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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때문에 하늘 끝에 매달린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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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때문에 하늘 끝에 매달린 노동자들

[조선계 블랙리스트를 아십니까 ①] "40여 군데 이력서 냈으나 모두 거절했어요"

'조선계 블랙리스트를 아십니까' 기획은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되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후원할 수 있습니다. ☞ 바로가기 : 스토리펀딩)
하늘 끝에 매달려 겨우 버틴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무한의 암흑으로 한없이 추락하는 꿈이 반복된다. 고개만 슬쩍 숙이면 보이는 까마득한 지면에 아찔한 현기증이 난다. 푹푹 꺼지는 지면이 언제 자기를 덮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몫.

이 세상에 겨우 매달려 있는 기분은 아닐까.

지난 11일 새벽 조선소 하청 노동자 두 명이 20여 미터 높이 하늘로 올랐다. 현대중공업 그룹 내 현대미포조선 하청노동자가 울산 염포산터널 입구 고가도로 교각(교량 상판 밑 기둥)에 오른 것. 대선을 채 한 달도 남기지 않은 날이었다.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왜 모든 언론과 국민의 관심이 대선에 쏠린 이 시기에 '굳이' 이러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그들이 하늘로 오른 지 일주일이 지난 17일, 울산에는 봄비 아닌 봄비가 쏟아졌다.

"요즘 노동자들이 엄청 해고됐다 아닌교. 사람들이 대거 사라지니 택시 장사하기도 쉽지 않은기라. 죽겠다 아닌교."

하늘에 매달린 두 명의 노동자를 만나러 가는 길. 바쁘게 움직이는 와이퍼 소리에 맞춰 택시 운전수의 목소리도 빨라졌다. 기자도 맞장구쳤다.

"회사가 흑자인데도 그렇게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해고 하니 답답하네요. 굳이 해고하지 않아도 다른 방법이 있을 텐데..."

실제 현대중공업은 2016년 4분기 4,377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고 2017년 1분기 3,515억 원 흑자를 기록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5분기 연속 흑자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해고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가 큰 문제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에 따르면 현대중공업에서는 2015년부터 진행된 구조조정으로 이미 2만여 명의 하청노동자들이 쫓겨났고 앞으로도 2만여 명이 더 해고될 위기에 놓여 있다.

하지만 기자의 맞장구에 택시 운전수는 다른 답을 내놓았다. 회사가 흑자가 된 것은 하청 노동자를 대량해고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란다. 더 많은 하청 노동자가 해고돼야 회사가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흑자임에도 지속해서 대량해고가 이어지는 이 상황을, 그리고 자기 밥그릇까지 위협함에도 '굳이' 회사 입장을 옹호하는 택시에 있기가 불편했다. 중도에 택시를 세웠다.

▲ 고공농성장. ⓒ프레시안(허환주)

돌고 돌고 돌아 찾은 조선소, 하지만...

그렇게 빗속을 뚫고 찾아간 고공농성장. 고가도로 바로 아래 교각인지라 농성장 위아래로는 끊임없이 대형차량이 오갔다. 자연히 소음과 진동도 끊이지 않았다. 바다 지근거리인지라 강풍도 농성장을 위협했다. 봄이 왔으나 농성장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그곳에 전영수(42) 씨가 있었다. 어린 시절 그의 집안은 넉넉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일을 시작해야 했다. 부산 영도에서 어망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다 넥슨타이어 회사에서 취업했다. 타이어 검사 업무였다. 그때부터가 본격적인 일의 시작이었다.

돈을 빨리 벌고 싶었다. 일을 하면서 개인 사업도 여럿 벌였다. 모두 빚이었다. 과하면 체한다고 했던가. 여러 악재가 겹쳤다. 벌여 놓은 사업이 모두 망하면서 신용불량자가 됐다. 배우자는 그런 전 씨를 견디지 못하고 떠났다. 결혼한 지 1년도 안 된 때였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모두 자기 잘못이라 생각했다. 2003년의 일이다.

먹고 살려면 다시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신용불량자를 받아주는 곳은 거의 없었다. 찾고 찾다 염색공장에 취업했다. 모두가 싫어하는 곳이었다. 전 씨 입장에서는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곳은 모든 게 상상 이상이었다.

늘 약품을 끼고 살았지만 항상 조심해야 했다. 실에 염색을 입히기 위해 조합된 염료들은 화학약품으로 대부분 위험 약품이었다. 황산이 대표적이다. 게다가 염료를 조합하는 작업은 무척 위험했다. 큰 가마솥에 여려 염료를 넣은 뒤 뚜껑을 덮고 열을 가해 화학약품을 만들었다. 이 뚜껑은 조합이 다 끝난 뒤, 열려야 하지만 가끔 열을 가하는 중간에 열리기도 했다. 아무런 예고나 징후도 없이 열렸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가마솥에서 나오는 뜨거운 김, 즉 화학약품 입자들이 가마솥 근처에서 일하던 노동자를 덮쳤다. 피할수 없는 죽음이었다. 그렇게 동료 여럿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전 씨는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했다.

노동안전도 최악이었지만, 급여도 형편 없었다. 20년 근속 직원 월급이 고작 200여만 원이었다. 미래가 없었다.

