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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의 첫 강제 이주 터 우슈토베…"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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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의 첫 강제 이주 터 우슈토베…"용서하소서"

[고려인 강제추방 80주년] ② 토굴 짓고 살던 고려인들, 카자크 민족과 하나 되다

하바롭스크는 독립운동가 이동휘, 김 알렉산드라 활동하던 곳


7월 24일 늦은 오후 블라디보스토크역 시베리아 횡단 열차 탑승 홈에 장대비가 쏟아졌다. 북쪽을 향해 밤새 달린 열차는 다음날 오전 10시쯤 동부 시베리아 수도 하바롭스크에 도착했다. 하바롭스크는 아무르(흑룡) 강가에 세워진 유서 깊은 도시다. 여러 해 전에 연해주 관련 학술회의 참석차 방문했는데,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상해 임시정부 초기 지도자였던 이동휘 선생과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로 이름을 남긴 알렉산드라 김이 활동한 곳이기도 하다.

열차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본색을 드러내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렸다. 기찻길 양옆으로 울창한 자작나무 숲이 나타났다. 하얀 줄기가 쭉쭉 뻗은 자자나무 행렬은 흰옷을 입은 병사의 열병식을 보는 듯했다. 바이칼 호수 곁의 일쿠츠쿠에 이르기 전까지 치타 울란우데 등 몇몇 도시에서 15분가량 정차하며 기차는 줄곧 달렸다.

한 평 남짓한 객실 공간에서 함세웅 신부, 이삼열 교수, 허진무 <경향신문> 기자와 필자까지 네 사람이 2층 침대를 양쪽에 놓고 식사와 취침을 하면서 공동생활을 했다. 집에서 가져온 밑반찬과 공항에서 사 온 김치통조림을 반찬으로, 차장실 옆 온수를 이용해 햇반이나 라면을 데워 먹었다. 주최 측에서 가끔 열차 식당 점심을 제공했으며, 그 자리에서는 특강이 열리기도 했다.

▲ 백군 최후의 지도자 콜차크 제독(왼쪽), 시베리아 철도를 완공한 알렉산드르 3세(오른쪽). ⓒ이부영

'시베리아의 파리' 일쿠츠크 아직 제정과 혁명의 유적 생생

회상열차 엿새째인 7월 28일,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소설가 안톤 체호프가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이름 지은 일쿠츠크에 도착했다. 가장 악명이 높은 시베리아 유형지이면서 귀족 유형자들이 모인 곳으로 유명해 문학과 미술, 음악이 꽃 피웠다는 동토 속 화원(花園)이다. 이곳에서 생산된 혁명을 부르는 문서와 홍보물이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확산됐다.

▲ 데카브리스트 지도자 발콘스키 공작. ⓒgoogle.com
일쿠츠크는 데카브리스트의 수장인 발콘스키 공작 덕에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리게 됐다. 데카브리스트인들은 문예를 한층 끌어 올렸다. 발콘스키 공작 등 제정러시아 장교단은 나폴레옹 군대를 추격, 파리를 3년 동안 점령했다. '12월 당원'이라는 뜻을 가진 데카브리스트들은 프랑스의 계몽주의와 자유주의에 '감염'되어 귀국하자마자 제정을 뒤엎고 공화정을 세우려 했지만 모두 유형에 처했다.

데카브리스트의 후예들은 100년 뒤 이곳 일쿠츠크에서 마지막 대회전을 겨뤘다. 제정파의 백군 대장 알렉상드르 콜차크 제독은 혁명군에게 완패하여 앙가라강 얼음 구멍에 수장되었다. 제독의 애인이었던 간호병은 끝까지 일쿠츠크의 즈나멘스키 사원의 수도원에 머물렀다. 1991년 소련방이 해체되고 콜차크 제독이 사면되자, 그의 동상이 2004년 즈나멘스키 사원 앞에 세워졌다. '10월 혁명' 뒤 제빵 공장과 종교 도서관으로 전용되었던 러시아 정교회 성당들은 본래의 역할로 돌아갔다. 지금 러시아에는 시베리아 철도를 완공한 알렉산드르 3세 황제, 혁명가 레닌, 콜차크 제독의 동상이 함께 서 있다. 이미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조용히 기념하고 있다.

'시베리아의 거울' 바이칼 깊고 푸른 신비감

'시베리아의 거울' 바이칼 호수는 깊고 푸르다. 호안 도시 리스비앙카의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바이칼의 색조는 신비하다. 바이칼 호수에게는 340명의 딸들(강들)이 있었는데 모두 어머니 말을 잘 들어 어머니 품으로 들어왔지만, 큰 딸(앙가라강)만 말을 안 듣고 먼 나라 왕자를 사모해 떠났다는 신화가 전해진다. 앙가라 강은 바이칼에서 대하 예니세이로 빠져나간다.

