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현지 시각)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이복형제인 김정남 씨가 피살됐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19일(현지 시각) 북한 여권을 소지하고 있는 용의자가 모두 5명이라면서 사실상 이번 사건이 북한의 소행임을 시사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역시 북한이 사건의 배후일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다만 정 전 장관은 이번 사건을 "분명한 것은, 사건 발생 장소가 말레이시아일 뿐이지, 내용적으로는 사실상 북한 내부 권력 투쟁이다. 형제끼리 피를 보는 '골육상쟁'"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만약 김정남이 미국에서 망명정부를 세운다면 어떨까?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트럼프 및 공화당 치하의 미국에서, 허술하지만 망명정부를 만들어 놓고 그쪽에서 목소리를 내면 김정은 입장에서는 피곤한 정도가 아니라 위협을 느낄 수 있다"며 피살 원인을 분석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김정남 피살 사건이 알려진 직후인 지난 15일부터 사실상 이를 북한의 소행으로 규정한 채 이를 안보 위협론의 소재로 삼고 있다. 이에 대해 정 전 장관은 "이는 전형적인 북풍 몰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북한의 ICBM이나 군사적 대남 도발과는 전혀 무관한,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 김정남 피살 사건을 안보 위협이라고 말하면서 반(反)북한 정서를 일으켜서, 이런 북한과 대화하고 북한에 먼저 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치고 나올 것"이라며 "그런데 사실 진짜 위협은 지난 12일 북한이 발사한 북극성 2호"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 역시 한국 정부가 적절히 대처하면 얼마든지 외교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다. 정 전 장관은 미국의 트럼프 정부 역시 북한 문제를 선제타격과 같은 군사적 방안보다는 대화와 같은 외교적 방안에 방점을 두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북극성 2호 발사 이후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의 입장에 100% 동의한다"는 말 외에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은 점, 틸러슨 국무장관 후보자가 상원 인준 청문회에 제출한 자료에서 선제타격이 없었다는 점 등을 언급하며 외교적인 해결이 선택지에 올라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또 지난해 10월과 11월 북미 간 1.5트랙 접촉 이후 유엔 대표부를 중심으로 북미 간 접촉이 이뤄지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면서, 양측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해 우리의 정책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한편 정 전 장관은 이번 일로 북중 관계가 당분간 경색 국면에 들어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벌써 중국이 북한산 석탄 수입을 전면 금지하겠다고 발표하지 않았나?"라며 "지난 12일 북한이 발사한 북극성 2호와 김정남 피살 사건이 석탄 수입 금지의 주요 이유라고 봐야 한다"고 진단했다.
정 전 장관은 "중국은 북한이 '중국이 김정남을 보호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기분이 나쁠 것"이라며 "예전에 북한이 이번과 비슷한 일을 꾸미려고 할 때 중국은 자기들 영토 내에서 그런 짓을 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이번에 중국 영토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중국 입장에서는 자기들의 말을 전혀 듣지 않은 북한이 꽤나 괘씸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인터뷰는 지난 20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프레시안 :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이복형제인 김정남이 피살됐습니다. 말레이시아 현지 경찰에 따르면 북한 여권을 가진 용의자 1명이 체포됐고 그 외 4명의 북한 여권 소지자가 더 있다고 하는데요.
말레이시아 발표 직후 정부는 김정남 피살을 북한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남한이 처한 중대한 안보 위협을 확인한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습니다. 김정남, 정말 북한의 소행일까요?
정세현 : 현재 상태로는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상황입니다. 북한 여권을 가지고 있는 리정철이 붙잡혔기 때문에 북한 소행이 유력시됩니다.
물론 본인은 범행을 부정하고 있지만,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로 특검의 조사를 받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잡아떼지 않았습니까? 국가 권력인 검찰 앞에서도 부인하는데 외국 경찰이 뭐가 얼마나 무서워서 있는 그대로 진술하겠습니까?
그리고 북한은 과거 이보다 더한 사건도 저질렀습니다. 아웅산 테러, 칼(KAL)기 폭발 사건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북한이 저질렀을 가능성은 상당히 크다고 봅니다.
문제는 이번 사건이 마치 안보 위협의 씨앗인 것처럼 평가한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황교안 권한대행은 김정남 피살 다음 날부터 안보를 이야기했는데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안이 헌법재판소에서 인용될 경우 조기 대선이 치러지는데, 이를 염두에 두고 이른바 '북풍 몰이'를 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번 사건은 발생 장소가 말레이시아일 뿐이지, 내용적으로는 사실상 북한 내부 권력 투쟁입니다. 형제끼리 피를 보는 '골육상쟁'이라는 겁니다.
