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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던 엄마들이 함께 두른 노란 손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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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모르던 엄마들이 함께 두른 노란 손수건

[민들레] '엄마의 노란 손수건' 오혜란 대표

안산 416기억저장소를 찾아가는 길. 엇비슷한 마을 길을 뱅뱅 돌다가 약속 시간보다 좀 늦게 도착했더니, 막 점심식사가 끝났는지 몇몇 사람들이 상을 치우고 있다. "점심 안 드셨죠?" 묻는 것은 늦었지만 밥을 먹겠느냐는 질문인데, 평소 같으면 손사래를 쳤을 내가 "네. 안 먹었어요" 하고 밥 차려달란 투의 대답을 냉큼 한다. 처음 온 공간인데 어쩐지 그래도 될 것처럼 편안했다.

밥상을 차리는 사이, 옆방에 새로 개관한 기억저장소 2호관을 둘러보기로 했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온몸에 힘이 들어간다. 매번 이런다.

정부합동분향소에 들어설 때, 단원고 교실을 향해 계단을 오를 때, 유가족 대기실 컨테이너 문을 노크할 때, 긴장이 되고 숨이 멈춰진다. 눈앞에 무엇이 펼쳐질지, 어떤 모습을 보게 될지 알면서도 매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또 매번, 단단한 마음의 준비도 소용없이 한순간 무너진다. 아, 너희들은 다 어디로 간 거니? 파란 벽으로 둘러싸인 기억저장소에는 개인의 가장 사적인 공간, 아이들의 방이 주인을 잃은 채 사진 속에 우두커니 있다. 그리고 전시관 한쪽에는 개지 않은 채 켜켜이 쌓인 이불이 보인다. "팽목항에서 부모님들이 아이를 기다리며 덮으셨던 이불이에요. 부모님들은 뭘 이런 것까지 전시하느냐 하시는데 저런 게 정말 중요한 역사의 기억이죠." 활동가의 설명이다. "식사하세요" 하는 소리에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 앞에 앉아, 엄마의 노란 손수건 오혜란 공동대표와 인터뷰를 시작했다. 눈물을 좀 멈춰보려고 괜히 바쁜 젓가락질을 하며 질문을 던지지만, 자꾸 두 눈에 눈물이 고인다. 오혜란 대표는 그런 나를 위로하듯 바라보며 말을 이어간다. 여기선 마음껏 슬퍼해도 괜찮아요, 하는 것 같다.

▲ 엄마의 노란 손수건 오혜란 대표. ⓒ민들레(장희숙)
- 안산에서는 오래 사셨어요?


만 23년 정도? 결혼하고 92년부터 살았으니까요. 기억저장소 1호관 동네에 한 15년 살았어요. 다른 동으로 이사를 했다가, 작은딸이 단원고를 가면서 다시 이 동네로 왔죠. 작은딸은 단원고를 졸업해서 지금 대학 2학년이에요.

이 동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죠. 작년 4월 16일 애들은 학교 가고, 애 아빠랑 저는 출근하고 그랬는데 가족 카카오톡방에 남편이 그 소식을 먼저 올렸어요. "배가 사고가 났는데 단원고 애들이 타고 있단다. 한번 봐라." 우리 애들도 놀라서 "진짜?" 이러고 저도 그때부터 인터넷 검색을 해본 거죠. 너무 너무 심장이 떨렸는데 좀 있으니까 전원 다 구조됐다고 해서 다행이라고 안심을 했었죠. 그리고 조금 있다가 희생자가 한 명 나왔다는 기사가 떴어요. "아니, 구조 다했다면서 무슨 희생자야?" 그때부터 계속 뉴스를 띄워놓고 보니 다 거짓말이었어요. 기가 막힌 일이었죠.

- 세월호 참사 열흘 만에 '엄마의 노란 손수건'이란 단체가 생긴 거 보고 무척 놀랐어요. 굉장히 발 빠르다, 조직적이다 감탄을 했어요. 그때 잠시 생겼다가 없어진 단체들도 많은데 지금까지 꾸준히 활동하시는 것도 참 대단하시다 싶고요.