바이칼은 동아시아의 반도 남쪽에서 온 나그네에게 '네가 어디서 나서 어디를 거쳐 거기 가서 다시 나를 찾아온 줄 알기나 하느냐?'고 힐난하는 것 같다. 호수 앞에 서면 마음이 잔잔해진다. 이곳에 올 때마다 몇 차례 비슷한 경험을 했다. 울긋불긋한 헝겊들이 바람에 나부끼면서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산정에서 바이칼 여신에게 아리랑 평화추모제를 열고 고려인의 원혼을 위무했다. 함세웅 신부의 진혼 기도는 절실했다.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였다.

▲ 바이칼 호수. ⓒ이부영

일본군과 함께 잡힌 조선인 포로들 다수 흔적도 없어

일쿠츠크를 떠난 회상열차는 세계 최대의 강 예니세이의 다리를 건너는 시베리아 교통 요지 크라스노야르스크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소련군의 파죽지세로 만주의 일본 관동군 1만 명 이상의 조선청년들도 함께 사로잡혔지만 일부만 귀국하고 나머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곳에는 일본인의 위령비만 있을 뿐 조선인들은 종적이 없다. 그들을 찾아 애쓰는 정부는 남북 어디에도 없었다.

회상열차 여드레째인 7월 30일, 열차가 중앙아시아 철도로 갈리는 분기점인 노보시비리스크('새 시베리아 도시'라는 뜻)에서 환승 시간을 이용해 잠깐 내렸다. 노보시비리스크는 러시아 제3의 도시이자, 시베리아의 수도이자, 군사과학기술도시다. 대규모 오페라극장과 시립미술관이 있으며, 무엇보다 연구소로 가득 찬 도시다. 러시아의 우주과학 항공산업을 뒷받침하는 도시라고 한다. 민생을 연구하는 도시로도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페라극장 앞 광장에는 레닌 동상, 혁명과 평화의 남녀상, 러시아혁명 3대 주체인 노동자·농민·병사의 3인상이 리얼리즘 형식대로 투박하고 과감하게, 세밀한 표현을 삭제하는 기법으로 세워져 있었다. 전형적인 사회주의적 조형물이었다.

▲ 러시아 제3의 도시 노보시비리스크 오페라극장 앞 광장에 서 있는 레닌의 동상 왼쪽에는 혁명의 횃불을 든 남성과 올리브 가지를 든 평화의 여성이 함께 서 있다. 오른쪽에는 노동자·농민·병사로 대표되는 러시아혁명 3주체가 서 있다. 대부분 도시에서 레닌 동상은 수난을 겪었지만, 노보시비리스크의 레닌 동상은 건재하다. ⓒ이부영

회상열차 열흘째, 열차를 탄 채 카자흐스탄 입국 수속을 밟았다. 이틀을 더 달려 8월 1일 고려인 3000여 명이 첫 번째로 버려진 우슈토베에 도착했다.

우슈토베는 메마르고 척박한 땅이었다. 고려인 첫 강제 이주 터에 서는 마음은 울컥했다. 뒷날 세운 비석에는 "이곳은 원동(遠東)에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 1937년 10월 9일부터 1938년 9월 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정착지이다"라고 쓰여 있다. 황량한 벌판에 버려진 고려인들은 토굴을 파고 우선 추위를 피해야 했다. 인근의 카자크인들이 이들에게 먹을 것, 덮을 것을 가져다주고 도왔다. 고려인들은 이들의 은혜를 잊지 못한다.

이곳 비신바예브 카라탈주 지사는 일행을 환영했다. 고려인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진혼제를 열고 오찬을 베풀었다. 고려인 1세대인 96세, 93세 고령의 할아버지들이 그날을 증언했으며 카자크인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필자는 추도사에서 "영령들이시여, 우리를 용서하소서. 우리는 민족 분열을 현명하게 해결할 겁니다. 역사를 기억하고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몸부림을 계속 하겠습니다. 또한 고려인과 카자크 민족이 하나 됨을 축복해주소서"라고 기도했다.


▲ 고려인의 첫 정착지 우슈토베 참배기. 왼쪽 위편은 새벽 1시 열차로 도착한 일행을 우슈토베 시장을 비롯한 주민들이 환영하고 있는 모습. 왼쪽 아래편은 고려인 동포 아주머니들 속에서 93세 제1세대 할아버지가 흥에 겨워 춤는 모습. 아래 가운데 사진은 역시 96세 제1세대 할아버지가 1937년 상황을 설명하는 모습. 아래 왼쪽 사진은 우슈토베 첫 정착지 곁에 조성된 고려인 공동묘지. ⓒ이부영


회상열차 열하루째인 8월 2일, 카자흐스탄 제1의 도시 알마아띠에 도착해 청산리 봉오동의 영웅 홍범도 장군 추모 고려인 문화예술제에 참석했다. 고려극장과 고려인협회 주최로 문화예술 공연이 열렸다. 음향시설이 제대로 갖춰진 공연장이었다. 성춘향과 이도령 전통무용과 소리가 어우러지는 무대였다. 오페라 아리아 독창과 혼성 합창도 수준급이었다. 이역만리에서 고려인들의 우리 전통 예술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눈물겨웠다.