김정남은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남입니다.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 외국에서 살고 있긴 하지만 그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물론 김정남이 김정은이 후계자가 되고 난 뒤에 자신을 살려달라는 탄원서를 내기도 했다지만, 사실 김정은도 김정남이 성가신 존재일 수 있습니다.
김정은이 옳은지 그른지의 문제를 떠나서, 외부에서 김정은 암살론이나 북한 정권교체론이 나오고, 심지어는 망명정부를 구성해서 탈북자들이 그 주변에 모일 것 같다는 이야기도 나오니까 김정은 입장에서는 화근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그런데 정치의 세계에서 도덕적인 판단만 하면 원인 분석이 힘들고, 그러면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오는 것도 어렵습니다. 도덕적인 기준만 놓고 보니까 인권 탄압이다, 테러지원국으로 북한을 재지정해야 한다는 대책 아닌 대책만 나오는 겁니다.
프레시안 : 김정남이 이미 1990년대부터 해외를 떠돌아 다녔던 인물이라서 북한 내부의 정치적인 기반도 없는데, 왜 김정은한테 위협이 되는 것인지 의아하다는 반응도 있습니다.
정세현 : 사건이 일어난 말레이시아나 북한과 그나마 친한 중국에서는 당연히 망명정부를 세우지 못하겠죠. 하지만 만약 미국에서 망명정부를 세운다면 어떨까요? 더군다나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트럼프 및 공화당 치하의 미국에서, 허술하지만 망명정부를 만들어 놓고 그쪽에서 목소리를 내면 김정은 입장에서는 피곤한 정도가 아니라 위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망명정부 세워서 시끄럽게 하는 것은 예전에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김형욱 전 중정부장은 박정희 정권 내에서 여러 가지 불편한 지시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해외에 나가서 떠들기 시작하면 정권에 위협이 되는 겁니다.
게다가 김정남은 김형욱과는 달리 '백두 혈통'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김정남이 해외에서 내놓는 발언은 김정은에게 더 아프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 : 일각에서는 중국이 김정남을 앞세워서 유사시에 북한을 접수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습니다.
정세현 : 중국이 김정남을 보호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나오는 예측입니다. 김정남이 주거지를 중국에 두고 있기도 하구요. 또 중국과 친분이 많았던 고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각별하게 김정남을 챙겼던 이력도 있으니까요. 장성택이 수시로 중국을 드나들면서 중국 당국자들한테 김정남을 잘 부탁한다고 이야기했겠죠. 그러니까 중국은 적어도 자국 영토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이게 심각한 주권 침해일 수도 있거든요.
그렇다고 중국이 김정남을 평양으로 귀환시켜서 친중국 정권을 세우려고 했을까요? 이건 국제정치 현실상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만약 그런 시나리오대로 실제 일이 벌어지면 그건 중국에 대한 북한의 영향력이 확고해지는 건데, 미국과 러시아가 이걸 가만히 두고 보고 있을까요?
소위 작은 나라는 큰 나라에 붙어서 명맥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외교 관념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는 가능하겠지만, 북한 핑계를 대고 중국을 압박해 들어가야 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입장에서 볼 때는 굉장히 불리한 시나리오입니다. 미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이유입니다.
프레시안 : 한국의 국정원이 김정남을 망명시키려고 한다는 관측도 있습니다.
정세현 :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국정원의 공작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건 곧 남북관계를 포기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김정남이 미국으로 가는 것과 한국으로 들어오는 것은 천양지차입니다.
프레시안 : 김정남 피살 사건이 북중 관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정세현 : 좀 불편해질 겁니다. 벌써 중국이 북한산 석탄 수입을 전면 금지하겠다고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지난 12일 북한이 발사한 북극성 2호와 이번 사건이 석탄 수입 금지의 주요 이유라고 봐야 합니다.
물론 중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안을 충실히 이행하겠다는 명분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지금이냐는 시점의 문제를 고려했을 때, 결국 이번 사건에 대한 불쾌감의 표시로 해석해야 합니다.
중국은 북한이 '중국이 김정남을 보호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점에 대해 기분이 나쁠 겁니다. 물론 중국이 김정남을 김정은의 대체자로 보호했다는 건 아닙니다. 일단 자기들 영토에 들어왔으니 보호한다는 정도였겠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김정남은 삼한 시대에 운영됐던 '소도'에 있는 사람이라고 취급할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북중 관계를 발전시켜나갔던 장성택이 부탁했던 사람이 김정남이기도 한데, 비록 중국의 영토 밖이긴 하지만 그런 사람을 북한이 이렇게 처리했다는 것이 불편할 겁니다.