그러게요. 저도 놀랐어요. 엄마들의 힘이 참 대단하죠. 저는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란 시민단체에서 문화예술 활동하고 노래도 하는 사람이었어요. 작년 2월에 단체 활동을 정리하고 개인적으로 노래에 전념해보고 싶어서 새로운 걸 준비하던 차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거예요. 너무 바쁘게 일하다가 이제 좀 여유 있게 활동해보자 할 때였는데, 그럴 상황이 아니었죠.

저도 처음엔 시민단체 소속이자 한 시민으로 안타까운 마음에 촛불을 들었어요. 시민들과 함께하는 문화제를 기획하고, 실종자가 돌아오길 염원하는 문화제도 이어나갔죠. 제가 하던 일이니까 그거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근데 열흘쯤 하니까 너무 숨이 막히는 거예요. 그 와중에 가족들은 걸어서 청와대 가겠다고 하는데 구조 작업이 촌각을 다투는 이 시점에 숨죽여서 기도만 하고 촛불만 드는 게 답답해 견딜 수 없었어요. 이럴 때가 아니다, 가족들이 청와대 가다가 길 막혔을 때 가까이 있는 우리라도 청와대를 가든 어디를 가든 더 빨리 사람 살려달라고 매달렸으면 뭐라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후회도 됐고요.

그 당시 시민대책위가 꾸려졌었어요. 대책위에서 촛불문화제만 하지 말고 더 큰 목소리를 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죠. 원래 잘 알고 있는 엄마 셋이서(노란 손수건 공동대표 정세경 씨와 운영진 대표 김미금 씨) 만났어요. "우리 이러지 말고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다 내 새끼 같은 애들인데 엄마 이름 걸고, 엄마들의 요구를 내걸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럼 머리에 손수건이라도 쓸까?" 이렇게 시작된 거죠. 예전에는 엄마들이 일할 때 항상 하얀 수건을 머리에 썼잖아요. 우리는 기다림과 희망을 상징하는 노란 수건을 쓰기로 했죠. 울기만 하는 엄마가 아니라 행동하는 엄마를 드러내고 싶어서 포목점에서 노란 천을 끊어다가 머릿수건을 만들고, 남은 천을 잘라서 '아이들을 살려내라, 구조해라' 이런 글씨를 써서 집회에 갔어요. 광장에 나갔을 때 모두 맨 앞줄에 앉으라고 했어요. 그래야 눈에 띄니까. 그리고 아직은 회원 확보가 안 됐을 때라, 당일 집회에 나온 엄마들에게 부탁했더니 많은 분들이 현장에서 함께해주셨어요. 노란 수건이 눈에 띄니까 취재도 많이 되고 관심도 많이 받아서 고맙고 다행이었어요. 엄마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거죠.

세월호 전만 해도 집회에 나와 본 엄마들 별로 없잖아요. 근데 이 나라가 이 정도였는지 상상조차 못 해본 엄마들, 자기 집 문단속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던 엄마들이 너무 놀라고 기가 막히는데, 이 슬픔을 어디가 풀어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 엄마들의 호응에 힘입어 사람들을 더 모아 목소리를 크게 내자, 하고는 온라인 카페도 개설하게 된 거죠.

지금 온라인 회원이 1만 명이 넘었어요. 저희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문구가 '진실과 생명을 지키는 엄마들의 행동'이거든요. 그냥 커뮤니티를 만들자는 게 아니라 행동하는 엄마들을 모으려고 했기 때문에 실천이 먼저였어요. 카페 안에서도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에 집중했죠. 집회 한 번도 안 해본 엄마들이 수두룩한데 얼마나 힘들까 싶어서 각 지역에서 촛불을 들 수 있는 데를 찾아서 연결해주고 그랬죠. 저희는 주로 유가족들이 다니는 곳마다 쫓아다니면서 식사 챙기고, 청운동에서 노숙하실 때는 모기장, 약품, 간식 같은 것 지원해주고 그랬어요. 엄마들이 제일 잘할 수 있는 게 그런 거더라고요.

