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거듭 강조한대로 임기 개시 후 1주일 내 의장 선출 등 첫 임시회를 열도록 국회법은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현 상황이 국회법을 위배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여당인 한나라당은 이를 근거로 야당을 압박하고 있다. 민주당은 정국 상황에 따라 냉온탕을 오가고 있다.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을 밝혀도 새파란 전의경들이 얼굴에 대고 소화기를 쏘아대는 판이니 의원들은 자괴감을 토로하면서 "차라리 국회에 들어가서 경찰청장이라도 불러내서 따지는 게 현실적이지 않냐"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한나라당이 가축전염병예방법 자유투표 등의 '당근'을 내놓곤 있지만 현 상황에서의 등원은 '백기항복'에 다름이 아니다. 하지만 출구가 보이지도 않고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의 권위가 공권력 앞에서 무기력한 상황에서 무작정 시간만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야말로 민주당 입장에선 진퇴양난인 것.
하지만 야당 입장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등원 여부 자체가 아닐 수도 있다. 30년 전, 지금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던 야당이 어떻게 대여, 대정부 투쟁을 진행했는지 한 번 짚어보는 것도 의미없진 않다.
유신정권의 종말 가져온 신민당사 난입 사건
유신정권도 말기로 접어든 1979년 8월 9일 가발 수출회사인 YH무역의 여성 노동자 172명이 마포 신민당사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지금으로 치면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할 수 있는 20대 여성 노동자들이 당사에 진입하자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우리 민주당사를 찾아 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며 "우리가 여러분을 지킨다. 걱정말라"고 안심시켰다.
9일부터 10일까지 김영삼 총재와 당시 신민당 의원들은 당사 주변을 '규찰'하며 정보과, 보안과 형사들을 발견하면 멱살을 잡고 발길질을 하고 따귀를 올려붙였다.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야당은 물론 여당의원까지 잡아들여 몽둥이 찜질을 서슴치 않던 서슬퍼런 시절이지만 그래도 '야당의원 값'을 지금보단 더 많이 쳐줬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10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이 참석한 대책회의에서 강제진압 결정이 났고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이를 재가했다.
11일 새벽 경찰이 신민당에 최후통첩을 내렸다. 이순구 서울시경국장이 전화를 걸어 "총재를 바꾸라"고 당직자에게 요구했지만 김영삼은 "건방지다"며 전화를 받지 않고 오히려 작전지휘에 나선 마포경찰서장을 만나자 "너희들이 저 여공을 다 죽이려 하냐"고 뺨을 올려붙였다.
곧 이어 2000여 명의 경찰이 밀고 들어오고 신민당 의원, 당직자 할 것 없이 일대 활극을 벌였다. 하지만 역부족이었고 23분 만에 진압작전은 완료돼 YH여성 노동자들은 모두 연행됐다. 이 과정에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졌고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경찰에 끌려나와 상도동 집으로 '모셔졌다'.
1978년부터 김대중을 가택연금했던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을 기화로 김영삼 마저 '처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법원은 그해 9월 8일 김영삼에 대한 신민당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을 내리고, 공화당과 유신정우회가 지배하고 있던 국회는 10월 4일에는 '국회의원으로서 본분을 일탈하여 반국가적인 언동을 함으로써 국회의 위신과 국회의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며 김영삼의 국회의원직을 제명했다.
야당 의원들에게 "불법시위에 앞장설 바에야 국회의원 직을 내놓으라"고 압박하는 한나라당 지도부와 정확히 닮은 꼴이다.
김영삼이 의원직에서 제명된 지 9일 후인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은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이어 10월 15일 부산대학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10월 16일 학생들과 시민들이 합세해 대규모 독재타도, 반정부시위가 시작됐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쳤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대됐다.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정국 전개는 잘 알려진 바대로다. 부마항쟁에 대한 강경진압 여부를 두고 김재규 중정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알력은 극심해졌고 이는 10.26과 유신정권의 종지부로 이어졌다.
그래도 이명박정부를 유신정권에 갖다대라먄…
제아무리 이명박 정부에 대한 민심이반이 심하다고 할지라도 '민주적 투표'를 통해 선출된 2008년의 이 대통령과 '체육관 유신 투표'로 18년째 장기집권 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확고한 지역기반과 카리스마를 갖춘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와 현 민주당 지도부를 동렬에 두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정통야당 50년의 역사'를 자랑으로 삼고 있는 민주당은 '등원이냐 아니냐'만 되뇌기 전에 30년 전 사례로부터 '야당의 결기'가 무엇인지 먼저 배워야 할 것 같다.
물론 '김영삼 전 대통령'은 30일 정정길 대통령실장과 맹형규 정무수석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지금 무법천지, 무정부 사태로 가고 있다. 반드시 (국민들의) 버릇을 고쳐야 한다"면서 "내 임기 중에는 규율이 섰는데 (김대중, 노무현) 양 정권이 들어서자 무력화됐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메멘토' 증상을 보이긴 했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김영삼 총재'시절이다.
어떻게 보면 등원 자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 마당에 국회에 들어가면 어떻고 또 안들어간 들 어떠랴. 뻔한 이야기지만 '죽을 각오를 하면 살 길이 열리는 법'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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