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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점상 철거 막던 대통령, "이 추운 겨울에 오죽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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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점상 철거 막던 대통령, "이 추운 겨울에 오죽하면…"

[추모 인터뷰]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대표 김상근 목사

"내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이 추운 날 국회 앞에서 천막 농성을 하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니…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1998년 제15대 대통령 취임 직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회 앞에서 천막 농성을 진행하는 민주화 운동 사망자 유가족을 보고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다. 그와 오랜 세월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해온 김상근 목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인권을 마음에 품고 산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

어제 공개된 고인의 일기에서도 김 전 대통령의 이런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쓴 1월 11일자 일기는 용산 참사 현장을 접하고 난 후의 안타까움이 그대로 묻어난다.

"용산구의 건물 철거 과정에서 단속 경찰의 난폭 진압으로 5인이 죽고 10여 인이 부상 입원했다.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에서 김상근 목사를 만나 '인간 김대중'에 대해 물었다. 김상근 목사는 목회 활동을 하다 1970년대 기독교계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고, 1973년 당시 납치됐다 가까스로 생환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나 36년간의 긴 인연을 맺어왔다.

민주화 운동의 동지로, 김대중 정부 시절 제2건국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지낸 동료로 오랜 세월 고인과 함께 해온 김 목사는 "시류를 타지 않고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정치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기억한다. 현재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대표를 맡고 있는 그에게 가까이서 지켜본 '인간 김대중'과 '정치인 김대중', 북한 조문단 방문 이후 남북관계에 대해 물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 김상근 목사. ⓒ프레시안

36년간의 인연…'쾌유 기도회'가 '추모 기도회'로 변한 사연

프레시안 :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최근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다소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만, 그동안 김 전 대통령과 꾸준히 인연을 맺어온 사람으로서 느낌이 남다를 듯하다.

김상근 : 최근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주 화요일 4시에 쾌유 기도회를 열었었다. 이번 주, 그러니까 세 번째로 열리는 쾌유 기도회에서 내가 설교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설교 준비를 한창 하고 있는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결국 그날 '쾌유 기도회'는 '추모 기도회'로 변경된 채 진행됐다. 단상에 섰을 때 말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는데도, 너무 안타깝고 아쉽고…. 그동안 이룩한 것이 많으셨지만 아직 하셔야 할 일이 많은데…. 그런 안타까움이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대통령께서는 대통령 재임 기간에도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 그러나 내색을 못하셨다. 그 당시에도 어떻게든 대통령의 반대 편에 서려고 하는 정치 세력과 언론들이 있었는데, 혹여 그들이 건강 문제를 확대해서 국정 운영에 지장이 될까봐 이를 악물고 치료도 받지 않으셨다고 한다. 퇴임 후에 급격하게 건강이 나빠지셨다. 사실 신장 투석도 그 때부터 하셔야 했다.

프레시안 : 김대중 전 대통령과 어떻게 첫 인연을 맺게 되었는가.

ⓒ프레시안
김상근 :
1971년 총선 당시, '기독교 성직자 선거 참관인단'을 만들었다. 꼭 야당이나 재야 세력을 위해 활동한 게 아니고, 선거 자체가 워낙 파행으로 진행되던 시절이어서 '선거를 공정하게 사수하자'는 의미였다. 공화당에서 요청하면 그곳으로도 가고, 신민당에서 요청하면 그 곳 감시 활동도 했다. 개인적인 인연은 아니었지만, 그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

김 대통령과 처음 개인적인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73년, 대통령이 일본에서 납치되었다가 가까스로 생환했을 때였다. 당시 나는 민주화 운동을 갓 시작한 젊은 목사였는데, 대통령을 위해 기도를 드리고 그 분이 하는 일에 도움이 되고자 동료들과 함께 동교동을 방문했다.

어떻게 보면 망명과 납치를 반복하는 고난의 현장으로 나 역시 끌려가게 되는 상황이라 두려웠지만, 우리에겐 교회라는 배경이 있었으니까 용기를 가지고 그 분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때 그 분을 가까이서 뵙고 "이 분이라면 군사독재 정권을 막아낼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를 처음 갖게 됐다. 그 때부터 연이 시작됐으니까, 이제 한 36년 쯤 됐다.

