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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체스판의 시대는 끝났다"

[백년포럼 발제문] 한반도의 새로운 백년을 준비하며

다음은 오는 29일 9월 '백년포럼'에서 발표될 이병한 박사의 발제문 '다른 백년인가, 다시 백년인가'이다. 그는 현재 세계적 변화의 실상은 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 교체가 아니라 그동안 근대 세계를 지배해온 서구 중심 세계 질서의 와해라면서 그 실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나아가 지난 100여년간 외세의 침탈과 분단의 질곡 속에 고통 받아온 한반도의 새로운 백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세계적 변화의 실상을 질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목하 중국의 일대일로, 러시아의 대유라시아 구상, 동아프리카에서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인도의 인도양공동체, 모로코에서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이슬람공동체의 복원 등등 유럽/아시아, 전통/근대, 좌/우, 민주/독재 등 20세기의 온갖 이분법을 돌파하는 거대한 인드라망이 구현해간다. 고로 '문명의 충돌'은 하얗게 잊어도 좋다. 충돌이 있다면,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사이, 구대륙과 신대륙 사이, 당사자와 '외부세력' 간에 있을 뿐이다. 최후의 서세가, 마지막 외세가 독선과 아집에 찌든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거듭 간섭질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세와 시류를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서세동점의 말기이다. 서구적 근대의 말세이며, 미국적 세계화의 끝물이다. 그러나 탈근대도 아니요, 반세계화도 아니다. 탈근대는 신좌파의 말놀음이요, 반세계화는 구좌파의 게으름이다. 구미적 근대에서 지구적 근대로 이행하고 있다. 미국적 세계화에서 세계적 세계화로 진입하고 있다. 지구적 근대화와 세계적 세계화의 최전선에 유라시아가 자리한다. 구 제국들은 귀환하고, 옛 문명들은 복원된다. 동서고금이 사통팔달 회통한다. 19세기의 대분기(포머란츠, 석탄/석유 등 지하자원의 독점적 사용으로 말미암은 유럽과 아시아의 격차)와 20세기의 대전환(칼 폴라니, 구미적 체제의 일방적 세계화)에 이어 21세기의 대반전을 예감한다."

이번 백년포럼에서는 지난 해 12월 백년포럼에서 <'공존체제', 다른 백년의 세계상>을 발표한 김상준 경희대 교수가 지정토론자로 나선다. 당시 김 교수는 이제 19-20세기 서구 주도의 근대는 종말을 맞았으며 앞으로는 후기 근대, 즉 비서구 민주주의의 만개를 통한 여러 문명이 공존하는 세계로 나아갈 것으로 예측한 바 있다.

뜻 있는 시민들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

때: 9월 29일 오후 7시 30분-9시 30분
곳: 서울 합정동 국민TV 지하 카페(지하철 2,6호선 합정역 8번 출구로 나온 다음 뒤로 돌아 망원역 방향으로 350미터 직진, GS25 편의점 끼고 좌회전 50미터 웰빙센터 지하)
발제: 이병한 박사(유라시아 연구자)
지정토론: 김상준 경희대 교수

▲ 이병한 역사학자 ⓒ프레시안(최형락)

다른 백년인가, 다시 백년인가

1. 진보의 종언, 역사의 소생

<전환시대의 논리>의 부제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아시아, 중국, 한국'이었다. 일찍이 한-미-일의 조합을 허물고 아시아-중국-한국이라는 새 구도를 펼쳐 보였다. '죽의 장막' 너머를 재인식함으로써 그 반대편에 자리했던 한국의 성찰을 촉발한 것이다. '반공'(反共)의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모험, 국시(國是)를 갈아엎는 정명(正名)의 출현이었다. 한 세대의 세계인식을 극적으로 전환시킨 리영희 선생은 '시대의 은사'로 모자람이 없었다.

그 분의 말마따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그의 사상적 후예들이 왼쪽 날개를 맡기 시작했다. 1987년을 전후로 한국의 '민주화'도 이끌었다. 허나 그로부터 30년, '반동의 세월'에 봉착했다. 왼쪽 날개는 재차 부러졌다. 여야를 막론하고 우경화가 우심하다. 그러나 좌우의 균형을 다시 맞추는 것만으로는 '역사의 반복'에 그치고 말 것이다. 반동도 반복도 아닌, 반전(反轉)을 궁리하는 까닭이다. 후학의 고민이다.

