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자가 해야 할 일로 진실 보도만큼 중요한 일이 바로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는 중요한 목소리를 널리 알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귀담아 들을 만한 이들의 목소리를 독자 한 사람에게라도 더 전달하고자 노력하는 편이다. 이름 석 자가 박힌 '내' 기사를 쓰는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의 글이나 말을 편집하는 일을 즐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게 소개하는 이들 가운데는 취재 중에 만났던 사람도 있고, 책으로 접하는 저자도 있고, 또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도 있다. 그런데 오늘 소개하는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생각의힘 펴냄)의 저자 이상헌은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할지 애매하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항상 그의 말글에는 귀와 눈을 열어뒀었기 때문이다.
한 번쯤 연락을 해야지, 하다가 노동 담당이 아니라는 이유로 미뤄두곤 했었다. 그러다 그의 이름 석 자를 우리 지면이 아니라 다른 매체에서 보게 되었다. (그 때도 굉장히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를 오가는 그의 글도 가끔씩 찾아 읽었다.
그러다 얼마 전 이상헌이 여기저기 쓴 에세이를 묶어서 펴낸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를 손에 들자마자 단숨에 읽어 버렸다. 사실은 할 일이 많아서 프롤로그만 읽고서 미뤄둘 생각이었는데, 자꾸 손이 가서 결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고 말았다. 심지어 버스 안에서 포스트잇까지 붙여 가면서 말이다.
책을 단숨에 읽고서 이상헌의 에세이가 이렇게 마음을 끄는 이유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랬더니, 순간 머릿속에 지금은 세상에 없는 두 사람이 떠올랐다.
한 사람은 경제학자 정운영이다. 정운영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적절한 일화와 경제학 지식을 버무리는 데 비범한 솜씨가 있었다. 그러니까 독자는 설사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역사나 문학 속 어딘가에서 끄집어 온 일화에 재미를 느끼거나, 혹은 경제학 지식을 하나둘 귀동냥하면서 뿌듯해할 수 있었다. 이상헌의 글이 바로 그렇다.
그는 스웨터(sweater)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노동자의 몸에서 땀을 짜내는 악명 높은 '인간 스웨터'가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인간 스웨터의 착취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고자 오스트레일리아(호주)에서 시작된 캠페인의 결과가 바로 오늘날의 '최저 임금'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어지는 최저 임금을 둘러싼 경제학 내부의 다양한 입장차는 마치 흥미진진한 노동경제학 강의 한 토막을 듣는 듯하다. 고백하자면, 학부 때 교양 강의로 산업사회학을 들은 적은 있지만, 노동경제학은 거부감이 들어서 외면했었다. 아마 그가 이런 과목을 개설했다면 가장 먼저 수강 신청을 했을 텐데….
이상헌의 에세이를 읽고서 생각난 또 다른 사람은 영문학자 장영희다. (정운영의 일화가 대부분 머리로 배운 것이었다면) 소아마비를 앓은 탓에 몸이 불편했던 그녀는 일상의 체험에서 삶의 진실을 포착하는 비범한 재주가 있었다. 더 나아가 그녀의 글에는 그것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고 독자에게 성찰을 동참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이런 글이 <조선일보>에 오랫동안 실렸다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다.)
이상헌의 글이 그렇다. 국제기구에서 오래 일한 경력만 놓고 보면 조금 잰체해도 될 법한데, 그는 한없이 겸손하다. 그리고 그런 낮은 자세로 자신의 다양한 경험을 털어놓으며, 거기서 우리가 성찰할 지점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마치 소주 한 잔 걸친 것처럼 뜨겁게 독자에게 같이 한 번 생각해보자고 손을 내민다.
그래서 '우수 고객'에게 다가와 고개를 90도 숙이는 비행기 승무원에게 느낀 당혹감, 우유나 신문을 배달할 때 엘리베이터 이용을 금지한 강남 아파트 주민의 소식을 듣고서 솟구친 분노, 외할머니가 사발로 들이킨 커피, 1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세월호 아이들…. 이 모든 것이 그의 글을 통해서 곧 우리의 경험이 되고, 우리를 반성의 시간으로 밀어 넣는다.
그렇다면, 이상헌은 도대체 왜 이렇게 쓸까? 그는 황현산의 문장("기억만이 현재의 폭을 두껍게 해준다")을 아래처럼 해석한다. 짐작컨대, 이것이 바로 그가 때로는 정색하고 때로는 어깨 힘을 빼고 끊임없이 기록하는 이유다. 그가 이 책에서 여러 차례 세월호를 기억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고.
"이때 기억이란 과거에 내가 기억했던 그 기억이 아니다. 오늘의 내가 그 과거에 대해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현재의 기억이다. (황현산)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로운' 기억이다. 그런 기억만이 현재의 폭을 두껍게 한다. 물론 이 사실을 끊임없이 기억해 내는 것이 '새로운 기억'의 출발점이다." (248쪽)
사족 하나. 이렇게 저자가 틈틈이 쓴 글을 모은 책을 접할 때마다 한 가지 불만이 있다. 독자가 그 글이 쓰인 맥락을 알 수 있도록 글 뒤에 최초의 글이 쓰인 일시를 남겨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왜냐하면, 여기 묶인 글들은 그 자체로 중요한 한 시대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을 민감하게 포착한 정운영은 글을 묶을 때, 항상 일시와 그 글이 쓰인 맥락을 덧붙였었다.
사족 둘. 틀림없이 책읽기의 흔적일 게 분명한 몇 편의 글에 정작 원래 책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것도 아쉽다. 예를 들어, 청년 스탈린에 대한 짧은 에세이는 도대체 어떤 책을 읽고 쓴 것일까? 유명한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일까, 아니면 최근 국내에도 번역된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의 <젊은 스탈린(Young Stalin)>일까? 아니면 과문한 탓에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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