대선 패배 6일 만에 일어나 다시 뛰어…'집념'의 정치인

프레시안 : 그 때부터 민주화 운동을 본격적으로 함께 하게 된 셈인데, 그 과정에서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

김상근 : 되돌아보면 참 좋았던 기억이 많다. 그러나 가장 또렷이 기억나는 사건은 1987년 대통령 후보 단일화 과정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 나는 대선 후보로 김영삼, 김대중 두 분이 나가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봤다. 이 군부독재를 종식시키려면, 누군가 한 분은 결단해서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내가 김영삼 선생에게 그런 제안을 할 위치는 아니었고, 김대중 선생께 말씀드려야겠다, 이런 생각을 했다.

고민 끝에 전화를 했다. 드릴 말씀이 있으니 동교동으로 가겠다고. 그런데 당신께서 직접 오겠다고 하셨다. 후보 자릴 포기하라고 말씀드리는 것도 죄송한데, 직접 오신다고 하니 할 말이 더더욱 없었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말씀드렸다. 6월 민주 항쟁의 뜻은 어떻게든 정권 교체를 이끌어 내는 일이라고, 그러니 YS로 단일화를 하자고…. 당시 대통령께서는 별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그날 대화는 5, 6분 정도의 짧은 대화였지만, 그 5분의 대화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서 밤새 앓았다. 그분의 뜻을 모르는 게 아닌데,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게 너무 죄송스러워서….

그리고 그 해 12월, 결국 대선에서 졌다. 12월 25일, 성탄절 예배를 마쳤는데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하시더라. 그 때 그 분은 "내가 잘못했다. 국민들에게 죄송하다", 그 말씀만 하셨다. 그렇게 침통한 표정은 그 때 이후로도 본 적이 없다. 내가 성직자이긴 하지만, 나보다 연세도 한참 많은 어른이, 마치 참회하는 표정을 지으셨다. 아프고도 좋은 기억들이었다.

6일이 지난 31일, 다시 동교동을 찾았다. 대선 실패의 책임을 지고 신년에 정계 은퇴를 선언하자는 말씀을 드리기 위함이었다. 찾아 온 방문객들이 너무 많아 차마 그 얘기를 드리지 못했다. 마침내 자정이 지나고 1월 1일이 되어서야 선생과 독대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분은 지하 서재에서 전지 두 장에 빼곡히 적힌 계획을 보여주시고는 "다음 총선에서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프레시안
어이가 없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불과 6일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침통해 계시던 분이 그 사이에 그렇게 변하신거다. 그런데 거기다 되고 "은퇴 하십시오"라는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냥 돌아왔다. 새벽에 집에 도착해서 자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오전에 다시 오라고 하셔서 말씀하신 장소로 갔더니, 벌써 계획을 실천에 옮기고 계셨다. 이럴 수가 있나. 이 어른이 과연 인물은 인물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나보다 연세도 많으신 분이 그 좌절을 6일 만에 견뎌내고 끝내 다시 일어서신 거다. 엄청난 추진력과 판단력을 가진 분이었다. 결국 그 해 총선에서 이겼다.

지금도 대통령께서 대선에 여러 차례 실패했던 걸 들어 "대통령 자리를 어떻게든 해먹으려고 했다", 이렇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결코 그 분이 정치적 야심이 강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집권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그 분에겐 집권해서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뜻이 있었다. 1992년 정계 은퇴 이후 1993년 다시 복귀했을 때도, 그 분은 변명 한마디 하지 않으셨다. 그 때는 미처 몰랐지만 되돌아 생각해보니, 그 분은 자신의 정치 인생을 김대중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하늘이 주신 사명 같은 거라고 여겼던 것 같다.

용산 참사에 아파하고 노점상을 걱정했던 '인간 김대중'

프레시안 : 정치인이 아닌, '인간 김대중'은 어떤 사람이었나.

김상근 : 굉장히 세심한 분이었다. 지인들의 집안 경조사까지 하나하나 세심하게 챙기곤 하셨다. 자신이 정치라는 큰일을 한다고 해서, 개인적인 일들을 누구한테 떠넘기거나 하지 않고 가사 일까지 잘 돌보는 분으로 기억한다.