아이들이 많이 올라오기 시작했던 4월 말에 정세경 대표와 둘이 팽목항에 갔는데, 그때 검안실에서 봉사를 했어요. 자원봉사자들이 많았지만, 그 일을 할 사람은 부족했어요. 검안실에서 아이들 확인하고 실신하거나 힘들어하는 부모들을 챙겨주고 해야 하는데, 오히려 봉사하는 사람들이 놀라고 힘들어서 감당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마침 그날은 더더욱 학생들 봉사밖에 없다고 해서 새벽에 저희가 나가서 물에서 올라온 아이들을 맞이하는 부모님들을 챙겼어요. 그때 이미 아이들 모습이 손상되기 시작했을 때였는데 그 충격이 가시질 않았죠. 분노하고 슬픈 마음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 세간에선 엄마들의 활동을 보고 '정치적이다' 이런 이야기도 하고, 보수언론에서는 의도적으로 엄마의 노란 손수건 대표 중 한 분이 진보정당 출신이라고 보도하기도 했죠. 엄마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이 모임이 보통 시민단체와는 좀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아요.

이 일 만큼은 엄마들이 앞장서야만 뭔가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절실해요. 한꺼번에 아이들이 이렇게 많이 희생 당한 일도 없잖아요. 엄마들은 기본적으로 남의 아이, 내 아이 할 것 없이 아이들 문제에 공감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이 사건을 기반으로 엄마들이 새롭게 느낀 게 있어요. 사회활동이나 정치활동에 크게 관심을 안 가졌는데, 공부를 시작한 거죠. 공부해보니 이 세상에 관심 갖고 제대로 알아야 할 게 얼마나 많은지를 다시 보게 됐대요. 그래서 SNS에 가입하고, 중요한 정보를 찾고, 중요한 건 공유하고 그러는 거죠. 정보를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해요. 세월호도 단순히 사고가 아니라 그 속에 정치, 부정부패, 신자유주의 문제까지 다 들어가 있잖아요. 거기다 노동, 비정규직 문제까지 많은 게 결부되어 있는데, 엄마들이 '그동안 그저 내 자식만 감싸고 있었구나'를 깨닫게 된 거죠.

결국 이 사회와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까지 달리 생각하게 됐어요. '이런 교육은 더 이상 안 된다'에 동감하고 제대로 된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인식하게 됐어요. "너무 열심히 공부만 하는 아이가 안쓰럽다"는 얘기도 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에도 변화가 생긴 것 같아요. 저 자신만 해도 아이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게 됐어요. 큰딸의 경우 의대를 가고 싶다고 했는데 제가 의사가 되면 뭐하겠느냐, 의사 된다고 행복할까, 아이에게 물었어요. 너무 스트레스받고 힘든 일을 하는 것보다는 자기 꿈을 좀 더 구체화해서 사람들과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엄마의 노란 손수건

-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형태를 병행하며 활동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들을 하시나요.

온라인 카페 '엄마의 노란 손수건'(http://cafe.daum.net/momyh/)에서는 노란 리본이나 배지, 스티커를 필요하신 분들께 나눠주기도 하고 세월호 관련 뉴스나 활동소식을 공유하기도 해요. 전국 행사나 모임이 있을 때 알리고 저희도 함께하죠. 오프라인에서는 지하철역에서 돌아가면서 서명도 받고, 안산에서는 지금도 매일 동네별로 촛불집회를 하고 있는데 거기도 참여하고요. 매월 16일에는 분향소에 모여 행사를 해요. 초반에는 서울에서 모였는데 1주기 이후에는 안산이라는 장소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이곳부터 단단해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었죠. 경기도 양평에도 '바꿈세(바람개비들이 꿈꾸는 세상)'이라고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는 분들이 있고, 분당, 용인 등 수도권 중심으로도 여러 모임이 있는데 한 달에 한 번은 안산에서 모이자고 의견이 모였어요. 매월 16일 안산에 와서 유가족 부모님들과 단원고 교실에 직접 가보면 마음가짐이 정말 달라지거든요. 먼 곳에 사는 엄마들은 급히 오셨다가 아이들 하교 시간에 맞춰 급히 돌아가시곤 해요. 점점 발길이 끊어지고 있어서 함께 밥이라도 먹으면서 우리가 잊지 않고 있음을 이어가려고 해요.