좌우의 날개만이 중요했던 것이 아니다. 관건은 양날개짓으로 날아가는 방향이었다. 개발파도 개혁파도 서쪽으로 내달렸다. 한쪽은 산업화로, 다른 쪽은 민주화로 전력으로 질주했다. 정작 당도하여 목도한 것은 아뿔싸, '서구의 황혼'이다. 겨우 따라잡았나 했더니, 근대문명 자체가 저물고 있다. 진보(Progress)의 막다른 곳에서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는다. 좌도 우도 100년의 북극성을 상실하고 망연자실이다. '다른 백 년'의 논리를 갈고 닦는 것이 후학의 책무일 것이다. 좌우(Left-Right) 합작만큼이나 동서(東西) 합작, 고금(古今) 합작을 연마한다.

그 소산으로 제출한 것이 천하(天下), 덕치(德治), 동학(東學)이었다. <천하>는 중화세계의 원리를 바탕으로 '국가 간 체제'(Inter-state system)를 회고한다. 중화질서와 국제질서의 대차대조표를 그려본다. 동아시아의 전국(戰國)시대를 마감하고 태평(太平)천하를 회복하는 방편으로 옛 질서의 갱신을 강구한다. <덕치>는 동방형 정치의 이상에 비추어 서방의 '민주주의'(Democracy)를 회감해본 것이다. 일국적으로도 지구적으로도 혼미해진 '새 정치'의 출로를 찾는 데 일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동학>은 동방의 옛 학문과 서방의 새 학문을 아우른 회심을 도모한다. 오래된 유학(儒學)을 고집하지도 않고, 최신의 서학(西學)을 맹종하지도 않으며, 조선에서 솟아났던 개신(改新)유학=동학의 계승을 표방한다.

천하의 회고(回顧), 덕치의 회감(回監), 동학의 회심(回心), 이 삼합을 통하여 꾀하는 것은 역사의 회향(回向), 동방의 귀환(U-turn)이다. 반전(反轉)시대의 도래를 예비하고 준비하는 마중물이고 싶다. 그럼에도 나의 독창은 조금도, 어디에도 없다. 하늘 아래 새 것은 없다고 하셨다. 옛 말씀 가운데 살릴 것은 살을 붙이고, 덜어낼 것은 도려냈다. 새 말이 지나친 곳에는 옛 말을 보태었고, 옛 말이 낡았다 싶으면 산뜻한 말로 업데이트했다. 20세기를 지배한 선전선동은 음소거로 지워내고, 침묵을 강요당한 낮은 목소리에는 스피커를 달아 볼륨을 키웠다.

2. 하노이에서 : 동아시아에서 유라시아로

왜 유라시아였나? PPT 발표.

3. 유라시아의 바람 : 復國, 重興, 復元

지난 1년 6개월, 유라시아에서 무엇을 보았나? PPT 발표

4. 동아시아 신냉전? G2?

돌아보면 유럽과 동아시아는 탈냉전의 경로가 전혀 판이했다. 유럽에서는 동구의 몰락이 서구로의 흡수로 이어졌다. 소련(Soviet Union)을 대신한 유럽연합(European Union)이 출범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의 승리였고, 그래서 '역사의 종언'에도 딱 들어맞았다. 반면 동아시아는 여전히 중국과 베트남과 북조선, 라오스가 건재하다. 어느 한쪽 체제의 일방적 와해와 흡수는커녕 중국의 부상과 연동되어 '아시아의 세기'를 전망한다. 이념과 체제의 차이가 여전하면서도 지역적 협력은 나날이 심화되고 있다. 다르면서도 어울리는(和而不同) 평화공존의 원칙이 1990년대 이래 꾸준하게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1992년 한·중 수교와 한·베 수교 또한 유럽형 탈냉전과는 전혀 상이한 성격의 동방형 탈냉전이라 하겠다. 동구와 서구가 주도하며 경합했던 '가치동맹'의 시대가 저물고 동방형 질서가 전면화된 것이다. 즉 동아시아의 탈냉전은 '역사의 종언'과는 판이하다. 오히려 역사의 반전(反轉)이라고 할 수 있다.

