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성(1906~1963년). 경상북도 상주군(현 상주시) 출신의 독립운동가입니다. 1924년 일본인 교장 배척 동맹 휴업 사건으로 퇴학당했으며, 1929년 광주 학생 운동을 서울로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2년 복역했죠. 해방 후 조선공산당 활동을 하다 1946년 월북하고 나서는 북한에서 무역성 부상 겸 무역성 서리(차관급) 지위까지 올랐습니다.
북한에서 그대로 있었으면 독립운동가로 대접받으며 여생을 편하게 마쳤겠죠. 그런데 그는 1961년 8월, 당시로써는 고령(만 55세)의 병든 몸을 이끌고 임진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옵니다. 북한 정부의 '밀사' 자격으로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남쪽의 젊은 군인 박정희를 만나러 온 것이죠.
북쪽이 밀사로 황태성을 선택하고, 또 그가 이 중요한 임무를 받아들인 개인 사정도 있었습니다. 남쪽에서 그의 친한 친구이자 사회주의 동지였던 박상희가 바로 박정희의 친형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이런 인연으로 한 때 박정희의 '멘토' 역할을 했죠. 해방 후 초급 장교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할 때 신분 보증을 선 것도 바로 그였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황태성이 중매를 서 결혼한 박상희(박정희의 친형)와 조귀분의 딸 박영옥의 남편이 바로 군사 쿠데타의 주역이자 중앙정보부 창설자 김종필이었습니다. 황태성은 박정희, 김종필 등 군사 쿠데타 세력의 핵심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으로 엮여 있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 황태성을 죽이고 맙니다. 그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보낸 밀사를 왜 총살했을까요? 그 과정에는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었을까요? 최근 바로 이 질문에 답하는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김학민·이창훈 지음, 푸른역사 펴냄)가 나와서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김종배 <시사통> 편집인과 강양구 기자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독서통'에서는 바로 이 현대사의 미스터리를 파헤칩니다. 오늘 이야기를 나눌 주인공은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를 펴낸 김학민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입니다. 다음은 11월 17일 마포구 서교동 시사통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인터뷰 전문입니다.
황태성 사건 추적한 '음식 칼럼니스트'
독서통 : 매주 화요일에 찾아오는 독서통 시간입니다. 저희가 2주 전에 성공회대학교 김동춘 교수를 모시고 대한민국 현대사 전체를 훑었죠. 그때 국정 교과서가 되면 민주화 이후 역사학계에서 새롭게 밝혀진 현대사의 중요한 사실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못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관련 기사 : '헬조선', 기독교-월남자 동맹의 합작품)
우리가 이번 시간에 다룰 황태성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5.16 쿠데타 직후 북한이 보낸 밀사 황태성을 군부가 처형해버린 사건이죠. 뜻밖에 모르는 분이 많습니다.
특히 황태성은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박정희, 김종필과 사적으로도 긴밀한 관계였습니다. 마침 최근에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제목만으로도 손이 갑니다. 오늘 공저자 중 한 분인 김학민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김학민 : 네, 안녕하세요.
독서통 : 김학민 선생님은 민주화 운동의 산증인이죠.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종신 집권을 꾀하며 유신 체제를 만들고 나서, 1974년 4월 일군의 학생들이 불온 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 정권 수립을 추진한다며 시국 사건을 조작합니다. 이른바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이죠. 김학민 선생님도 대학생 때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죠.
그 뒤로도 민주화 운동의 굵직한 국면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엄혹했던 시절에 한길사 편집장, 학민사 대표 등을 지내며 중요한 인문·사회과학 서적 수백 권을 기획, 편집, 출간했죠. 현재는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여전히 왕성히 활동 중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웃음)
어떤 분은 김학민 선생님을 음식 칼럼니스트로 알고 계실 겁니다. 요즘처럼 맛집, 음식, 요리가 유행하기 전부터 먹을거리에 대한 좋은 칼럼을 여러 매체에 쓰셨죠. 그런데 앞에서 열거한 이력과 음식 칼럼니스트, 궁합이 잘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주로 어떤 음식 칼럼을 쓰십니까?
김학민 : 둘 사이의 궁합이 아주 잘 맞습니다. (웃음)
음식은 사실 인문학의 한 분야입니다. 음식 칼럼니스트라면 대개 맛집을 소개하거나 특별한 조리법을 제시하는 사람만 떠올리죠? 그런데 사실 음식의 역사, 사회적 함의, 문화인류학적 기원을 파고들어 음식과 인간의 관계를 살펴보는 사람이 바로 음식 칼럼니스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문·사회과학에 천착해서 책을 내온 제 경력과 음식 칼럼니스트는 상당히 어울리죠.
