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촌 장관 취임 이후 문화체육관광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지난 1월 경영 합리화를 이유로 해체된 국립오페라합창단 단원들이 매주 문화부 앞에서 집회를 열었고, 황지우 총장 사퇴로 한 때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과 학부모도 매일 1인 시위를 벌였다.
요즘 문화예술인들의 화두는 바로 '유인촌 장관 퇴진'이다. '문화예술 자율성 회복을 위한 미술인 성명'이라는 제목의 온라인 성명에 1000명이 넘는 미술인이 동참했고, 6월 9일 작가선언, 10일 예술 계열 대학생 선언, 16일 영화인 선언 등 시국 선언이 줄을 이었다.
시국 선언을 계기로 지난 6월 각계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문화행정 정상화와 예술 자율성 회복을 위한 문화예술인 모임'(이하 문화예술인 모임)을 만들었다. 이들은 29일부터 매주 문화부 앞에서 릴레이 퍼포먼스를 진행할 예정이다 .
29일 오후 문화부 앞에서 미술인 고승욱 씨를 만났다. 주목받는 행위 예술가인 그는 더운 날씨에도 우비를 뒤집어쓰고 'MB-유인촌에 멍든 문화 무지개'라는 제목의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그에게 최근 화두가 된 '문화계 좌파 색출 행보'와 미술계 동향을 물었다.
"표적 감사→기관장 해임→친정부 인사로 물갈이"…문화부 행정 수순
▲ 29일 'MB-유인촌에 멍든 문화 무지개'라는 제목으로 미술인 고승욱 씨가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프레시안 |
고승욱 : 노무현 정부 당시 문화예술 정책이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기조였다면,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지원은 안 하되 간섭은 한다'로 변한 듯하다. 문화 행정은 실종된 대신, 감찰 활동은 독재시대로 돌아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저인망식 표적 감사다. 한국예술종합학교부터 시작해 540개가 넘는 문화 기관 및 단체가 집중 감사를 받았다. 꼬투리 잡을 만한 게 나올 때까지 감사를 장기간 진행하고, 무언가 나오는 게 있으면 해당 단체 기관장 해임으로 이어지는 수순이다.
문화예술위원회 김정헌 위원장, 김윤수 현대미술관장, 김철호 국립국악원 원장,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등 노무현 정부 당시부터 문화예술기관장을 맡고 있었던 사람들이 현 정부 들어 줄줄이 해임됐다. 기관장 해임 사태는 어렵게 성취해낸 기관의 독립성을 해치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다.
프레시안 : 지난해 3월 12일 유인촌 장관이 "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스스로 물러나야한다"고 말해 논란이 된 바 있다. 그 연장선으로 보는가.
고승욱 : 문화예술위원회 김정헌 위원장의 경우, 유인촌 장관이 취임하면서부터 퇴진을 요구해 왔다. 해임 사유는 네 가지인데, 그 중 세 가지가 '시설물을 번호 키로 관리해서 보안에 소홀했다' 등 업무상 실수에 관련한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사소한 빌미를 잡아 해임하고, 문화부의 코드에 맞는 인사로 '물갈이'하는 경로를 밟고 있다.
"정책 방향도, 비전도 없는 문화부"
프레시안 : 미술계 쪽에서는 인사미술공간이 '사실상 폐관됐다'는 얘기가 들린다.
고승욱 : 인사미술공간은 작은 기관이었지만 현대 한국 미술의 치열한 실험장이었다. 2000년에 문을 열어 신진 작가 지원, 국제 미술 교류 등 다양한 활동을 추진해 왔다. 유인촌 장관 취임 이후에 인사미술공간이 공모제 형식으로 바뀌고, 국제 교류 등 인사미술공간이 추진했던 사업들이 아르코 미술관으로 이전됐다. 사실상 손발이 묶인 형국이다.
인사미술공간 운영은 김정헌 위원장의 해임 사유 중 하나였다. 신진 작가 지원이라는 인사미술공간의 설립 목적과 다르게, 국제 미술 교류 등 '설립 목적과 무관한' 사업 추진을 했다는 문제제기였다. '설립 목적'을 내세우며 공격하는 것은 한예종 사태 때도 똑같이 발생했던 일이었다. '왜 영재 교육이라는 설립 목적과 다른 업무를 했느냐'는 논리였다. 마찬가지로, 문화부는 '왜 신진 작가 지원이라는 설립 목적과 다른 업무를 했냐'는 논리를 펼쳤다.