또 '소통'이 가능한 정치인이었다. 저 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주변 사람이 눈치를 보거나 짐작을 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고민과 구상을 가감 없이 얘기하고, 또 타인의 이야기를 그만큼 경청하고… 10명의 사람을 만나면, 10명한테 똑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말하는 분이었다. 쉽지 않은 일인데, 참 많이 배울 점이라고 느꼈다. 그런 대화를 통해 그 분과 한 길을 가는 사람에게 소신과 확신을 주는 힘이 있었다.

ⓒ프레시안

프레시안 : 민주화 운동을 하는 동안 온갖 고초를 겪고 마침내 1998년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대통령 재임 시 행적은 어떻게 평가하는가.

김상근 :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대통령 재임 시에 인권 문제가 많이 개선됐다. 그 분은 인권 신장을 하나의 정책으로 사고한 게 아니라, 항상 마음과 힘을 다해 밑바닥에 있는 사람의 편에 서고자 했다. 언젠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어머니들이 국회 앞에서 천막 농성을 한 일이 있었는데, 대통령께선 그 모습을 보시고 참 가슴 아파 하셨다.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데, 이 추운 날씨에 민주화 운동 유가족들이 천막 농성 하는 게 말이 되냐"라고 말씀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렇게 '가슴으로' 자신의 허물까지 성찰하셨던 분이다.

또 한 번은 집권 직후에, 종로에 있는 노점상을 서울시가 철거하겠다고 건의한 적이 있었다. 도시 미관에 안 좋다는 이유였다. 그런 제안을 대통령이 막았다. 오죽하면 이 추운 날 거리에서 행상을 하겠냐고…. 당시만 해도 IMF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이 위기를 벗어나서 먹고 살 만할 때까지 그냥 놔두라"고 하셨다.

그 분은 정치 야욕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정치를 하신 분이다. 여러 차례 대선 실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집념으로 버틴 가운데 마침내 정권 교체를 해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정권 교체를 위해 JP, 충청도와의 야합을 했다고도 얘기한다. 어떻게 보면 야합이지만, 큰 그림으로 볼 때 이것은 지역 감정과 지역 분할주의를 뛰어넘은 일이었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충정도, 경상도 인재들을 꾸준히 등용하고 국민 통합을 이끌어냈다.

남북문제는 두말할 것도 없다. 햇볕정책을 보고 요즘에도 "퍼주기다"라는 식으로 말들이 많은데, 김대중 정부 때의 남북 교류는 세계가 인정하는 업적이다. 정치인으로서 그만한 업적을 남기기 쉽지 않다.

"김대중, 시류를 타지 않는 정치인"

프레시안 : 어제 공개된 김 전 대통령의 일기에서도 용산 참사에 대해 언급하는 등, '따뜻한 정치인'으로서의 면모가 드러났다. 정치 지도자로서 김 전 대통령의 능력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프레시안
김상근 :
그 분에겐 나쁘게 말하면 집념이 있었고, 좋게 말한다면 민족을 위한 신념이 있었다. 그 분의 정치 일생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항상 꾸준할 수 있었다.

한 예로 1971년 대선 당시 3단계 통일론을 처음 주창했는데, 그것이 1998년 대선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결국 그 통일론이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까지 이어지지 않았나. 김 전 대통령은 시류를 타거나, 내걸었던 정책을 마음대로 뒤바꾸는 그런 정치인이 아니었다. 정치는 짧은 시간에 즉흥적으로 제시하는 아이디어로 되지 않는 법이다. 1971년 당시 3단계 통일론 때문에 빨갱이 소리를 듣고 죽음의 고비를 몇 차례 넘겼는데도, 그것을 30년 동안 포기 하지 않으셨다. 그런 모습이 진정 훌륭한 지도자의 면모인 듯하다.

"대중경제론 주창했던 따뜻한 정치인…집권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이 가장 아쉬워"