독서통 : 듣고 보니 그렇군요. 언제부터 음식 칼럼을 쓰기 시작하셨나요?
김학민 : <한겨레21>에 음식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한 게 2000년 초거든요. 당시는 (음식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죠. 요즘에는 예종석, 황교익 선생님 같은 분들도 있고, 또 여러분이 음식에 대한 글을 쓰시죠. 책도 많이 나왔고요.
독서통 : 그럼, 김학민 선생님이 거의 우리나라 음식 칼럼니스트의 효시라고 할 수 있겠군요?
김학민 : 그런 말씀은 너무 과하고요. (웃음) 아무튼 음식의 기원이나 역사를 연구할 때 정확히 문헌상으로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어떻게 조리해서 먹었다는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여러 사람 얘기를 듣고 그 지역 환경을 고려해서 역사적 상상력, 문학적 상상력으로 스토리텔링을 입혀야 비로소 음식의 역사가 나오죠.
독서통 : (대개의 경우는) 주로 향토사학자들이 (음식의 기원을) 연구하더군요.
김학민 : 네, 중요한 작업을 많이 하셨죠. 그런데 그분들이 너무 풍문으로 전해지는 속설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문화인류학적 지식에 기반을 둔 문헌 연구, 전통 연구도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서통 : 요즘 TV의 셰프 열풍, 요리 열풍은 어떻게 받아들이세요?
김학민 : 저는 일종의 (세속적 의미의) 욕망의 표출로 봅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쁘게 보이진 않습니다. 지구적 차원에서 보면 상당한 인류가 굶어 죽는데 맛있는 것만 찾는 세태, 또 인기를 얻으려고 더한 자극만 자꾸 추구하는 현재와 같은 유행은 조금 불만스럽죠. 사회 정치적 잣대를 갖고 당대의 유행을 옳다 그르다 얘기할 순 없겠지만, 바람직해 보이진 않아요.
쿠데타 세력의 '위장 인사'가 밀사로 이어지다
독서통 : 이제 본 주제로 가야죠.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집필 작업은 언제부터 시작했습니까?
김학민 : 2012년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뭐랄까, '멘붕'에 빠졌습니다. 오늘의 국정 교과서 파동과 같은 일이 올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죠. 자기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잘한 점은 확대 재생산해 알리고, 아버지의 치부는 없애는 식으로 역사를 자기 잣대로 주무르려 할 것이라는 우려요.
그래서 박정희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이 사람과 관련된 사건, 또 사람에 대한 얘기를 써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감정적으로 다루지 말고요. 그때 곧바로 황태성 사건을 떠올렸죠. 이 사건은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일어났는데, 그때부터 평생 제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 사건을 책으로 내보기로 했습니다.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제가 나이에 맞지 않게 블로그를 활발히 운영해요. 그런데 제 블로그에 황태성 사건 관련 글을 굉장히 오랫동안 썼습니다.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면 계속 업데이트를 하면서요. 그러니까 집필 자체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 후부터 시작했지만, 그전부터 집필 준비는 해온 셈이죠.
독서통 : 황태성 사건이 '박정희의 민얼굴' 혹은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한 거군요.
김학민 :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앞서 두 분께서 국정 교과서에 이 사건이 실릴 수 없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저는 이 사건이 실린다 하더라도 간첩 사건으로 왜곡되어 실리리라 생각합니다. 황태성의 실상은 간첩이 아니라 밀사입니다. 국정 교과서는 이런 식의 해석 차이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 아닙니까?
독서통 : 밀사라면 사신인데, 사신을 죽이는 경우는 전쟁 중에도 없죠. 황태성을 밀사로 보느냐 간첩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박정희 군부가 행한) 사형의 정당성이 판가름나겠군요. 선생님께서는 이 사건을 '박정희 정권 최초의 간첩 조작 사건'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셨어요.
김학민 : 이 사건의 본질 자체를 자기식으로 뒤집었다는 측면에서 조작으로 볼 수 있죠. 여기에는 쿠데타 세력 내 여러 파벌의 다양한 시각, 또 박정희로 대표되는 집권 권력의 실수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황태성 사건을 통해서 5.16쿠데타 세력의 이모저모를 확인할 수 있는 거죠.
