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제적인 거물급 인사나 조직,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 등이 연루된 부패 스캔들이 동시다발로 터지고 있다. 몇몇 나라에서는 정권이 무너질 정도의 초대형 스캔들로 비화되고 있다. 일련의 부패스캔들 사건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동시다발'이다.
거물급이 연루된 부패 스캔들은 정확한 정보 없이는 터지기도 쉽지 않다. 이런 스캔들이 한꺼번에 터지고 있다는 것은 정보의 출처가 비슷하다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정답은 바로 '스위스 비밀계좌'다.
스위스 비밀계좌라면 독재자의 검은 돈이건, 피 묻은 돈이건 '묻지마 보호'를 철저히 해주는 은닉처로 악명이 높았다. 그런데 지금 이 '판도라의 상자'가 활짝 열리고 있다. 현재 터지고 있는 부패 스캔들은 이 상자의 뚜껑이 열리자마자 먼저 새어나오는 비밀계좌 정보들이 단서가 된 것이다.
스위스 비밀계좌 드러나 브라질 집권 연정 붕괴, 탄핵으로 퇴진 유력
현재 스위스 비밀계좌가 포착돼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대형 부패 스캔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선 브라질 정치 사상 최고의 대통령으로 꼽혀온 룰라 전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 후계자인 지우마 호세프 현 대통령과 함께 정치적 몰락으로 향하게 만든 국영 에너지업체 '페트로브라스' 스캔들이 여기에 속한다.
31일 현재 브라질의 지우마 호세프 정권은 연정을 구성한 브라질 최대 정당이 탈퇴를 선언하고, 호세프 대통령은 부패 혐의로 탄핵 절차가 시작돼 퇴진이 확실시 되는 상황에 몰렸다. <뉴욕타임스>는 "호세프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처럼 재선 후 중도 퇴진하는 대통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또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는 '1MDB(말레이시아 개발 유한공사)'라는 국영투자기업 스캔들이 들통나면서 대대적인 퇴진시위가 벌어질 정도로 궁지에 몰려있다. 나집 총리는 이 부패 스캔들 때문에 지난 30일부터 이틀 일정으로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4차 핵안보정상회의의 주최국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개별 회담에서 제외되는 2명의 정상 중 한 명이 되는 수모도 겪고 있다.
최근 국제축구연맹(FIFA)이 사상 처음으로 조직적 부패를 인정한 것도 스위스 비밀계좌가 드러나면서 더 이상 발뺌을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비밀계좌 폐쇄해도 과거 기록 숨길 수 없어
스위스 비밀계좌 정보가 어떻게 '묻지마 보안 장치'가 풀어지게 된 것일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수 확보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은행이 돈세탁을 지원하는 관행에 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돈세탁에 공조하며 '조세 회피처' 역할을 하는 다국적 금융업체들을 상대로 거액의 벌금을 부과하는 등 철퇴를 내리고, 국가간 범죄 혐의가 있는 금융계좌 정보를 제공하는 협약을 맺는 협상이 미국 주도 하에 진행돼 본격적인 시행에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미국의 검찰이 스위스 정부에 부패 혐의가 있는 계좌에 대한 정보 제공을 요청하면 스위스 정부가 제공을 할 수밖에 없게 됐다. 스위스 비밀계좌에 자금을 은닉하고 안심하고 있던 국제적인 거물들이 있다면, 그들은 이제 발 뻗고 지낼 수 없다.
지난 2009년 미국 정부는 스위스 대표은행 UBS에 미국인의 돈세탁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1조 원에 가까운 벌금을 부과하는 등 '일벌백계'의 조치를 시작으로, 스위스의 '비밀계좌' 관행을 순식간에 허물어뜨렸다. 유럽연합(EU)도 스위스 은행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조치들을 취했다. 스위스 정부도 마침내 스위스 비밀계좌를 보호해주던 연방법 규정을 삭제하는 조치를 취해 법적 보호망도 제거됐다.