고려극장 야외연회장에서 일행을 위한 환영 만찬도 벌어졌다. 손님들을 위한 잔치는 언제나 풍성했다. 만찬상에 오른 술은 50도가 넘는 보드카였다. 다음날 열리는 학술대회를 위해 일찍 자리를 떴다.

▲ 회상열차의 종착지 카자흐스탄 알마띠에 도착해 고려극장과 고려인협회가 주최하는 홍범도 장군 추모 문화공연을 관람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성춘향과 이도령' 전통 창극과 오페라 아리아 여러 곡을 즐겼다. 이 먼 곳에서 우리 전통예술을 지켜가는 고려인들이 존경스러웠다. 왼쪽은 극단장에게 감사장을 수여한 모습. 오른쪽 위는 공연 후 만찬 모습. ⓒ이부영

회상열차 열이틀째, 제18회 세계한민족포럼 학술대회에서 필자는 '전환시대의 중견국가 한국은 무엇을 할 수 있나'라는 주제로 기조연설을 했다. 기존의 테두리 안에서 안보도 경제도 안정을 누리기는 어렵게 되었다는 인식이 필요하고, 한반도 평화와 국가 이익을 지키려면 지난날과는 다른 한국의 위상을 살려 과감한 사고와 의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자세한 내용을 공개할 예정이다.

이날 종합토론에서 우즈베키스탄 출신 빅토리아 김의 발언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 고려인들뿐 아니라 중국의 조선족, 일본의 재일동포들도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앓고 있다. 고려인들도 한국말을 배우려하지 않고 굳이 고려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려 하지 않는다. 중국의 조선족들의 공동체들도 와해되고 있다. 재일동포들도 민단 조총련을 가리지 않고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고 있다.

재외 코리안들이 무너지고 있다. 왜 그런가?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위기 때문에 코리안이라는 긍지를 지켜갈 수 없다. 제발 그만 싸우라. '통일'을 못하겠으면 '화해'라도 하라. 남북한이 화해하고 평화공존이라도 하면 재외 코리안들의 정체성은 걱정 안 해도 제대로 살아날 것이다."

길고 자세한 논문들이 아무리 많아도 이번 학술대회의 핵심은 김 빅토리아 박사의 이 짧은 논평으로 충분했다.


고려인 과거에서 미래로 눈돌리길, 북방경제 준비 있어야

2017년은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이 되는 해기도 하려니와 국내외에서 무척 많은 일이 겹쳤다. 광주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80주년 행사가 열리고, 동북아평화연대 등 고려인 관련 시민운동을 해온 단체들도 연해주와 중앙아시아를 순례하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고려인들이 겪은 처절한 희생과 고통은 제대로 기억되고 역사로 정리되어야 한다. 우리 말을 다시 습득하도록 돕고. 취업과 법적 제약에 대해서도 개선해야 한다. 이처럼 강제 이주를 강조하고 기억을 새롭게 하는 일도 올해 80주년을 계기로 바뀌어야 한다. 과거로부터 미래로 나아가야 하겠다는 것이다. 잊지는 않되 머무르지 않고, 고려인들이 우리 공동체 안에 지난날 그랬듯이 불편 없이 하나 되어 들어오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광주의 김병학 선생이 여러 해 노력해서 햇볕을 보게 되었듯 기억하려해도 박물관 없이는 어렵다. 그런 작업들이 우리 사회 어느 귀퉁이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걸 아는 것은 큰 기쁨이다.


▲ 카자흐스탄 대평원을 지나면서. ⓒ 이부영

그러나 큰 시야도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질 것이다.(문 대통령은 9월 7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이번에 블라디보스토크를 들러보니, 푸틴의 연해주 시베리아 개발 투자 유치가 눈에 띄게 진척되고 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온 연해주 진출은 진척이 잘 안 되고 있다. 이유를 밖에 돌리는 경향이 있지만, 역시 남북관계가 제대로 진척되지 않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싶다.

한국 정부도 북쪽과 제대로 협상이 안 되더라도 연해주와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먼저 큰 규모로 문을 여는 쪽으로 노력해야하지 않을까. 문 대통령의 큰 발걸음을 기대해본다. 앞으로 북방경제에 국가적 동력이 실릴 경우 고려인들의 역할이 다시 발휘될 것은 너무 자명하다. 전문 지식과 언어 능력을 지닌 고려인들은 그 날이 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스스로 준비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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