독서통 : 시간 관계상 이 책에서 굉장히 공들여서 정리한 황태성의 청년기, 항일 운동, 좌파 운동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겠습니다. 한 가지만 언급하자면, 황태성은 존경받아 마땅한 치열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당장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서울로 전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죠.
안타깝지만, 여기서는 황태성 사건만 집중적으로 다루겠습니다. 황태성 밀사 파견 전에 (남북 양측의) 밀담이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책의 서술대로라면 (황태성 밀사 파견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황해도 해주 앞 용매도라는 섬에서 5.16쿠데타 세력이 북에 먼저 제안해서 비밀 회담이 전개됐다고 합니다. 이게 황태성 밀사 파견과 연계됩니다. 이 사실(용매도 회담)은 잘 안 알려진 것 같습니다.
김학민 : 남쪽에서 이 사실(용매도 회담)이 알려지고 나서 쿠데타 세력, 특히 김종필은 '이 회담은 남북의 정상적인 협상 채널이 아니고, 대북 공작 차원에서 HID(육군본부 정보국 공작과. 휘하의 특수부대원을 북파공작원으로 통칭한다. 영화 <실미도>를 통해 그 실상이 대중적으로 알려졌다)가 진행했다'는 태도를 고수했습니다.
이 회담 내용은 당시 HID 사령관인 장영자의 남편 이철희 등 군 고위 간부 대여섯 명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중앙일보>에 실린 김종필의 회고록 연재를 보면, 당시 남북의 일개 부대가 비밀 접촉을 할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최고 수뇌부가 다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거죠.
공작 차원의 첩보부대 단독 작전이라손 치더라도, 남쪽 최고 지도부의 의사 혹은 최소한 북쪽에서 5.16 쿠데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탐지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거죠. 그런데 바로 이런 정황 속에서 남쪽보다 북쪽이 이 회담(용매도 회담)을 더 중요시하고, 큰 의미를 부여한 거예요.
독서통 : 5.16 쿠데타 세력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를 놓고서 북쪽이 여러 가지 검토를 했다는 거죠? 남쪽의 젊은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데 이들이 어떤 세력인지.
김학민 : 그렇죠. 결과적으로 북이 순진했던 겁니다. (5.16 쿠데타 세력을 보니 남로당 출신도 있어서 도통 정체를 잘 모르겠으니) '누구를 하나 내려보내서 직접 만나봐야겠다. 남쪽이 용매도에서 회담을 하자고 올라왔으니, 우리도 답방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황태성을 내려보낸 겁니다. 답방의 성격이 큰 거죠. 그러니까 (황태성은) 사절입니다.
독서통 : 쿠데타 세력은 북이 내려올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북은 이들이 어떤 생각인지 탐지할 필요가 있어서 접촉한 거군요. 그런데 정작 용매도 회담은 성과가 없었죠?
김학민 : 회담의 성과가 없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남에서 먼저 제안해서 회담했는데, 남쪽 회담 대표란 사람들이 무성의했습니다. 준비 없이, 의제 없이 북으로 갔죠. 결과적으로 북쪽의 생각에 비해 남쪽은 '공작'까지는 아니라도 북의 의중을 떠보려는 작전에 불과했다는 건 사실이었으리라 봅니다. 준비 단계부터 상황이 그랬으니, 북으로서는 답답했겠죠.
독서통 : 그래서 북쪽에서는 조금 더 책임감 있는 사람의 답변을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에 (용매도 회담과는 별도로) 밀사를 보낸 거고, 그가 바로 황태성이었군요. 그는 박정희의 셋째 형인 박상희의 막역한 친구였고, 박정희의 멘토와 같은 사람이었으니 누구보다 적임자라는 판단에 내려보낸 거라는 게 그나마 지금까지 파편적으로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황태성이라는 사람은 북한에서 무역성 부상, 우리나라로 치면 차관급 고위 인사였습니다. 이 정도 고위 인사를 보내는 데 사전에 메시지를 먼저 보내지 않고서 내려보냈다는 겁니다. 더구나 당시는 용매도 회담 때문에 남북이 접촉 중이었는데요.
김학민 : 제가 이 책 결론 부분에 결과론적이지만 북의 준비 미흡을 지적했습니다. 또 시기적으로 황태성이 내려왔을 때를 보면 쿠데타 세력 집권 한 달 새에 장도영 반혁명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쿠데타 세력 내에서 박정희의 위치가 견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황태성이 내려와서 "평화롭게 지내자"라고 한들 박정희가 그걸 받아서 처리하기 어려웠죠.