마침 조선소에서 일하던 큰형이 전 씨에게 조선소 일을 권유했다. 일이 힘들지만 돈은 많이 준다고 했다. 여기보다 더 힘들까 싶었다. STX 하청업체에서 사상(그라인더로 용접 부위를 다듬거나 부식된 부위를 깎아 내는 작업) 업무로 조선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때부터 '떠돌이' 인생이 시작됐다. 어느 정도 기술을 배운 이후, 물량팀에서 일했다. 일이 있다고 하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의 트럭에는 늘 작업에 필요한 장비들이 준비돼 있었다.

당시 한 달 수입은 꽤 됐다. 조선업이 호황이기도 했다. 물량팀장도 하게 됐다. 하지만 불안은 여전했다. 물량팀에서 미래란 없었다. 작업소장 한 마디에 잘리는 곳이 물량팀이었다. 여러 업체에서 돈으로 장난질도 쳤다. 떠돌인 인생이 지치기도 했다. 20011년 지금의 현대미포조선 하청업체에 안착했다. 세계1위라는 현대중공업 그룹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여느 조선소와는 다르리라 믿었다.

ⓒ정기훈

사람 대접 받을 수 없었던 하청 노동자

하지만 얼마 안 가 깨달았다. 어딜 가나 조선소는 똑같았다. 하청 노동자는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 이들은 그저 일하는 기계였다. 자괴감마저 들었다.

울산이라는 도시 자체가 싫어졌다. 2015년께 일을 그만두고 어머니가 계신 부산으로 내려갔다. 다른 일을 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배운 게 도둑질이었다. 다시 조선소에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부산의 어느 조선소에도 일감이 없었다. 결국, 버티다 못해 다시 울산으로 올라와 현대미포조선 하청업체에 재취업했다. 2015년 12월의 일이다.

다시 돌아오면서 달라진 게 있다면 하청 노조에 가입했다는 점이었다. 그간 늘 생각했던 바였다. 다시는 일하면서 자괴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은 늘 하청 노동자이지만 정작 대접도 못 받고, 소모품으로 사용된다. 항상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현장에서 일해야 하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한다. 부당한 일을 겪어도 언제까지 아무 말 못하고 일해야 하는가.'

이를 극복하고 싶었다. 그가 하청 노조에 가입한 이유다. 그에게 사람 마음이란 숨길 수는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전 씨는 회사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하청 노조에 가입하면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건 상식이 된 지 오래다. 블랙리스트에 오를 경우, 원청은 어떻게든 이들을 공장 밖으로 쫓아내려 하청을 압박한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상 공장 밖으로 나가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전 씨가 소속된 현대미포조선 하청업체 동양산업개발은 업체대표가 건강이 안 좋아졌다는 이유로 지난 9일 폐업했다. 통상 이렇게 폐업할 경우, 새 사장이 업체를 인수하거나 다른 업체와 합병하는 게 기본이다. 그럴 경우, 원 업체 소속 노동자들은 관련 업계에 재취업하는 게 관례다.

실제 이 업체 노동자 70여 명 중 60여 명은 관련 업계에 재취업했지만 10여 명은 고용이 승계되지 않았다. 이들 중 개인 사유로 일을 그만둔 노동자를 제외한 나머지 노동자는 모두 하청 노조 소속이었다. 전 씨, 그리고 함께 고공농성 중인 이성호(47) 씨도 여기에 포함됐다.

ⓒ프레시안(허환주)

40여 군데에 이력서 냈으나 모두 거절

전 씨와 이 씨는 한 달 전 업체 폐업 소식을 접하고 스스로 구인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블랙리스트 때문에 폐업 후 고용승계가 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했지만 이미 블랙리스트의 효력은 작동되고 있었다.

"한 달 간 40여 군데에 이력서를 넣고, 전화연락 등을 했지만 모두 거절했어요. 부담스럽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당신이 사장이라면 받겠느냐'는 말까지 들어야 했어요. 한 번은 구인광고를 낸 업체를 찾아가 업체 총무를 만났는데 '일이 많아 거의 매일 잔업을 해야 하는데 괜찮겠느냐'고 묻더라고요. 당연히 저는 '문제없다'고 했죠. 그러자 그쪽에서 잘됐다면서 이런저런 서류를 준비해달라고 했어요. 분위기가 좋았어요. 겨우 재취업을 할 수 있게 됐구나 싶었죠.

그런데 그렇게 만난 지 1시간쯤 지났을까. 갑자기 업체 총무에게 전화가 왔어요. 자기네 회사에 일이 없어 직원을 뽑을 수 없다고 했어요. 일이 없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는 변명이 뒤에 붙었죠. 황당했지만 어쩌겠어요. 블랙리스트라는 게 무섭긴 무섭구나 싶었죠."

전 씨는 현대미포조선이 막히자 현대중공업 하청에도 이력서를 넣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10여 년 경력의 사상공이었지만 블랙리스트는 넘을 수 없는 철벽이었다. 그가 하늘 끝에 매달린 이유다.

대선주자들은 이 노동자의 사연을 알 수나 있을까. 이날 하늘 끝에 매달린 전 씨 아래로 안철수 대선 후보의 선거유세차량이 천천히 지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유세차량에서 나오는 노랫말은 지금의 상황과 대조적이었다. 이날은 대통령 선거 유세 첫날이었다.

"떳다 떳다 안철수, 날아라, 날아라. 높이 높이 날아라. 우리 안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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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환주

2009년 프레시안에 입사한 이후, 사람에 관심을 두고 여러 기사를 썼다. 2012년에는 제1회 온라인저널리즘 '탐사 기획보도 부문' 최우수상을, 2015년에는 한국기자협회에서 '이달의 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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