장기적 시야에서 동아시아는 재중화의 궤도에 (재)진입했다. 재중화가 비단 중국 중심적 질서의 복귀라는 뜻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정치체가 그 다름에도 불구하고 무역과 외교를 통해 공존하는 복합적 질서가 다시 발현되고 있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복고(復古)라는 말도 적절치 않을 것이다. 각국이 저마다 100년의 민족해방투쟁을 때로는 협동하며 때때로 갈등하며 집합적으로 경험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갱신(更新, Renewal)이라는 말이 더욱 어울린다. 중화세계를 구성했던 정치 구성체 간의 상하(上下) 관계를 조정하고 재편하는 과정, 그리하여 기존의 복수의 관계망을 평화공존 5원칙의 원리 아래 수렴시키고 전환해가는 과정, 즉 중화세계의 근대화야말로 20세기사의 등뼈였던 것이다. 다만 우리가 냉전기를 통하여 그 이행 과정에 소외되어 있었고, 탈냉전 이후에야 뒤늦게 참입한 것이라고 하겠다.

돌아보면 중화질서와 국제질서는 결코 배타적이지 않았다. 조공질서와 조약체제 또한 물과 기름이 아니었다. 국제와 조약만을 유일 전범으로 삼는 쪽이 외골수였을 따름이다. 조약체제가 금시초문만도 아니다. 이미 천 년 전 송나라와 요나라 간에는 중국 사상 최초의 평등한 국가간 교제가 이루어졌다. 유럽의 국제관계에 방불한 관계양식이 1004년에 맺어졌던 것이다. 이를 예외로 친다 하더라도, 네르친스크조약(1689) 이후의 대청제국과 러시아제국의 관계는 명백하게 조약체계였다. 즉 중화세계의 원리는 유럽적 주권 국가와의 수평적 외교를 원리적으로 거절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유무역' 또한 제한하지 않았다. 호시(互市)무역이 활발했다, 유교문명을 공유하지 않는 나라와는 특정 지역의 '자유무역지대'를 통하여 호시무역을 허가했다. 조공과 조약의 이분법으로 호시무역을 무시하며 아편전쟁을 일으킨 것 또한 중화세계의 유연함에 견주어 국제질서가 편벽되었던 탓이 크다.

류큐 왕국의 양속(兩屬)은 중화세계가 작동하는 독특한 기제의 전형이었다. 중국에 조공하는 독자적인 국가이면서도, 사츠마 번에도 지배되는 일본의 한 지역임이 묵시적으로 승인되었다. 그만큼 상호 적절하고 적당한 이해의 겹침으로 유지되는 말랑말랑하고 흐물흐물한 질서였다. 의미의 일원성을 강제하지 않고 해석의 다원성을 허용하는 탄력적인 질서였다. 조약이나 국제법처럼 고정적 체제가 아니라, 액체화(liquid modernity)된 질서가 구성되고 유지되었음이 '동아시아 근대'의 특징이었다. (주1) 그리하여 관계국 간의 위계에 대한 의사통일조차 명확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인식론적 다원성에 입각한 '모두가 중화'인 지역질서가 만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질서 아래서 '지배'라는 것은 명료하게 합의된 국경선에 의해서 각 통치 기관에 귀속범위를 고정시키는 영역적 형태가 아니었다. 중원의 황제가 단지 국왕 일인을 책봉하면 그 이상의 현지 간섭을 행하지 않았던 것처럼 영토보다는 네트워크, 즉 속지적 체제보다는 속인적 질서에 가까웠다. 즉 중화세계는 중화 네트워크, 중화그물(中華網)이었다.

그리하여 중화세계와 만국공법 체제는 능히 병행이 가능했었다. 아니 중화세계질서는 만국공법체제를 내부로 포용할 수 있는 유연성과 탄력성을 갖고 있었다. 유럽적 국제질서가 중화세계를 구성하는 복합적인 '차서'(差序) (주2) 의 하나로 포함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중화 사회주의권'의 구성원들은 국가간 체제의 이념형적 평등을 구현하는 과업을 냉전기를 통하여 완수해 내었다. '중화세계의 근대화'가 지속되었던 것이다. (주3)

즉 동아시아의 20세기를 '중화체제에서 국가간체제로의 전환', '전통질서에서 근대질서로의 전환'이라고 갈음하는 것은 몹시도 미흡한 진술이다. 명과 실이 부합하지 않는다. 실사구시에 어긋난다. 올바른 이름이 아니다. 동북아의 중화세계와 동남아의 만달라세계를 구성하는 복합계의 일부로서 국가간 체제를 포용/포섭해간 과정이었다고 보는 편이 한층 적실하다.