독립운동한 밀사, 중정 손에 간첩으로 전락
독서통 : 여기서 시간을 정리해보죠. 군부 쿠데타가 1961년 5월 16일 발생했고, 용매도에서 회담을 하자고 남쪽이 북쪽에 접촉하기 시작한 게 6~7월입니다. 용매도 회담 자체는 9월부터 열렸죠. 북한이 황태성을 보낸 게 8월 31일이었고, 황태성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게 10월 20일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박정희의 쿠데타 세력의 권력이 견고하게 자리 잡기 전에 황태성이 내려와서 소득이 없었다고 하셨습니다만, 북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렇게 권력 초기이다 보니 더 궁금했던 측면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반복하지만, 도대체 남쪽에 쿠데타를 일으킨 이들의 정체가 뭐냐?
김학민 : 그렇죠. 관련 자료나 증언을 보면 용매도 회담 진행 상황에 대해서 김일성이 다 보고를 받았습니다. 우리 생각보다 북에서 (당시 회담과 그에 따른 남북 관계의 미래에 대해) 기대가 컸던 거죠. 그런데 정작 접촉을 제안한 남쪽의 대응이 시원치 않으니까 더 답답했겠죠. 그래서 황태성에 의지하게 된 것이죠.
독서통 : 요즘 용어로 얘기하면 용매도 회담은 비선 접촉이고, 황태성은 몰래 보낸 특사가 되는 거죠. 그런데 그 황태성은 박정희는 만나지 못하고 중정으로 끌려갔어요.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된 겁니까?
김학민 : 황태성은 만 쉰다섯 살에 임진강을 건너서 8월 31일 서울 우이동으로 들어옵니다. 유일하게 남쪽에 연이 닿는 사람이 당시 중앙대 강사였던 김민하(중앙대학교 전 총장)였습니다. 그 집을 찾아가 여동생 황경임의 외동딸(조카딸) 임미정을 찾습니다. 그리고 임미정의 남편 권상능도요. 권상능은 김민하와 막역한 친구였습니다.
김민하는 곧바로 권상능-임미정 부부를 데려왔습니다. 셋은 바로 남북이 평화적 협의를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돕자고 의견을 정합니다.
독서통 : 어찌 보면 굉장히 낭만적인 이야기로군요.
김학민 : 그 당시 김민하, 권상능은 대구 경북 지방에서 사회 운동을 했던, 요즘 말로 하면 운동권이었죠. 자기들이 통일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런 역할에 나섰겠죠.
이 셋이 황태성이 박정희 혹은 김종필과 만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공화당 실세가 되는 김성곤(쌍용그룹 창업자)도 만나려 해보고, 박정희와 대구사범 동창인 왕학수 고려대학교 교수를 만나기도 했죠. 그런데 안 되는 겁니다. 북에서는 또 답답하니 계속해서 "어떻게 됐느냐"고 지령이 내려오는 거죠. (당시는 성과 없는 용매도 회담이 한창이었죠.)
이렇게 성과 없는 오랜 시간 황태성은 손녀도 만나고 영화도 보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마지막 시도로 죽은 자기 친구(박상희)의 부인이면서 박정희의 형수이고, 또 김종필의 장모인 조귀분을 직접 만나야겠다고 결심하죠. 그는 권상능-임미정 조카 부부를 조귀분에게 보냅니다.
두 분 조카 부부의 표현대로 하면, 조기분은 '달달달' 떨면서 담배 한 갑을 앉은 자리에서 폈다고 해요. 너무나도 느닷없잖아요. 황태성은 조귀분과 박상희 결혼의 중매를 선 사람이었고, 더구나 여동생 황경임은 조귀분의 친구였습니다. 조귀분 입장에서는 동네의 존경하던 오빠였고 자기 중매를 선 분이죠.
하지만 시대가 하 수상하지 않았습니까? 조귀분의 남편 박상희는 해방 정국에서 학살당했죠. 또 조귀분은 4.19 혁명에서 5.16 쿠데타 시기에 유족회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그러나 쿠데타 발발 후 유족회 사람이 탄압을 당할 때, 끌려가기도 했죠. 시동생(박정희)과 사위(김종필) 덕분에 곧 풀려났지만, 다른 사람들이 치도곤당하던 걸 봤죠.
겁이 났겠죠. 조귀분은 "내게 생각할 시간을 다오" 하고 둘을 올려보내죠. 어떻게 할까 고심하다가 조귀분은 결국 김종필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독립운동가 박상희는 박정희의 형이고, 김종필은 그의 사위다. 해방 후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의 구미지부를 창설했고,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발생한 10.1항쟁 이후 박상희는 구미경찰서를 공격했으나 이를 진압하던 우익단체와 경찰이 발포한 총에 맞아 사망했다.
