나무는 실제 보리수가 아니라 보리장나무지만 흔히 보리수라 불린다. 열매는 완도지방에서 볼개, 뻘뚝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예부터 생일도에는 볼개나무가 많았다. 그래서 과일이 귀하던 시절에는 볼개를 따다 금일도에 가서 팔아 생필품을 사올 정도였다. 예전에 신지도 동고리 처녀들이 생일도 금곡리로 볼개를 따러왔는데 금곡 총각들이 도와주다가 정분이 나기도 했었다. 처녀들은 주전자를 들고 땄는데 주로 볼개를 주전자에 넣으면서 두 손이 맞닿아 전기가 통했다 한다. 그렇게 신지 처녀와 생일 총각들 간에 연애가 이루어졌고 7∼8쌍은 결혼에까지 골인했다 하니 그야말로 보리수 사랑이다.
각시여, 서방여, 그 슬픈 바위섬들
생일도 용출마을 앞바다에는 전설이 깃든 두 개의 무인도가 있다. 대용랑도와 소용랑도. 바람이 점점 거세진다. 저 섬들 사이로 용이 승천 하던 날이 오늘 같았을까. 한번 승천한 용은 돌아오지 않고 용의 자취는 마을 이름으로만 남았다. 오후 늦게 폭풍주의보가 내릴 것이라 했다. 햇빛은 바람 센 날일수록 눈부시다. 용이 떠난 바닷가. 암초에 부딪치는 포말들이 용트림한다.
오래 전 섬이란 대개 피난민의 땅이었다. 전란을 피하거나 뭍에서 도망쳐 나와 숨어 살던 은자들의 처소. 소용랑도 옆의 저 여는 무슨 여일까. 여는 물의 들고 남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암초다. 장어 모양처럼 기다란 장어여, 미역이 많이 나는 미역여 등이야 그저 묵묵할 뿐이지만, 이런 날이면 유독 서럽게 우는 여들이 따로 있다. 각시여와 서방여, 부부여, 슬픈여 같은 이름의 여들이다.
사람 사는 섬마을 바다에는 의례 그런 이름의 여가 한 둘은 있기 마련이다. 마을 앞에 작은 바위섬이 있었다. 부부가 배를 타고 나가 각시를 섬에 내려주면 각시는 전복, 해삼, 소라, 미역 등을 채취했다. 서방은 잠시 노를 저어 근처 다른 섬에 일을 보러 떠났다. 여러 시각이 지나서 서방이 돌아오니 섬도 각시도 흔적조차 없다. 서방은 통곡을 하지만 삶은 이미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뭍에 살다 섬에 온 이들에게 바다에 대한 지식이 있을 리 만무했다. 여가 물때에 따라 물 위로 오르기도 하고 물속으로 잠기기도 하는 암초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바다가 각시를 삼키고 서방을 삼켰다. 때때로 부부를 함께 삼키기도 했다.
서럽게 죽은 각시는 신이 되고
바다는 깊은 바다보다 얕은 바다가 무섭다. 뱃사람들에게도 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각시가 죽은 뒤 자꾸 그 여 근처만 지나면 배들이 난파당했다. 뱃사람들 꿈에 원통하게 죽은 각시가 나타나 하소연했다. 뱃사람들은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 각시의 영혼을 아주 당집으로 모시기도 했다. 그러면 각시는 바다의 수호신이 되어 섬과 바닷길을 지켜주었다.
햇살 쏟아지는 바다가 황금빛으로 눈부시다. 언제나 바다는 사람의 생사 따위에는 무심하다. 오늘 생일도 앞 바다는 전복 가두리양식장과 다시마 양식장 부표들로 빈틈이 없다. 황금알을 낳는 전복들. 소득이 높아지는 것이 나쁠 것은 없다. 문제는 섬에서도 부의 편중이 갈수록 심해진다는 사실이다. 노동력이 넘치는 젊은 사람들은 점점 부유해지고 노동력을 잃은 노인들은 극한 빈곤에 시달린다.
용출리에서 서성리로 가는 길 도로변 산기슭에 기와집 한 채가 서있다. 경모재(敬慕齋)라는 현판이 걸렸다. 경모재는 조상신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다. 경모재 앞에서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이곳에 또 올 수 있을까. 우리가 생의 어느 순간인들 다시 돌아갈 수 있겠는가. 배를 타고 걷고 숨 쉬는 지금이 늘 생의 마지막 순간임을 잊지 않는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대면하는 존재들,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있으랴. 사람들, 개와 고양이와 산새들, 햇빛과 바람과 구름과 나무와 풀들, 모두가 고맙다. 지금 여기의 존재가 눈물겨우니 두고 온 이들이 또한 그립다. 가던 길 멈추고 나그네는 오늘 바다 건너 그리운 이들의 안부를 묻는다. 햇살의 길을 따라 편지를 보낸다.
광섬유 신경올을 통과하는 말들이라면
햇살의 길인들 왜 못 가랴
나는, 화창한 봄날 뜰 한 모퉁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네게 텔레파시의 신호음 보낸다
세 번만 벨이 울리거든
마음의 기미를 듣고서 내게 응답해다오
햇님의 통화로 땅 깨어나듯
시듦 없는 사랑은 먼 숨결로도
애송지마다의 새싹 촉촉이 적셔놓는다
발 없는 마음에도 말씀의 날개 달아맨다
나무는 나무끼리, 꽃들은 꽃들끼리
어느 것도 서로의 기미에 응답 않는 기적이란 없다
잠시 전 바람결로도 이미
수많은 파장 건너갔으므로
일손 놓고 바라보면 앞산 수풀조차
빗살무늬로 파랑이지 않느냐
(김명인 <통화>)
11월의 섬학교 제65강 <생일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1월 4일(토)
07:00 서울 출발(아침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65강 여는 모임
-강진 도착 점심식사(남도밥상)
-약산도 당목항 출항
-생일도 도착
-백운산 트레킹(8km)
서성항-학서암-백운산-용출리
-저녁식사 겸 뒤풀이(생일도의 푸짐한 해산물 요리)
-자유시간 및 취침(다인실)
11월 5일(일)
06: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섬밥상)
-금머리 갯길 걷기(3.5km)
용출리-금곡리
-점심식사(섬밥상)
-생일도 출항
-약산도 당목항 도착. 서울 향발. 제65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장갑,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참가신청 안내>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인문학습원(huschool)을 찾아오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섬학교'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에는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2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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