그 과정에서 실로 다양한 발상들이 제출되었다. 두 사람만 꼽는다. 청말 사상가 장삥린은 몽골과 신장, 티베트, 만주는 독립시켜도 무방하다고 했다. 애당초 중원과는 문명이 다른 지역이었다. 반해 조선과 월남, 류큐를 편입시키고자 했다. 유교문명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즉 중화문명을 계승한 국가끼리 협동하여 '대중국'을 이룸으로써 국가간체제에 들어가고자 했다. 번부를 독립국으로, 조공국을 제국의 내부로 삼는 기획이었다. 반면 민국 초기, 청년 마오쩌둥은 각 성들이 모두 독립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동국, 산동국, 복건국 등 소중국으로 자립자강 하자고 했다. 각자도생, 자력갱생하여 차후에 '중화연방공화국'으로 합치자는 것이다. 전자는 '대국주의적 발상'이고, 후자는 '소국주의적 발상'일까. 쉬이 단정하기 어렵다. 각자 그 나름으로 국가간체제에 어떻게 적응해 갈 것인가에 대한 상이한 판단이 있었을 뿐이다. 즉 만국공법으로 전수된 유럽형 세계질서를 중화세계의 어느 단위에서 어떤 수준으로 관철시킬 것인가에 대한 집합적 과제가 있었다.

21세기 하고도 15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히 완수되지 않은 숙제이기도 하다. 나는 이 못다 이룬 과제가 목하 동아시아를 짓누르는 '신냉전'의 망령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여긴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핵심 모순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좌우 체제대결도, 미중 패권경쟁도 아니다. '미국식 조공체제' (주4)와 '중국식 국가간체제' (주5)가 길항하고 있다. 신형 상-하국 관계와 신형 대-소국 관계가 충돌하고 있다. '신형 대국관계'가 성립되지 못하고 있는 까닭도 어느 한쪽이 상국이기를 포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동과 서가 뒤집어진 것이다. 이제 보니 서방이 '봉건적'이고, 동방이 '근대적'이다. 20세기 동아시아사의 커다란 역설이다.

5. 반동과 반전

목하 중국의 일대일로, 러시아의 대유라시아 구상, 동아프리카에서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인도의 인도양공동체, 모로코에서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이슬람공동체의 복원 등등 유럽/아시아, 전통/근대, 좌/우, 민주/독재 등 20세기의 온갖 이분법을 돌파하는 거대한 인드라망이 구현해간다. 고로 '문명의 충돌'은 하얗게 잊어도 좋다. 충돌이 있다면,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사이, 구대륙과 신대륙 사이, 당사자와 '외부세력' 간에 있을 뿐이다. 최후의 서세가, 마지막 외세가 독선과 아집에 찌든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거듭 간섭질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세와 시류를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서세동점의 말기이다. 서구적 근대의 말세이며, 미국적 세계화의 끝물이다. 그러나 탈근대도 아니요, 반세계화도 아니다. 탈근대는 신좌파의 말놀음이요, 반세계화는 구좌파의 게으름이다. 구미적 근대에서 지구적 근대로 이행하고 있다. (주6) 미국적 세계화에서 세계적 세계화로 진입하고 있다. 지구적 근대화와 세계적 세계화의 최전선에 유라시아가 자리한다. 구 제국들은 귀환하고, 옛 문명들은 복원된다. 동서고금이 사통팔달 회통한다. 19세기의 대분기(포머란츠, 석탄/석유 등 지하자원의 독점적 사용으로 말미암은 유럽과 아시아의 격차)와 20세기의 대전환(칼 폴라니, 구미적 체제의 일방적 세계화)에 이어 21세기의 대반전을 예감한다.

다만 오해는 삼가자. '대역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서세동점을 동세서점으로 역전시키자는 것이 아니다. '동도(東道)의 서진'이어야 할 것이다. '동도' 또한 단순한 복고(復古)에 그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지난 이백년간 절치부심, 서도(西道)를 배우고 익혔다. 그 학습과정이야말로 동방에 축적되어 있는 최고의 자산이다. 그를 발판으로 삼은 동서합작, 고금합작의 '신(新) 동도'를 일구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치욕을 선사했으나, 우리는 그들에게 '덕(德)'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패도를 왕도로 되돌려주는 것이다. 난세를 치세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 새로운 문화/문명 콘텐츠를 일대일로를 따라서, 디지털 연결망을 활용해서 멀리 더 멀리 보급하고 확산시키는 것이 2050년을 살아갈 동방인들의 책무이고 역할일 것이다. 그 시점의 주역이 될 후세와 후진과 후학들을 키우고 양성하는 데 '다른 백년'의 여부와 향방이 달려 있을 것이다. 이 과업에 실패한다면, '지난 백년'의 반복, 반동의 세월을 저지하지 못할 것이다.