김학민 : 중앙정보부에서 이 사건의 진상을 발표한 자료를 보면, 돈을 받았습니다. 지금 돈으로 4000만 원 정도의 간첩 신고 포상금입니다. 그러니 법적으로, 행정적으로는 간첩 신고를 한 겁니다. 그런데 사위(김종필)에게 알리는 건 황태성도 원한 바죠. 그래야 박정희, 김종필과 만나지 않겠습니까?
독서통 : '간첩이니 잡아가라'는 신고 차원이라기보다 알려 달라는 연락이 왔으니 연락한 거다?
김학민 : 그렇다고 봅니다.
독서통 : 아무튼 그렇게 황태성이 10월 20일 중정에 끌려갑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7일 사형선고를 받았죠. 그런데 처형된 건 2년이 지난 1963년 12월 14일입니다.
김학민 : 1963년 9월 5일에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그전까지 황태성 재판이 엄청나게 복잡하게 진행됐는데, 신문에 단 한 글자도 안 나왔습니다. 대선에서 야당이 이 사실을 폭로하고(그에 따라 박정희 빨갱이 주장이 나오고), 미국의 귀에도 들어가니 그제야 중정에서 이 사실을 발표하죠.
그때나 지금이나 간첩을 잡았다면 어마어마하게 대서특필하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황태성 사건은 거의 비밀 재판처럼 진행된 거죠. 더구나 이 '간첩'은 엄청난 거물입니다. 남북이 갈린 후 차관급 거물이 내려왔는데, 이걸 숨겼단 말입니다. 황태성이 간첩이 아니라 밀사란 또 다른 증거죠.
독서통 : 일단 사형 선고까지는 내렸지만 정작 집행은 되지 않았어요. 그러다 2년 후에 대선 과정에서 공개되고 나서야 결국 사형이 집행됩니다. 참 아이러니한 게, 지금 보수 정권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게 색깔론인데, 당시 대선에서는 박정희가 색깔론 공세에 시달렸죠. 박정희가 유세 때 "색깔론 펴지 마라"고 호소했다는 일화가 책에도 나옵니다.
김학민 :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 말대로 하자면 (여야가) '공수교대'를 합니다. 1963년 대선이 끝나고 박정희가 반대파를 색깔론으로 공격합니다. 그리고 그게 여태까지 이어지고 있죠.
"밀사를 죽여야 합니다"
독서통 : 아무튼 황태성이 중정에 연행되고 나서 사형 집행까지 2년의 세월이 흘렀잖아요. 그 기간 황태성이 김종필이나 박정희를 만났습니까?
김학민 : 여러 가지 정황상 박정희를 만난 것 같진 않습니다. 김종필을 만났다는 설은 두 가지죠. 황태성과 공범 관계였던 권상능은 "김종필을 만나서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종필이나 김종필 후임으로 중정부장이 된 김형욱은 "김종필이 아니라 비슷하게 생긴 박문병이라는 치안국 경감이 (김종필의 대역으로) 대신 만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역을 만났건, 김종필 본인을 만났건 (둘의) 대화록이 있어요. 흥미롭게도 김종필이 이번 <중앙일보> 회고록에서 이전 입장(황태성이 자신의 대역과 만났다)을 완전히 바꾸거든요? 박문병이라는 대역을 시켰는데, 들어가서 두세 마디 얘기를 나누더니 황태성이 "가짜는 가라!"고 호통쳐서 실패했다고 합니다. 본인이 (마지막 회고록에서) 본인 말을 뒤집은 거죠.
그렇다면, 현재 남아있는 황태성과 김종필의 대화록은 뭐냐는 거죠. 저는 둘이 직접 만나 나눈 대화록일 것이라고 봅니다.
독서통 : 설령 연행됐다손 치더라도, 김일성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황태성은 노력했을 것 아닙니까?
김학민 : 그렇죠. 중앙정보부에서 메시지를 계속 들었습니다.
독서통 : 책에 재구성된 내용만 보면 굉장히 정중한 분위기에서 대화가 오고 간 거로 되어 있더군요.
김학민 : 정중함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아세요? 흑석동 김민하 집에서 황태성이 연행되었는데, 중앙정보부 직원 3명이 방에 들어와서 큰절하고 데려갔다고 합니다. "선생님, 좀 가셔야겠습니다."