또 예전에 북한이 이번과 비슷한 일을 꾸미려고 할 때 중국은 자기들 영토 내에서 그런 짓을 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도 김정남이 중국 영토를 벗어나서 말레이시아에 있을 때 일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은데, 중국 입장에서는 자기들 말을 전혀 듣지 않은 북한이 괘씸할 겁니다. 장성택 처형 때 중국과 북한이 6개월 정도 사이가 안좋았는데 최소한 이 정도는 갈 겁니다.
프레시안 : 일부에서는 북중관계에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습니다. 석탄 수입 전면 금지는 단지 '제스처'일 뿐이고, 지난 2015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북중관계를 정상화한다고 했기 때문에 이런 정도의 일로 관계를 틀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입니다.
정세현 : 물론 중국이 북중관계를 틀어버리는 수준으로까지 이번 일을 처리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런 일 때문에 중국이 북한을 완전히 고립 시키고 궁지에 몰아넣을 경우 미국과 중국 대결 구도에서 중국이 가질 수 있는 레버리지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대중 압박을 그나마 완화시키거나 피해 나갈 수 있는 카드가 북중 관계입니다. 그걸 스스로 차단할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다만 북극성 2호 발사와 김정남 피살 등 두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기 때문에 중국이 불쾌감을 표시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중국이 석탄 수입 금지 정도로 의사를 표시하면서 당분간 북한과 관계를 경색된 상태로 끌고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프레시안 : 어쨌든 이번 일로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이미지는 더 나빠질 것 같은데요. 미국에서는 벌써부터 북한을 테러 지원국으로 재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정세현 : 이미지는 나빠질 겁니다. 그런데 정권이 개인을 죽이는 행위를 미국은 전혀 하지 않았을까요?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들 하지만, 미국이 이걸 가지고 북한을 압박하고 제재를 강화하고 테러지원국에 재지정해야 한다고 하는데 명분이 좀 약해 보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이나 남한을 상대로 군사적 도발을 하거나 아니면 아웅산 테러처럼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대규모로 살상했다면 몰라도, 형식적으로는 테러이긴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내부 권력 투쟁이기 때문에 이걸 일반적인 의미의 테러와 동일하다고 보기는 좀 어렵습니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죽였다고 국제적으로 제재를 받을 일입니까? 김정남 피살 역시 내부 문제입니다.
김정남 피살로 '북풍 몰이' 시작?
프레시안 : 김정남 피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다음날인 15일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정부는 이번 사건이 심히 중대하다는 인식 하에 북한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북한 상황을 면밀히 점검하고 추가 도발 등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철저한 대비책을 강구해 나가야 한다", "정치권에서도 정말 안보가 어려운 상황인 만큼 안보에 관한 정부의 정책을 신뢰하고 지원해주기 바란다" 등 안보에 위협이 되는 사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용의자 5명이 북한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는 말레이시아 경찰 당국의 발표가 나온 뒤에는 김정남 피살은 북한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면서 남한의 안보와 이 사안을 연결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이 한국 입장에서 그렇게 심각한 안보 위협 사안인가요?
정세현 : 황교안 권한대행이 저렇게 말하는 것은 북풍 몰이로 보입니다. 북한의 ICBM이나 군사적 대남 도발과는 전혀 무관한,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 김정남 피살 사건을 안보 위협이라고 말하면서 반(反)북한 정서를 일으켜서, 이런 북한과 대화하고 북한에 먼저 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치고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자면 지난 12일 북한이 발사한 중거리 탄도미사일 북극성 2호가 우리 안보에 훨씬 위협적입니다.
북극성 2호는 ICBM을 완성하기 위한 디딤돌이라고 봐야 합니다. 북극성 2호에 고체 연료를 투입했는데, 이렇게 되면 발사 전에 탐지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두 번째로 이동식 발사대를 썼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지난 1일 신년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대륙간 탄도 로켓 시험 발사 준비 사업이 마감 단계"에 도달했다고 밝혔고 이후에는 "임의의 시간에 임의의 장소"라는 표현을 쓰며 언제 어디서든 발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발사는 이러한 말이 현실로 나타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게다가 북극성 2호는 사정거리가 3000km까지 나갈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이러면 괌이 사정권 안에 드는 겁니다. 또 이런 정도의 기술을 확보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 기술 발전에도 가속도가 붙어서 ICBM으로 금방 넘어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북한이 이번 발사를 통해 미국을 직접 겨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미국의 대북 군사적 조치도 강화될 겁니다.