지난 2013년 4월 갑자기 사임한 당시 프랑스의 예산장관 제롬 카위자크 사건은 스위스 비밀계좌를 믿었던 고위인사들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되고 있다. 그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집권한 후 탈세와의 전쟁을 주도한 각료다. 하지만 그 자신이 스위스 비밀계좌를 보유하고 있다는 혐의가 불거지자 격렬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스위스 정부가 프랑스 검찰에 그의 계좌 정보를 제공하는 순간 그의 정치 생명은 끝났다.
카위자크 사건은 스위스 비밀계좌에 돈을 숨겨둔 자들은 바로 이 과거의 행동으로 앞으로 언제든지 발목이 잡힐 수 있다는 경고가 되고 있다. 심지어 카위자크는 스위스 비밀계좌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싱가포르로 자금을 옮겼지만, 소용이 없었다. 계좌를 폐쇄해도 계좌 기록은 계속 남아 있기 때문이다.
카위자크 사건은 프랑스의 각료 한 명 정도가 날아가는 스캔들이었다면, 현재 브라질 정국을 강타하고 있는 스캔들은 초대형이다. 브라질에서 힘 쓰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 심지어 전현직 대통령까지 포함해, 그들의 돈줄이 되어왔던 페트로브라스와 연계된 자금 흐름이 통째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호세프 대통령의 선거총책을 맡았던 후앙 산타나는 스위스 비밀계좌에 불법자금을 은닉한 혐의로 체포됐고, 브라질 하원의장 에두아르두 쿠냐 역시 스위스 비밀계좌에 페트로브라스와 연계된 자금 은닉 혐의로 사법처리 위기에 몰려있다.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는 그동안 '1MDB'에서 돈을 빼돌려 스위스 비밀계좌에 은닉해왔다는 혐의를 극구 부인해왔고, 어용 검찰을 동원해 무혐의 처분까지 받아냈다. 하지만 지난 1월 스위스 정부가 1MDB와 관련된 계좌를 조사해, "40억 달러가 말레이시아의 나랏돈을 횡령한 것"이라고 발표해 버렸다.
2018년부터 국세청에 한국 국적자 계좌정보 자동통보
피파도 스위스 검찰의 비밀계좌 조사로 2018년 러시아,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주최지 선정 과정에서 뇌물을 받아챙겼다는 혐의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미 피파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과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개최지 선정과 관련된 뇌물수수를 인정했다. '뇌물 복마전' 피파가 월드컵 개최국 선정 관련 뇌물수수를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스페인의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가 지난해 12월 총선에서 총리직 유지가 어려울 정도로 집권 국민당이 과반수에 훨씬 못미치는 의석수를 얻는 데 그친 배경에는, 지난 2013년 총리의 '금고지기'로 불렸던 재무장관 루이스 바르세나스의 스위스 비밀계좌에 700억 원에 달하는 자금을 은닉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사건도 영향을 미쳤다.
"권력 엘리트와 부유층들은 모두 스위스에 자금을 숨겨 두고 있다"는 그리스의 경우는 더 충격적이다. HSBC 제네바 지점에 비밀계좌를 둔 무려 2000명이 넘는 그리스 유력인사들의 명단이 담긴 이른바 '라가드 리스트'가 지난 2010년 그리스 당국에 제공됐다. 이 리스트는 바로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프랑스 재무장관으로 있을 때 제공한 것이다.
이 명단은 HSBC 은행의 내부자 제보로 입수됐다. 하지만 앞으로는 공적 제보가 잇따를 전망이다. 2018년부터는 스위스 정부가 아예 '금융정보 자동 교환'에 나설 예정이다. 한국 국적을 가진 자의 스위스 은행계좌 정보가 한국 국세청으로도 자동 통보되는 것이다. 스위스 비밀계좌에 단골손님들이 많다는 한국에서도 떨고 있는 유력인사들이나 조직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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