독서통 : 외부에 간첩으로 알려진 사람에게 중정 직원이 큰절을 한 거군요.
김학민 : 그렇죠. 김민하의 부인이 목격한 겁니다. 그리고 연행한 후에도 어디 서대문구치소나 경찰서 유치장에 가둔 게 아니에요. 동대문 전차 종점 뒤 한옥 안가에 모셔놓습니다. 거기 밥 해주는 아주머니를 포함해 시중을 드는 사람 서너 명도 있었고요. 중정 직원과 둥그런 상에서 같이 밥 먹고, 심문은 반도호텔로 불려가서 받았습니다.
독서통 : 연금시킨 거군요?
김학민 : 다음 얘기는 정확히 확인은 안 됩니다. 밤이면 지프에 태워서 서울 야경도 구경시켰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아무튼, 초기에 군부가 황태성을 간첩으로서 다룬 근거는 없습니다.
독서통 : 결국 밀사임을 인지하고 그에 걸맞은 대접을 했습니다. 즉, 처음에는 처형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고 봐야 할까요?
박정희는 황태성이 내려왔다는 사실에 아주 당혹스러워했죠. 죽이라는 소리도 못하고, 살리라는 소리도 못하는 상황이었죠. 김종필이 박정희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더니 박정희의 얼굴이 하얘 지더랍니다. 김종필의 회고에 따르면 "임자, 이 사건을 어떻게 할 거요?"라고 박정희가 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종필 이하 나머지 박정희 일파는 황태성의 존재가 앞으로 걸림돌이 될 거로 생각했죠. 김종필은 이번 <중앙일보> 회고록을 보더라도, 처음부터 죽이고 싶어 했어요. 직접 죽인다는 소리는 안 했습니다만, "이 사태를 안 순간 '빨리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빠른 처리'라는 게 뭡니까? 죽이는 것밖에 없죠. 김종필이 앞서 박정희의 질문에 "가능한 한 빨리 처리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박정희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박정희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지만, '너희가 알아서 처리해주면 눈 감고 가겠다'는 정도로 생각을 정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독서통 : 김종필이 그렇게 빨리 처리하려 했음에도, 왜 처형까지 2년이나 걸렸을까요?
김학민 : 그 상황은 미스터리가 조금씩 있습니다. 연행되고 나서 재판을 시작한 게 12월 1일이거든요?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시작했죠. 사형 판결을 같은 달 27일에 내려요. 26일 만에 모든 재판을 다 끝낸 거죠. 그 당시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는 단심제였어요. 거기서 사형 집행하면 그냥 끝입니다. 한국 전쟁 때의 군사 재판 유습(謬習)이 그대로 이어졌죠.
그런데 그 이듬해(1962년) 6월 30일에 군법회의가 단심제에서 삼심제로 바뀌어요. 사실 소급적용 대상은 아니거든요. 6개월 만에 죽일 수 있었죠. 그런데 안 죽였거든요? 그 사이에 대구교도소로 이감시켜요. 서울에서 눈에 덜 띄는 곳을 생각한 건지, 대구교도소에서 죽이려고 했는지는 모르죠. '그래도 밀사인데 죽여야 하는가'하는 갈등이 있지 않았나 추측할 뿐이죠.
그렇게 어영부영하다 보니 삼심제로 넘어가 버렸어요. 그다음부터는 재판을 해야 하니 물리적으로 2년이 걸린 거죠.
"황태성 사건이 무장공비 사태의 원인"
독서통 : 그때 북한은 어떻게 나왔나요?
김학민 : 북한은 기본적으로 자기들 정책의 실패나 노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잖아요? 결국 밀사가 잡혔고, 중정 수중에 떨어졌으니 밀사 파견을 실패로 본 거죠. 그래서 북은 당시 황태성이 남한에 포섭됐다고 생각했어요. 전향했다는 거죠. 그래서 북은 대외적으로 밀사 파견을 인정하지 않죠. 대내적으로는 대남 사업부의 온건파가 결딴나죠. 그리고 강경파가 들어섭니다.
독서통 : 결과적 해석이지만, 남북 관계에 긍정적 분수령이 될 수 있었던 사건이 남과 북 양쪽에서 좌절의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군요.
김학민 : 그렇죠! 남쪽에서 황태성에게 관심이 없었다면 그냥 안 받고 돌려보내면 끝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북의 강경파 득세를 이끌어버리게 된 거죠.
그다음부터 무장간첩 사건이 쭉 나와요. 1968년 1월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려던 사건, 그해 11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이 연달아 터집니다. 저는 북이 자신의 밀사를 처형한 데 보인 격한 반응의 한 부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황태성 사건이 남북 관계에 미친 영향이 아주 크죠.