과연 이러한 논리가 타당하고 정당한가? '설립 목적'이란 것이 설립될 당시의 상황에 부응하는 것이라면, 기관은 이를 준수함과 동시에 변화하는 상황에 대한 유연성도 있어야 한다. 인사미술공간이 문을 열던 당시, 신진 작가 지원이라는 사업 모델은 꽤나 유용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같은 내용의 사업을 추진하는 민간 주도의 비영리 전시 공간이 서울에서만 30여 개로 늘어났다. 이에 인사미술공간은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신진 작가 지원과 국제 교류라는 2개의 사업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올해 들어 인사미술공간의 국제 교류 사업은 아르코 미술관으로 이전되고, 인사미술공간은 신진 작가 지원 사업만을 추진하는 곳으로 전락했다.
프레시안 : 비단 미술계 뿐 아니라, 문화계 전반이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듯하다.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도 공모제로 전환했다가 반발에 부딪히자 가까스로 취소됐다고 들었다.
고승욱 : 그렇다. 미술, 영화, 음악 등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비슷한 사례들이 발생한다. 얼핏 보면 사소한 개개의 사건들이지만, 이 모든 것들이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져서 큰 그림을 그려낸다. 유인촌 장관의 문화 행정 파행과 자율성 침해가 바로 그것이다.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역시 "좌파들의 마르크스주의 실험장"이라며 공격을 받아왔다.
문제는 유인촌 장관의 문화부가 아무런 정책 방향도, 비전도, 내용도 없다는 것이다. 유인촌 장관은 "미래를 향한 글로벌 코리아"를 문화부 3대 중점 과제로 내세운 바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인사미술공간의 국제 교류를 공격했다. 이 정책적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문화 기관에 대한 감사와 기관장 해임 수순을 그저 '원칙적인 행정 절차'로 볼 수 있는가?
▲ 지난 6월 15일 서울 정동 프란체스코교육회관에서는 미술, 영화, 음악 등 여러 분야의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문화행정 정상화와 예술 자율성 회복을 위한 문화예술인 공개 토론회'를 열었다. ⓒ프레시안 |
"좌파 적출이 아니라 민주주의 적출이다"
프레시안 : 독립영화에 대한 예산이 삭감되는 등, 문화 다양성 영역에 대한 지원도 많이 줄었다고 들었다.
고승욱 : 한반도 대운하가 생물 다양성을 파괴하듯, 문화부의 규모 위주의 정책은 문화 다양성을 파괴하고 있다. 지난 2월 유 장관은 '빌보드 차트'를 흉내 낸 이른바 'K-POP 차트', 그리고 '한국판 그래미상'을 제정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한국대중음악상과 인디 밴드들에 대한 지원은 줄였다. 미술 쪽에서는 '한국판 터너상'을 만들겠다고 한다.
이는 다시 말해 다양성 영역의 예산을 축소해서 상업성 있는 분야에만 지원하겠다는 의미다. 요즘 드라마 <선덕여왕>을 즐겨 보는데, 우리 예술계는 '막강한 자본력과 권력을 가진 미실공주 쪽에 설 것이냐, 우애와 협동, 화합을 지향하는 선덕여왕 편에 설 것이냐'는 일방적인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이른바 '주류'에 집중된 지원으로 문화계에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 부분이다.
프레시안 : 문화예술계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일련의 상황에 대해, 유 장관이 소위 '문화계 좌파 적출'을 시도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고승욱 : '좌파 적출'이 아니라 '민주주의 적출'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좌파 적출'이라는 프레임으로 이 상황을 바라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설사 문화예술기관의 기관장들이 좌파라 할지라도, 이들을 합법적이지 않은 이유로 밀어내서야 되겠는가. 문화부와 뉴라이트 단체들은 '좌파 적출'이라는 논리로 파행적인 문화 행정들을 합리화시키고 있는 듯하다. 좌, 우 가릴 것 없이 적용돼야 할 법의 보편성을 좌우대결이라는 함정에 빠뜨리면서 법의 차별적 적용을 합리화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유인촌 장관의 문화 정책은 '국가권력에 의한 자율성과 신뢰의 파탄'으로 봐야 할 것이다.
프레시안 : '문화예술인 모임'의 향후 활동 계획을 알려 달라.
고승욱 : 문화예술인 모임은 영화, 음악, 미술, 만화, 연극, 문학 등 각 분야에 종사하는 문화예술인들과 한예종 학생들이 문화행정 정상화와 예술 자율성 회복을 위해 만든 모임이다. 지난 6월 15일 유인촌 장관의 문화행정에 대한 토론회를 진행했고, 매주 수요일 문화부 앞에서 '릴레이 예술인 행동'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각 장르별 문화행정 파행 사례를 담은 백서 출간 역시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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