우리는 한미동맹을 유지하는 한 그 틀 속에서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북한과 미국이 군사적으로 각을 세우면 우리는 그 틈바구니에서 군사적으로 피해를 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3자인 상황인데, 그럼에도 피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안보 위협입니다.
물론 북한이 발사 각도를 높여서 남한을 겨냥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우리에게도 북극성 2호가 실제적인 안보 위협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물론 과학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북한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북한은 한국을 겨냥한 단거리 미사일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장거리 미사일을 굳이 고각으로 쏘는 것은 낭비입니다.
프레시안 : 지난 1994년 북한발 핵 위기 국면에서 미국은 영변을 타격하려고 했지만 결국은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북한의 핵폭탄 기술은 거의 개발이 끝났고 이제 운반 수단도 완성 단계에 돌입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미국이 선제타격을 하거나 아니면 미국과 북한이 전격적으로 합의하는, 모 아니면 도의 선택지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데요.
정세현 :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이 지난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1994년 당시 영변을 폭격하려고 했는데, 후과가 너무 커서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미국은 북한이 핵 물질을 생산하는 초기 단계였다고 판단하고 '발본색원' 하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미국이 선제타격을 했다면 북한이 반발해서 장사정포와 방사포를 쐈을 것이고, 그러면 남한도 불바다가 되기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는 북한에 핵폭탄이 없을 때입니다. 지금 미국 정보 당국은 북한이 최소한 핵무기 10개 또는 20개 정도를 보유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또 미사일 사거리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23년 전보다 훨씬 더 강력해진 북한을 상대로 대비를 한답시고 선제타격을 할 수 있을까요? 이건 자가당착 중에 자가당착적인 논리입니다.
게다가 핵무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때립니까? 핵무기가 지상에 노출돼있는 것도 아니고 지하 어딘가에 은닉해 있을 텐데, 선제 타격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프레시안 : 북한이 계속 위협수단을 발전시켜 가고 있는데, 지금 한국은 사드 문제에만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정세현 : 일단 누구를 위한 사드 배치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드 배치는 한국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미국을 위한 것입니다. 지금 한국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인지, 미국 국무부의 한국과인지 의심스럽습니다. 북한이 북극성 2호를 발사했다고 사드 배치를 빨리해야 한다고요? 그건 미국에서 나와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번 북극성 2호 발사는 북한이 자신들의 미사일 능력을 과시하면서 미국에게 대화에 나오라는, 일종의 북한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협상 전략인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은 "우리 이런 정도로 실력 있으니까 빨리 대화 테이블로 나와서 우리랑 평화협정 문제 협의하자"는 메시지를 미국에 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건 핵이나 미사일 문제도 평화협정과 연계된다면 대화 테이블로 나갈 수 있다는 것으로도 해석됩니다.
물론 북한은 이걸로 미국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ICBM 완성으로 직행할 겁니다. 북극성 2호는 일종의 맛보기였다는 것이죠.
그런데 북한의 의도를 협상보다는 북한의 '핵 보유국 지위 확보'라는 차원으로만 해석하고 핵과 미사일 기술의 증강이라고만 생각하면 답은 사드와 한미동맹 강화밖에 없습니다. 근데 이건 문제 해결 방법에서 멀어져 가는, 비껴가는 겁니다. 길이 코앞에 있는데 자꾸 산으로 올라가려는 셈입니다.
프레시안 :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 능력 향상이 안보 위협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회담에서 나름 절제된 발언을 했습니다.
정세현 : 북한이 신년사에서 ICBM을 쏠 것처럼 허세를 부리니까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답한 적이 있습니다. 이건 의역을 하면 "그렇게까지 만들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사전에 조치를 취하겠다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군사적 옵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선제타격은 현실성이 없기 때문에 대화를 통해 북한을 달래고, 적어도 북한이 미국에는 그러한 군사적 위협을 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뜻으로 읽힙니다.