세월호 가족들과 편하게 웃고 떠들며 따뜻한 만남을 만들자는 생각에 '호프데이'도 열고, 여러 계기로 사람들이 안산에 모일 수 있게 하는 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싶어요. 아직도 세월호 가족분들은 집에서 거의 밥을 안 드세요. 처음에야 밥을 해먹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그랬지만 이제는 '누굴 먹이려고 밥을 하나' 싶다는 거예요. 자식 먼저 보내고 자신을 위해 밥하는 것 같아서 힘드시다는 거죠. 그래서 밥이라도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이웃이 되어야 한다 싶어서 가족들과 주민들이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이야기 사랑방을 열기도 하고, 고잔동에 '하늘땅별'이라는 텃밭도 같이 가꾸고, 도예나 천연화장품 만들기도 해요. 동네 안에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스스로 만들어 쓰는 프로그램을 운영해보려고요. 분향소 마당에는 '엄마 이야기 공방'이나 목공소를 만들어서 부모님들이 작품에 집중하면서 아픔을 달래고 시민들과 함께 마음을 나눌 길을 찾고 있어요. 유가족 중에 POP 강사 활동 하시던 어머님이 주민들에게 가르쳐주고 싶다 하셔서 몇몇이 배우고 있기도 하고요.

- 멀리 있는 사람들은 힘들면 외면할 수도 있지만, 이 지역에서 과정을 온전히 겪으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정말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도 하루에 몇 번씩 울었다 웃었다 해요. 학생들은 주말 프로그램으로 분향소-기억저장소-단원고로 이어지는 '기억과 약속의 길'을 함께 걷기도 하고, 조금씩 새로운 다짐을 하며 울고 웃는 공간이 되고 있어요. 타지에 사는 분들은 안산에 대한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데, 한편 이것은 안산의 숙명이라고 생각해요.

한 동네 안에서 살아가기 힘든 일도 많죠. 가까이에서 인사하며 반가워하던 이웃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만남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어요. "보상을 얼마 받았다며?" 그런 대화가 동네 안에서 오가는 것이 가장 힘든 부분이에요. 이런 일들이 자주 반복되어 삶 자체를 무너뜨리기도 해요. 어쨌거나 함께 살아가야 할 곳인데 '우리가 이웃인가? 과연 회복될 공동체는 있었는가? 뉴스나 미디어가 아니라 바로 가까이서 알고 지내던 이웃의 말을 직접 들어보는 게 더 중요하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들죠. 동네사람들 각자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지점이 있어요. 그런데 그 피해가 누구로부터 기인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 것들을 정확히 보고, 서로 헤아리고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어찌 됐건 이 안에서 주민들과 함께 움직이려 하는 거고요.

- 정부에선 틈만 나면 '보상' 얘기를 꺼내는 것 같아요. 얼마 전 뉴스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의 보상 신청이 68%라는 보도가 나오던데 내부 상황이 어떤지 궁금해요.

보상 얘기는 사실 민감한 부분이기도 하고 화가 나는 부분이기도 해요. 가족들은 500일이 넘도록 도대체 내 아이가 왜 그렇게 죽었어야 했나, 왜 구조하지 않았나를 알고 싶다고 울부짖었는데 그 '왜?'라는 질문에 한마디 답도 없이 돈으로 묻으려 한다는 건 너무도 무서운 일이에요. 아이들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고 생업을 포기하고 540여 일을 싸워온 가족들은 몸과 마음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무척 힘든 상황이에요.

헌데 정부는 참사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은 상황인데도 기한까지 정해 기막힌 순간에 문자까지 보내며 보상을 미끼로 진실을 덮으려 하고 있어요. 그러나 대부분의 가족들은 대체 왜 죽었는지 이유를 알아야 보상 기준도 정해질 거 아니냐고 반발하고 있어요. 130가정이 신청을 거부하고, 정부에 책임을 묻고자 민사소송을 하기로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언론에선 자극적인 말로 호도하지만, 가까이서 지켜본 저는 가족들이 원하는 건 보상이 아니라 참사의 원인을 명확히 밝히고자 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어요.

- 지금도 세월호를 생각하며 가슴 아파하는 분들이 많으신데요. 현실적으로 뭘 해야 도움이 될지 궁금하다고들 하세요.

