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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의 치명적 함정

[김윤태 칼럼] 사회적 세습의 문제점을 해결해야

우리의 상식과 다른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용어는 원래 긍정적 의미로 탄생한 것은 아니었다. 1958년 영국 사회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의 등장>이라는 풍자소설에서 이 용어를 최초로 사용했다. 그는 2차 대전 직후 영국에서 지능 검사(IQ)를 통해 학생을 평가하는 시도를 비판했다. 그는 평생 동안 IQ 시험이 계속 이루어지고 능력에 따라 엄격하게 직업이 할당되는 미래 사회를 풍자했다. 당시 영국의 학교 입학시험에서 실력 위주로 학생을 구분하는 현실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마이클 영에 따르면, 능력주의가 지나치게 확산되면서 업적을 가진 사람들이 상위층에 몰리고 하위층을 대변하는 사람들은 사라진다. 보수와 진보의 정당에는 사업가, 변호사 등 모두 성공한 사람들만 가득 찬다. 세습이 아니라 업적을 통해 성공한 상류층은 정당성을 가지고 과욕을 부려도 제제할 수단이 없다. 대기업 최고경영자의 연봉이 천정부지로 올라도 노동조합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결국 계층간 양극화가 심해지고 노동계급의 자녀는 다시 노동계급이 되는 상황이 고착화된다. 업적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승자 독식의 논리는 또 다른 불평등을 만들고 세대를 이어서 고착화 된다.

능력주의가 좋은 것인가?

그러나 세월이 흘러 마이클 영의 의도와 달리 능력주의는 좋은 의미로 둔갑했다. 오늘날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정당한 보상을 받는다는 사고방식을 표현한다. 20세기 후반 낙관적인 사회학자들은 부모의 신분에 따른 세습주의와 달리 개인의 실력과 업적으로 평가를 받는 능력주의가 등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0세기 냉전 시대에 미국에서 능력주의는 소련의 엄격한 평등주의와 다른 대안으로 관심을 끌었다. 균등한 기회가 진정한 능력주의를 이끌고 궁극적으로 순수한 평등주의가 가능하다고 가정했다. 누구나 능력을 가지면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가 커졌다.

그러나 오늘날 능력주의의 가정은 사회의 현실과 매우 다르다. 미국 사회학자 맥나미와 밀러는 <능력주의는 허구다>에서 능력주의가 개인의 능력이 성공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지금 세상은 비능력적 요인이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고 비판한다. 한국 사회에서도 개인의 능력적 요인이 삶에 미치는 영향은 과대평가한 반면, 비능력적 요인이 미치는 영향은 과소평가되었다. 개인의 타고난 재능, 능력, 근면 등으로 대변되는 능력적 요인보다 계층과 부모 배경에 따른 교육 기회의 불평등, 부의 세습과 특권과 특혜의 대물림 등과 같은 비능력적 요인들이 '기회의 불평등'을 키우고 있다.

뛰어난 개인에게 특별한 보상을 주어야 하는가?

대부분의 주류 경제학자들은 개인의 능력에 따른 시장의 차등적 분배를 당연하게 간주한다. 대표적으로 '인적 자본(human capital)' 이론은 개인의 교육과 기술 수준의 차이에 따라 소득 차이를 분석한다. 이러한 관점은 불평등의 원인이 사회가 아니라 개인에게 있다고 떠넘긴다. 반면에 삼성, 현대 등 대기업 임원들은 엄청난 연봉, 상여금, 스톡옵션을 받지만, 재능과 노력에 따른 보상을 제공해야 한다는 능력주의에 따라 정당화된다. 1990년대 이건희 삼성 회장은 '천재 한 명이 수 만 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라고 말했다. 그의 '천재 경영론'은 고액 연봉을 정당화했고 거액의 스톡옵션을 유행처럼 만들었다. 오히려 평등주의는 뛰어난 인재의 육성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능력주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비범한 최고경영자들의 성공적인 기업을 만들어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서 특출한 재능을 가진 기업인들에게 최고의 보수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재능을 사용될 수 없고, 기업은 만들어지지 않고, 일자리도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심지어 최고경영자(CEO)에 따라 회사의 주가가 급등하기 때문에 아주 작은 보상을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변한다. 최고경영자들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없이 항상 최고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세계 금융위기로 회사가 도산해도 시티그룹 최고경영자의 재산은 아무런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경제위기로 돈을 잃거나 직장을 잃거나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은 경제위기에 아무런 책임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 청년들의 팍팍한 삶을 풍자한 퍼포먼스. ⓒ2030정치네트워크