프레시안 : 김 전 대통령이 많은 업적을 남긴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고인의 정치 행보 중에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김상근 : 아직 이 평가에 스스로 확신은 없지만, 대통령께서 초기에 내세웠던 대중경제론과 집권 이후의 시장주의 정책이 충돌했다는 회의가 들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시장은 결국 강자만이 지배하는 법이다. 그러나 그 분이 초기에 주장했던 대중경제론은 시장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 경제적 약자를 위한 경제 정책이었다. 그러나 집권 이후 표방했던 시장경제 하에서 약자는 살아남을 수 없는 법이다. 물론 시장경제가 세계적인 추세고, 복지 정책으로 보완이 가능한 부분이 분명 있다. 실제 대통령께서도 복지 정책을 많이 추진하셨고…. 그 당시에 '이건 아니다'라고 말씀드리진 못했지만, 지금도 그 분의 서민대중을 사랑하는 마음과 시장경제주의는 상충되는 지점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프레시안 : 물론 IMF 위기라는 시기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한국이 신자유주의로 나아갔다는 평가도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이 대중경제론에서 시장주의로 전환된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김상근 : 신자유주의는 미국으로부터 불어오는 일종의 쓰나미였다고 생각한다. 그 태풍을 막아서고 우리 힘으로 우리 경제가 발전의 궤도 위에 올라갈 힘이 그 때까지는 없었다. 어차피 세계적으로 밀려오는 태풍인데, 그것을 타고 뭔가를 일궈내야 한다… 대통령께서도 그런 판단을 하지 않았을까. 분명 옳은 일은 아니지만, 우리에겐 그만한 힘이 없었다는 걸 그 분도 알고 계셨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도 신자유주의적인 입장에 섰다. 그러나 동시에 서민에 대한 애정을 누구보다 강하게 가지고 계셨던 분이다. 생각해 보면 두 분 다 현실주의자였고,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분명 있었다.

ⓒ프레시안

"북한 조문단…김대중 전 대통령이 죽음으로 남긴 선물"

프레시안 :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북측 조문단이 어제 내려왔다. 이번 조문단 방문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쪽을 처음 방문하는 북쪽의 당국자들이어서 앞으로 남북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주목된다.

김상근 : 김 전 대통령께서는 서거 직전까지 남북 관계의 후퇴에 대해 많이 걱정하고 가슴 아파 하셨다. 나는 그 분이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 민족에게 선물을 주신 거라고 생각한다. 남북 화해의 길을 다시 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겼고, 북측에서는 분명 그 선물의 메시지를 읽었다.

이른바 '특사 조의 방문단'이 왔다. 예전에도 그런 말이 있었나. 방문단 앞에 '특사'가 붙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대신해서 내려온 거고, 북측은 그만큼 대화의 기회를 열어 놓은 것이다. 동시에 북한은 남북 관계 경색 이전으로 환원하는 조치들을 적극 내놓았다. 조문단의 체류 기간도 열어 놨다. 그것은 곧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지와 뜻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비친 것이다. 북한이 국제 사회의 고립으로 조급해져서 내려왔다는 식의 논리는 옳지 못하다.

프레시안 : 북측은 남측 정부가 아니라 김대중평화센터의 임동원 전 장관 앞으로 조의방문단 파견 통지문을 보냈다. 그러면서 북한이 남측의 민간과는 교류하고 당국은 따돌리는 이른바 '통민봉관'(通民封官) 전략을 쓰는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프레시안
김상근 :
북한이 이미 화해하자는 사인을 충분히 보냈다. 여기다 대고 통민봉관을 운운할 것이 아니라, 청와대가 적극 나서서 이 기회를 잘 잡아야 한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답답하다. 김대중 대통령이 자신의 죽음으로써 우리 민족에게 준 선물이고, 파탄날 대로 파탄난 남북관계를 개선할 절호의 기회다.

우리 정부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하지만, 국민들도 이제 현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는 상황이다. 전 대통령의 죽음 앞에서 이제 화해의 손을 잡아야 한다. 나는 결국 남북이 화합하게 되리라고 본다. 만약 지금과 같은 적대의 상황을 계속한다면, 우리 국민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프레시안 : 올해 노무현과 김대중, 두 전 대통령을 한꺼번에 잃어 국민들의 마음이 무겁다.마지막으로 목회자로서, 사회의 원로로서 국민들에게 격려의 말을 전한다면.

김상근 : 우리 국민들의 마음이 마치 광야에 던져진 것처럼 쓸쓸하고 비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에게는 훌륭한 두 지도자를 가질 수 있었다는, 그런 자부심도 있다고 생각한다. 두 분의 대통령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들이 직접 뽑아 세웠고, 그 결과 민주주의를 이만큼 끌어올렸다. 우리 역사와 민주주의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자신감과 주권의식이 절실한 때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가 그런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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