독서통 : 대화를 통해 뭔가를 모색하려는 노력이 황태성 처형으로 무산되는군요. 실제 그 전에 김일성이 남북 연방제를 제안하기도 했고요.
김학민 : 그렇죠. 1961년 8월 15일 김일성의 제안이나 연설은 지금 봐도 굉장히 유연합니다. 물론 당시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보다 월등했으니까요. 그때는 저쪽(북한)에서 흡수 통일은 안 하겠다고 안심시킵니다. (웃음)
독서통 : 5.16 쿠데타 세력의 포고령 제1호가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는다"는 것이었고, 이는 미국의 불안한 시선을 불식시키려는 의도였다는 게 정설 아닙니까? 그렇게 본다면 황태성 처형에도 미국을 향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김학민 : 나중에 미국이 황태성을 데려다 두세 번 심문했습니다. 미국에도 소위 강경파도 있고 온건파도 있는데, 매파(강경파)는 초기부터 박정희의 전력(남로당 전력)을 굉장히 의심했죠. 그래서 이걸(황태성 사건) 어떻게 처리하느냐를 눈여겨봤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굳이 따지자면 쿠데타 세력이 황태성을 처형할 때 국내 여론에 대한 의식이 70이었다면, 미국은 30 정도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독서통 : 처형 시점이 참 공교로운 게, 대통령 취임 사흘 전이잖아요? 민주당의 색깔론 공세가 한참일 때죠. 국내 정치를 많이 의식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김학민 :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박정희가 정말 '빨갱이'였을까
독서통 : 결국, 어찌 보면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은 박정희의 남로당 가입이군요? 이 얘기를 빼고는 이 모든 이야기의 완결 점을 찍을 수 없습니다. 남로당 가입의 진실은 무엇입니까?
김학민 : 박정희에 대한 모든 책과 이야기를 살펴볼 때, 이 사람에게서 좌파적 요소는 많이 보이지 않아요. 그렇다면 왜 남로당에 가입했을까? 이게 의문이죠.
독서통 : 더구나 박정희는 남로당의 군내 조직책 수준의 지위를 가졌죠.
김학민 : 대개 (남로당 가입의) 연결고리를 형 박상희에게서 찾는데, <프레시안>에 실린 서중석 교수 인터뷰를 보면 박정희가 박상희의 영향은 별로 안 받았습니다. 박상희에게 맨날 야단맞았죠. 실제 박정희 자신도 (형이) 본인과 달랐다고 하고요. (☞관련 기사 : '박통'의 특별한 선배는 왜 간첩으로 죽어야 했나)
저는 박정희가 좌파 이데올로기에 매료돼서가 아니라, 출세를 위해 남로당에 가입했다고 봐요. 박정희가 신임 장교로 부임한 곳이 춘천의 8연대예요. 그 연대의 성격이 아주 중요합니다. 보통 여순 반란 사건의 주역인 14연대를 '빨갱이 소굴'로 아는데, 실제로는 8연대가 소굴이에요. 박정희의 직속상관인 부연대장 이상진 소령이 남로당원이에요. 게다가 그곳에 함께 부임한 국방경비대 2기 동기생 강태무 소령과 표무원 소령도 철저한 남로당원이었어요. 나중에 그 둘은 1개 대대 300명을 이끌고 월북하죠.
박정희의 초급 장교 생활 시절, 사방에 남로당원이 우글우글했던 거죠. 그 사람들과 모이면 대화가 어땠겠어요? "대세는 이거야!" 이러지 않았겠어요? 군은 예나 지금이나 진급이 가장 중요한 조직이잖아요? 그런데 상관이 다 남로당원이야. 박정희도 처세를 위해 가입했겠죠. 처세를 위한 기회주의적 속성에서 나왔지, 좌파 이데올로기에 매료됐거나 남로당 정강에 영향받았다고 보지 않습니다.
독서통 : 일제 치하에서 만주에 가서 관동군(일본군)이 된 것이나 남로당원이 된 모든 행동이 출세주의에 따른 결과였다는 거군요.
김학민 : 그렇죠.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겁니다.
독서통 : 어쨌든 당시의 선택(남로당 가입)이 두고두고 화근이 되니, 황태성을 처형했다.
김학민 : 그렇죠.