우리도 매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것이 최선인지, 잘하고 있는지. 하지만 회원들에게는 못 나온다고 힘들어하지 말고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 된다고 독려해요. 그러려면 제대로 된 정보를 계속 접하는 게 중요해요. 시간이 지나고 나니 말도 안 되는 일로 편 가르기도 되고 그런 과정에서 일반인들은 정보가 부족해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동네 안에서부터 이런 이야기들이 스며들어야 한다고 봐요. 4.16 이전과 이후 우리 삶은 분명히 달라졌잖아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생명의 존엄, 살아가는 문제, 안전에 대한 국가나 정치권의 행보가 분명히 바뀌어야 한다고 보는데, 그런 삶을 위한 작은 실천이 뭔지 찾아서 같이 행동해가는 게 중요하겠죠.

내 자식만 안전할 수 없는 나라예요. 2년 전 우리 딸도 똑같은 방법으로 제주도를 다녀왔는데 그때도 비상구며 안전에 대한 대책은 전혀 없었어요. 그러니 언젠가는 또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닌가 싶어요. 한 사람의 생명도 귀하게 대접받을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해요. 지금 이 땅의 아이들은 꿈을 꿀 수 없어요. 어제도 단원고 교실 존치 문제로 모임이 있었는데 아무런 결론을 낼 수 없었어요. 유가족의 이기심이 아니라, 앞으로 이 교실에서 공부해야 할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다시는 이런 참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기록을 보존할 가치가 있는데, 학교의 발전과 면학 분위기를 위해 교실을 없애야 한다는 의견도 있거든요. 지금 단원고에는 '학교는 학교다운 모습으로 학생들에게 돌려줘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어요. 그걸 보면서, '정말 학교다운 모습이란 뭘까?' 여러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 팽목항에서 부모님들이 덮언 이불이 기억저장소 한쪽에 전시되어 있다. ⓒ엄마의 노란 손수건

- 안산 주민이라는 숙명으로 세월호를 통해 전혀 생각지 못한 삶을 살고 계시네요. 앞으로 활동계획은 어떤 게 있어요?

죽기 전에 독집 음반 하나 내고 싶은 바람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꿈이 좀 보류됐죠. 그래도 416가족합창단을 만들어 함께하고 있어요. 지난 500일 추모합창제 때 저도 참여했어요. 월요일마다 분향소에 모여 가족들과 함께 합창연습을 하고 있고요. 지난 10월 31일에는 부모님들이 직접 만드신 공예품이나 목공작품 같은 걸 모아서 시민들과 함께하기 위한 '엄마랑 함께하장'이라는 프리마켓을 열었어요. 가족들은 540일이 넘도록 진실을 향해 한걸음도 못 내디디고, 사람들의 관심은 점차 줄어 잊히고 있는 게 아닌가 불안해하세요. 보상 문제로 구설에 오르기도 하고, 많이 힘들지만 그래도 끝까지 떳떳한 부모가 되겠다고 힘을 내고 계신 걸 보면 저희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 싶어요. 많이들 관심 가지고 함께해주시면 좋겠어요.

피켓 하나 들었다고 '종북'이라고 몰아붙이는 세상에서 집회를 처음 경험하는 엄마들은 여전히 두렵지만, 앞으로 세상이 더 나아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계속 고민하고 행동할 거예요. 세월호 100일 되던 날, '태어난 100일은 엄마가 책임졌지만 세월호 참사의 100일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문구를 신문에 크게 낸 적이 있어요. 불순분자다 뭐다, 그런 딱지가 붙지만 상관없어요. 그럼 어때요. 그런 엄마들이 점점 더 많아져서 세월호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남아 있는 아이들을 위해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싶다는 바람뿐이에요.

인터뷰를 마치고 정부합동분향소에 들러 어머님들도 뵙고 오랜만에 사진 속 아이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분향소를 한 발짝만 벗어나도 딴 세상이다. 햇살이 길어진 오후, 빛바랜 노란 리본은 바람에 흔들리는데 분향소 옆에 있는 유원지에서는 어린아이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아빠 엄마는 그런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어쨌거나 산 자는 남은 날들을 살아갈 것이다. 남편 몰래 선글라스를 끼고 집회에 나오는 엄마들, 어린 아기를 업고 걸리면서 멀리서 찾아와 울다가 돌아가는 엄마들, 곳곳에서 할 수 있는 만큼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로 인해 우리의 일상이 이렇게 굴러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지겨우니 그만하자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사랑은 지겹지 않은 법이다. 서로 모르던 엄마들이 머리에 함께 두른 노란 손수건이 그 힘을 보여 준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바로가기 :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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