델리에서 이스탄불에 이르는 지난 반년 간, 책상 앞에 걸어두고 노트북의 메인화면으로 삼고 있는 지도 한 장이 있다. 18세기 유라시아 지도이다. 오스만제국과 사파비드(페르시아)제국, 무굴제국과 러시아제국, 대청제국이 건재하던 시기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 서세동점이 시작되기 전, 유라시아의 판도를 조감해볼 수 있다. 나로서는 어쩐지 2050년의 미래가 당시의 모습과 흡사할 것만 같다. 18세기의 옛 지도에서 21세기의 청사진을 구한다.

중국은 이미 동아시아를 넘어섰다. 동아시아로는 더 이상 중국을 담아낼 수 없다. 동남부 연안 중심의 개혁 개방이 기존의 세계 체제에 편입, 편승하는 적응 과정이었다면, 서부 대개발과 일대일로는 새로운 세계 체제의 개조와 재편을 꾀하는 극복 과업이다. 태평양에서 유라시아로 축이 옮아간다.

20세기형 지정학과 국가 간 체제(Inter-state system)도 낡고 진부해진다. 국가주의는 문명권별 지역 질서를 해체하고 나라별로 쪼개어 분리 통치하는 방편이었다. 지정학은 한 몸으로 운동하던 유라시아를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북아시아 등으로 분화시켜 지배하는 歐美(구미)의 전략이었다. 결국 '거대한 체스판'의 卒(졸)이 되었다.

하여 새천년 초원길과 바닷길의 복원은 100년간 끊어지고 막혔던 동서의 혈로를 다시 뚫어 물류와 문류(文流)를 재가동시키는 유라시아의 再活(재활) 운동이다. 국경(Border)이 통로(Gateway)가 된다. 지리는 재발견되고, 지도는 다시 그려진다. 21세기의 大勢(대세)이고, 메가트렌드(Mega-Trend)이다.

따라서 작금의 모순과 균열을 미중간의 패권 경쟁으로 오독해서는 심히 곤란하다. 이러한 인식을 줄기차게 발신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밝히고 따지는 편이 이로울 것이다. 실상은 대세와 반동(反動)의 갈등이다. 유라시아의 (재)통합을 지향하는 운동과 20세기형 분열과 분단을 지속하려는 세력 간의 길항이다. 유라시아형 세계 체제를 건설하려는 세력과 유럽-아프리카, 유럽-아메리카형 세계 체제의 지속을 도모하는 세력 간의 '문명의 충돌'이라고도 하겠다. 목하 다른 백년과 다시 백년(식민지 근대화, 분단국 산업화, 속국 민주화의 20세기)이 길항하고 있는 한국/한반도의 모순과도 직결되어 있다.

(주1) 요나하 준은 이러한 다원적 의미의 겹침으로 작동했던 17세기 이후 동아시아 질서를 '근세'라고 표현하고, 탈냉전 이후의 세계화를 세계의 '재근세화' 혹은 '중국화'라고 표현한다. 그의 논의를 부분적으로 차용한 미야지마 히로시는 '근세'라는 꼬리표까지 덜어내고 '유교적 근대'라는 용어를 제안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몽골, 티베트, 신장을 아우른 대청제국의 면모를 고려하자면 '유교적'이라는 수사가 얼마나 적합한 것인지는 일정하게 유보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동아시아적 근대'라는 표현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與那覇潤, <中国化する日本日中「文明の衝突」一千年史>, 文藝春秋, 2011 및 미야지마 히로시, <유교적 근대로서의 동아시아 근세>, <나의 한국사 공부>, 너머북스, 2013

(주2) 일찍이 費孝通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 <鄉土中國>에서 다른 문화를 포함하는 중화 질서를 '차서(差序)'라고 표상한 바 있다. 중심, 주변, 외연(이국)의 동심원상에 계층적인 대외인식과 대외행동이 전통중국에 관철되었다는 것이다.

(주3) 1997년 홍콩 반환, 1999년 마카오 반환에 이어 마지막 과제로서 중화민국과의 재회가 남아 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의 재통합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의 (재)통일과도 연동되는 과제일 것이다. 이 또한 기왕의 '국제질서'로의 편입보다는 '중화세계의 근대화'의 시각에서 접근하는 편이 한층 생산적일 것이라고 여긴다. '하나이면서 둘인', '둘이면서 하나인', 단일국가도 아니요, 분단국가도 아닌 不一不二의 공존술을 연마할 필요가 크다.