북한이 북극성 2호를 발사했을 때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긴급 공동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아베 총리는 북한을 강력하게 규탄하는 메시지를 내보냈습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의 입장을 100% 지지한다"라고만 했습니다. 이건 어떻게 보면 일본에 "잘해봐, 필요하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정도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또 틸러슨 국무장관이 후보자 시절 상원 청문회에 제출한 자료에서도 군사적 위협부터 외교적 방안까지 모두 적시했지만, 선제타격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습니다. 트럼프의 말 속에 담겨 있는 저의를 틸러슨 장관이 저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해 10월 쿠알라룸푸르, 그리고 11월 제네바에서 북한과 미국은 1.5트랙 접촉을 가진 바 있습니다. 당시 최선희 북한 외무성 미국 국장은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을 당분간 두고 보겠다고 밝혔습니다. 여기에 단서를 하나 달았는데, 한미 연합 군사 훈련이 실제로 시작되면 자기들은 여기에 대해 거칠게 반응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이로 미뤄봤을 때 북극성 2호는 3월에 있을 한미 연합 군사 훈련에 대한 경고 내지 억제의 의미로 보입니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11월 접촉 이후 북미 양측이 유엔 대표부 채널을 통해 접촉을 이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해보면 선제타격을 굳이 넣지 않은 틸러슨의 말도 정보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미북 간 물밑 대화가 오가고 있다는 것을 보고 받았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대통령 입장에선 이런 것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아무리 트럼프가 난데없는 짓을 잘한다고 해도 말이죠.
프레시안 : 미국이 북한과 대화할 뜻이 있다면 한미 연합 군사 훈련의 규모나 내용 등에서 의도를 드러내 보이지 않을까요?
정세현 : 그건 미국의 협상 전략 상 좋지 않은 선택입니다. 만약 미국이 물밑 대화 과정에서 북한으로부터 일정한 약속을 받지도 않았는데, 자진해서 북한이 공개적으로 요구한 것에 대해 반응을 보이면 어떻게 될까요? 북한은 처음부터 미국이 자신들에게 숙이고 들어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북한은 처음부터 잘해주면 수염을 뽑는다는 것을 미국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야당은 안보에 약하다? 트라우마 깨고 정면 돌파해야
프레시안 : 지금 대선 주자 중에 우리가 처한 안보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지적을 하는 후보는 한 명도 없어 보입니다.
정세현 : 현 정부를 포함해 다음 정부까지 최대의 안보 이슈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입니다. 그런데 지난 9년 동안 북한의 핵 미사일 능력은 점점 커졌습니다.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이제는 압박과 제재만이 아닌 대화와 협상으로 북핵과 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일단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핵 동결 대 한미 연합훈련을 맞바꾸는 식으로 6자회담으로 가는 수순을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미 간 협의해야 할 문제지만 북핵 문제 해결의 다리를 놓을 수만 있다면 미국보다 북한을 먼저 갈 수도 있어야 합니다. 즉 핵과 미사일 문제가 너무나 위중한데 이와 관련된 사고를 치는 북한을 먼저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겁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죠.
북핵이 고도화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정치권도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북한과 대화를 해야 한다는 관점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의 안보 불안감을 줄여주기 위해 북한에 가서 핵 문제 해결을 위해 몸을 던질 줄도 알아야 합니다.
북한을 설득하든 회유하든 핵 실험을 못하게 하고 미사일 발사 못하고 해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애국입니까, 아니면 북한을 압박해서 더 사고를 치도록 만드는 것이 애국입니까? 대선 후보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자신있게 국민들에게 심판을 받아 볼 필요도 있습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야당에서는 북한이나 안보 문제가 나오면 야당이 불리하다는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정세현 : 그 트라우마를 깨야 합니다. 그거 못하면 집권할 자격 없습니다. 더군다나 북한이 엄청난 사고를 치고 있기 때문에 이걸 해결하려면 문제의 근본으로 치고 들어가야 합니다.
프레시안 : 지난 14일에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장·차관 출신 60여 명으로 구성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의 자문그룹 '10년의 힘 위원회'가 출범했습니다. 공동대표를 맡으셨는데요. 10년의 힘은 대선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 건가요?
정세현 : 새 정부에게 일종의 '도선사'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도선사는 배가 항구에 잘 정박할 수 있도록, 그리고 잘 떠날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10년의 힘이 그러한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조기대선이 확정된다면 기존 대통령과는 달리 정권 인수위원회도 없이, 당선된 그 다음날부터 바로 대통령 직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원래는 인수위에 후보의 싱크탱크 관계자와 정부에서 파견 나온 관료들이 함께 일을 하면서 정책을 어느 정도 조율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좀 더 적실성 있는 정책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대통령은 이 과정을 거치지 못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 국정 경험이 있던 사람들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교체된 정권이라는 배가 청와대까지 안전하게 들어가는 도선사 역할을 해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멋모르고 앞만 보고 가다 보면 암초에 부딪히고 물살에 휩쓸릴 수도 있습니다.
자문그룹에 모인 60명은 1998년부터 2007년까지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정무직으로 일을 해봤던 분들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도선사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역할을 수행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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