독서통 : '배신의 코드'라는 게 있잖아요. 어느 조직에 몸담았다 한번 조직을 저버린 사람이 이전 조직에 대해 훨씬 가혹한 자세를 취하잖습니까? 사실 '배신의 정치'에 가장 분노하는 사람이 박근혜 대통령인데…. (웃음)
김학민 : 자기가 진실한 사람을 못 쓰니 그렇게 배신에 민감한 것 아닙니까?
독서통 : 황태성이 처형 직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인상적입니다. 책을 보면 일곱 명의 헌병이 1963년 12월 14일 오전 11시 20분에 발사해 총살했는데, 황태성은 죽기 직전 "민족의 완전 자주독립과 남북통일 만세"를 삼창했다더군요. 당시 <동아일보> 보도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김학민 : 맞습니다.
독서통 : 책의 제목은 실제 황태성이 한 말을 인용하신 건가요?
김학민 : 그건 아닙니다. 상징적 의미로 뽑아낸 거죠.
독서통 : 알겠습니다. 아까도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이 책의 앞부분은 인간 황태성의 독립운동, 좌파 운동을 비중 있게 다뤘습니다. 그가 지역에서 굉장히 존경받았다면서요?
김학민 : 그렇습니다. 황태성은 경북 상주군(상주시) 청리면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12월 14일 처형 후 18일 화장해서 사십구재를 마치고 유골을 고향 선산에 묻기 위해 청리역이라는 조그마한 역으로 유해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 엄혹한 시기에도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나왔다고 합니다.
독서통 : 생존한 유족이 있나요?
김학민 : 아들이 둘이었습니다. 둘째는 평양으로 올라가서 거기에 자손이 살고 있고, 남쪽에 남았던 아들은 처형당했죠.
독서통 : 첫째 며느리는 (남쪽에서) 사별 후 재혼했음에도 시아버지(황태성) 옥바라지를 꾸준히 했다고요.
김학민 : 재혼한 남편까지도 함께 옥바라지했죠. 남쪽에 남은 유족은 친손녀(황유경)가 한 분 있습니다. 현재 미국 샌디에이고에 살고 있죠. 이 책을 쓸 때 귀중한 증언을 많이 해줬습니다.
저와 나이가 같은데, 중학교 1학년 당시 할아버지가 북에서 내려왔고 중학교 3학년 때 할아버지가 처형당했죠. 할아버지가 왜 내려왔는지 당시에는 몰랐지만, 당시 상황, 또 할아버지와 이야기 나눈 부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독서통 : 책에 한 대목이 나와요. 황태성이 서울에 내려와 손녀를 만나는데, 자신이 할아버지라고 안 밝히고 "할아버지의 친구"라고 속이고 손녀를 만나고, 헤어질 때 용돈을 쥐여주고 돌아서는 장면이요. 그런데 이 분, 친손녀가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만나셨다면서요?
이분께서 꽃씨회 회장에게 "제가 대통령께 달아드리겠습니다"라고 해서 승낙을 받았답니다. 그리고 대통령 앞에 가서 "제가 황태성의 손녀입니다"라고 아주 명확하게 이야기했답니다. 그 말을 들은 박정희의 얼굴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굳었다고 합니다). 전체 행사가 어떻게 끝났는지 모를 정도로 흐지부지 마무리되었죠.
원래 그 행사 후 명동에 가서 학생들이 사람들에게 꽃씨를 달아줘야 하는데, 명동에 못 들어가게 하더래요. 그 행사도 없어지고, 다음 해에는 그 서클 자체가 없어졌답니다. 손녀 말씀으로는 그 서클이 연합회라 상당히 많은 회원이 있었는데, "한순간에 그 서클이 없어진 이유를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회원들이 모를 것"이라고 하더군요.
독서통 : 그런 이야기가 있었군요.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미국이 황태성의 신병을 인수해서 본인들이 관리하려 했을 가능성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쿠데타 세력이 (계속 살려 놨던) 황태성을 급작스럽게 처형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김학민 : 김형욱 회고록에도 나오는데, 그 당시 북한에 미군 헬리콥터 조종사 2명이 억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미군 입장에서 황태성을 헬리콥터 조종사와 교환하려고 박정희 정권에 압력을 넣으려는 정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빨리 죽였다는 게 김형욱 회고록의 이야기죠.
독서통 : 잘 들었습니다. 황태성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 찬찬히 둘러볼 수 있는 계기를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자 가운데 한 분인 김학민 선생을 모시고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여러분께 일독을 권하면서 오늘 독서통 마무리하겠습니다. 김학민 선생님, 고맙습니다.
김학민 :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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