(주4) 영미권 일본학계에서 정립해가고 있는 '샌프란시스코체제'는 탈냉전 이후 심화되고 있는 역사분쟁과 영토분쟁, 군사갈등 등 동아시아의 대립 구조에 주목한다. 그리고 미일동맹과 신중국 간의 대결 구도를 축으로 삼아 전후 동아시아의 모순을 전전 유산과의 관련 속에서 규명한다. 그럼에도 유독 눈을 찌르는 대목이 있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로 성립된 미국의 아시아 동맹국들을 '속국'(属国, Client State)이라고 (재)규정하는 것이다. 호명부터 썩 과감한 독법이다. 일본의 주권 또한 '종속적 주권'으로 표현한다.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제국의 보호와 속국의 충성을 교환하는 '신봉건 관계'로 파악하는 것이다. 비단 일본에 한정되지도 않을 것이다. 냉전기 자유진영에 속했던 아시아 국가들로 일반화할 수 있다.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결손국가들이 미국의 우산 아래 도열해 있는 것이다. 이 '신봉건 관계'가 지속됨으로써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여지껏 해소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중국의 국제정치학계에서는 '미국식 조공체제'(American Tributary System)라는 명명까지 등장했다. 미국이야말로 냉전기를 통해 역대 가장 성공적인 조공체제를 제도화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공식적인 동맹국과 비공식적인 파트너로 이루어진 광범위한 네트워크의 중심이다. 그래서 '조공국'들에게 자국의 시장에 대한 접근 권한을 부여하고 군사적인 보호를 제공한다. 조공국들은 영토주권과 사법주권, 정치주권의 일부를 양도함으로써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 우산의 혜택을 입는다. 즉 미국은 상국(Hegemony)임을 승인받고, '민주적 조공국' (Democratic Tributary)들은 미국의 가치와 규범, 제도를 수용하는 위계적 교환관계가 성립한다. 이로써 작동하는 평화로운 질서가 미국식 조공체제, 이른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이다.

(주5) 중화민국이 한, 송, 명을 잇는 중화제국이었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은 당, 원, 청을 잇는 유라시아제국에 가까웠다. '제국의 근대화'로 중국의 내외 정책도 변경되었다. 이번원에서 관리했던 지역은 자치구가 되었다. 조공국과 호시(互市)국(유럽과 일본 등 중화세계 밖에서 무역만 하던 나라들)은 독립국이 되었다. 소수민족에게는 자치권을 부여했고, 주변민족에게는 자결권을 인정했다. 1955년 반둥회의에서 공식화된 '평화공존 5원칙'이 상징적이다. 암묵적이었던 내정불간섭의 원칙을 근대적인 조약의 형태로 명문화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국가간 체제를 중화세계의 내부로 수용하여 신형 대-소국 관계를 확립했다. 왕년의 상국(上國)과 하국(下國)은 더 이상 없다. 소수민족과 주변민족과 대동단결하여 항일전쟁을 수행함으로써 '제국의 근대화'를 완수한 것이다. 그리고 그 동력을 발판으로 미국과 소련에 동시에 저항하는 제3세계의 탈냉전 운동을 선도했다.

반면 항일에서 항미/항소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이 집합적 역사 운동으로부터 이탈했거나 소외되었던 국가들은 하나 같이 '속국'으로 전락했다. 몽골은 독립하자마자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다. 일본과 류큐(오키나와), 대만,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이 되었다. 위성국(Satellite State)과 동맹국(Client State)은 하나같이 '속국의 근대화'를 경험했다. 북조선이나 베트남과는 달리 주권국가에 이르지 못했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심연을 가르는 분열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제국의 근대화'와 '속국의 근대화'로 말미암은 상이한 국제질서가 첨예하게 길항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각기 '냉전'을 명분으로 '근대화된 속국'들을 만들어갔다. 소련의 해체가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 독립국가들의 대거 등장으로 귀결되었음은 상징적이다. 그러나 그 '탈냉전'이 한쪽의 일방적인 붕괴로 도래함으로써 다른 한쪽은 여전히 속국을 해소하지 못한 병폐를 남기고 말았던 것이다.

(주6) 김기협의 假근대-眞근대, 김상준의 중층근대론과도 통하는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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