능력주의의 치명적 위험

오늘날 한국에서 능력주의의 가정은 더 이상 신뢰를 잃은 지 오래이다. 능력에 따라 부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한국의 초등학생들은 성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로 능력이 아니라 '부모의 배경'을 꼽고 있다. 과거에 많은 한국인들은 교육을 통해 사회이동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러한 개인주의, 능력주의, 교육 지상주의는 85%에 이르는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 진학률이라는 신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 계층 상승의 통로가 되는 교육이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결정되면서 균등한 기회라는 민주주의의 가치가 약화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대학 입학시험은 성적순으로 결정하면 공정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학생들의 성적은 부모의 경제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부모의 능력이 더 영향을 미친다. 이제 '개천에서 용난다'는 과거의 말이 되었다. 아이를 잘 키우려면 '할아버지의 재력, 아빠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퍼지고 있다. 상위 계층을 향한 사회이동의 기회는 20세기 후반 한국 사회의 일시적 현상일지도 모른다. 명문대 입학생의 지역 격차는 점점 커지고 있다. 출생에 따라 결정되는 경직된 계급구조가 출현하고 있다. 이제 불평등은 사회의 영구적 제도가 되고 있다.

2016년 권력형 비리로 한국을 흔든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페이스북에 "돈도 실력이야, 억울하면 네 부모를 원망해"라고 적어 전국의 중고생을 격노하게 만들었다. 돈만 있으면 불법 비리를 저질러도 상관없다는 금전 만능주의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오늘날 심각한 문제는 순수한 능력주의가 부의 세습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최상위층의 부유한 가정의 자제는 태어날 때 엄청난 재산을 상속 받는다. 중산층 자녀는 사교육비 혜택을 많이 받고 부모의 도움을 더 좋은 취업 기회를 얻는 경우가 많다. 저소득층 자녀는 상대적으로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하고 인기 있는 대학에 입학하기 어렵다. 좋은 인턴 경력도 취업 기회도 얻지 못한 채 다른 출발선에서 사회에 진출한다. 자신의 학자금은 물론 주택 자금과 결혼 비용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저소득층 자녀는 훨씬 더 불리한 인생 기회를 갖는다.

사회적 세습의 제도화

이처럼 부모 세대의 부와 소득에 따라 자녀들이 상이한 기회를 가지면서 사회적 대물림이 제도화된다. 이는 순수한 능력주의의 외피를 쓴 채 세습주의의 현실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자유시장의 힘으로 사회의 평등이 충분히 보장되기 어렵다. 순수한 능력주의로 인해 성공한 개인이 축적한 부가 재분배되지 않고 다음 세대에 고스란히 상속되어 신분 세습이 일어난다면 불평등은 더욱 커질 것이다. 재벌 2세, 3세가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 비즈니스 스쿨을 마친 후 아버지의 회사에서 경영 수업을 받고 다른 사람들보다 능력이 뛰어나다면 공정한 경쟁라고 할 수 있을까? 학벌과 경력이 만든 능력주의는 부자의 세습을 정당화할 뿐이다.

마이클 영의 책이 출간되고 50년이 지난 후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영국을 완전히 능력주의로 탈바꿈하자'는 연설을 하자 86세가 된 마이클 영이 <가디언>에 '능력주의를 타도하자'라는 글을 써 블레어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능력주의가 사회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능력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의 주장과 달리 개인의 부는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의 기여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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