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압합동신문센터 직원들은 언론에 철이 씨의 얘기를 흘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온 기사는 분명 철이 씨, 자신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심지어 '국정원 밥 먹고 14킬로그램 찐 간첩'이라며, 무척 자극적으로 포장돼있었습니다.
당장 북한에 있는 가족들이 떠올랐습니다. 철이 씨 가족을 한국에 데려와 주겠다던 약속 또한 거짓일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치소 공안 담당 교도관에게 국가정보원 사람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교도관은 검사와도 만날 권한이 없지만 면담은 알아보겠노라 했습니다.
곧, 담당 검사와 면담했습니다. 테이블 위에 녹음기부터 꺼내 놓은 검사가 말했습니다.
"국정원에 알아보니, 북한에 있는 철이 씨 가족들을 데려오겠다는 게 아니라 가족들이 태국에 나오면 돌봐주겠다는 얘기던데요."
국정원에 '뒤통수를 맞은 것 같다'는 추측이 확신으로 굳어진 순간이었습니다.
"보위사령부 간첩이라면서, 사령관 이름도 모릅니까?"
곧, 법원에서 변호인의 도움을 받아 일주일 내에 의견서를 제출하라는 서류가 날아왔습니다. 의견서 제출 기한이 점점 다가왔지만 철이 씨를 담당하는 국선 변호사는 오지 않았습니다. 사실, 의견서는 기한 내에 꼭 제출해야 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철이 씨는 그저 손톱만 깨물었습니다. 기한이 다 될 즈음 초조해진 철이 씨는 면담 자리에서 검사에게 의견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검사는 기한 내에 꼭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법원에 의견서를 보낼 때 봉인이 되는지, 구치소 교도관에게 넌지시 물어봤습니다. 교도관은 '여기서 나가는 모든 문서는 검열된다'고 했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의견서에 자백한 내용을 뒤집어서 쓰면, 검열에 걸려 다시 국정원에 끌려갈 줄 알았어요. 내곡동에서 조사받을 때 건물 지하에 고문하던 데가 있다고 어디서 들었거든요."
결국 진술을 번복하지 못했습니다. 괴로웠습니다. 의견서를 제출하는 날, 국선 변호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교도관은 편지 또한 검열 대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편지에 '진술을 번복하고 싶다'는 말은 차마 쓸 수 없었습니다. 대신 '재판에 관해 물어볼 얘기가 있으니 만나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철이 씨는 의견서 제출 시한에 쫓겨 국선 변호인 접견도 하지 못 한 채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하는 의견서를 제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성문은 따로 쓰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사동 도우미가 반성문은 안 쓰느냐며 반성문 양식을 그려줬습니다. 무조건 써야하는 건 줄 알고, 반성문도 썼습니다.
며칠 뒤인 3월 말경, 어떤 변호사가 철이 씨 접견을 신청했습니다. 나가 보니, 철이 씨가 알던 국선 변호사 이름과는 달랐습니다. 그 변호사는 철이 씨가 편지를 보낸 국선 변호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김진형 변호사입니다."
'변호사를 가장한 프락치인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바짝 경계하며, 김 변호사가 묻는 말에 국정원에 진술한 대로 말했습니다. 그렇게 몇 번 질문과 대답이 오갔습니다.
"보위사령관 이름이 뭔가요?"
"…모릅니다."
김 변호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공작 임무를 받았다는 분이, 사령관 이름도 모릅니까?"
철이 씨가 우물쭈물하자, 김 변호사가 "'민변'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철이 씨는 "국정원에서 들어서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김 변호사는 "우리는 돈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니 그저 솔직하게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왈칵 눈물을 쏟아져 나왔습니다. 어느새 얼굴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됐습니다.
3월 27일 오후, '민주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서는 기자 회견이 열렸습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의 증거 조작 사실이 밝혀지며 세간이 시끌시끌하던 때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변은 또다시 국정원의 간첩 조작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온 나라가 다시 발칵 뒤집혔습니다.
"재판정에서 봅시다"
기자 회견에서, 민변 변호사들은 기소된 피고인을 검찰이 검찰청으로 불러 변호인 접견을 방해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날 오전이었습니다. 김진형 변호사는 철이 씨에게 오후에는 민변의 다른 변호사가 찾아올 거라며, 그전까진 누구도 만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지도 철이 씨는 자신에게 법적으로 어떤 권리가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점심에 검사로부터 호출이 왔습니다. '북한은 변호사보다 검사가 세니까…' 망설이던 철이 씨는 검사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검사 방에 가 보니, 오전에 만난 김 변호사가 먼저 와 있었습니다. 김 변호사가 검사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공소 제기 이후에 왜 피고인을 부르는 겁니까? 저희가 철이 씨 변호를 맡기로 해 오후에 접견할 예정이었습니다."
뒤이어 민변 장경욱 변호사까지 도착해, 다른 방으로 철이 씨를 데려갔습니다. 장 변호사는 철이 씨를 타일렀습니다.
"공소 제기가 된 상태니, 검사가 철이 씨를 부를 권한이 없습니다. 이제 검사가 부르면, 가지 않겠다고 하세요."
그날 저녁, 검사는 구치소 교도관들을 통해 철이 씨를 또 불러냈습니다. 거절하니, 검사가 직접 구치소에 오겠다며 만나자고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또 호출이 왔습니다. "변호사님이 이제 검사가 날 소환할 권리가 없다고 했다"고 하니, 교도관들이 아니라며 "꼭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가지 않을 경우, 불출석 사유서를 써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어떻게 쓰는지 모른다고 하니, 교도관들은 불러주는 대로 쓰라고 했습니다.
'상기 본인은 변호인으로부터 변호인의 접견 전까지는 누구도 만나지 말라는 조언을 듣고 금일 출정을 불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차후 검사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습니다.'
검사의 호출은 계속됐습니다. 화가 난 철이 씨는 직접 검사를 찾아갔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까지 한 진술들을 계속 뒤집고 싶었습니다. 국정원은 분명히 언론에 제 얘기를 안 내겠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국정원이 저한테 집도 주고 가족들도 데려와 주겠다고 한 게 지켜지지 못할 약속이라 진술을 뒤집으려고 했는데, 국선 변호사를 만나지 못 해서 의견서와 반성문을 쓴 것입니다."
검사가 말했습니다.
"그럼, 재판정에서 봅시다."
"나는 간첩이 아닙니다"
"피고인이 합신센터 조사관들 또는 국정원 수사관들에게 한 자백 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 하에서 행하여졌다는 점이 확실히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피고인의 자백진술을 내용으로 한 이 부분 각 진술은 증거 능력이 없다."
"피고인에 대한 이 사건 공소 사실은 범죄 사실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 후단에 의하여 무죄를 선고한다."
2014년 9월, 재판부는 철이 씨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검찰 측이 제시한 증거는 철이 씨의 자백이 유일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백은 변호인의 조력 없는, 심리적 불안감과 위축 속에서 작성한 것이라 증거로서 효력을 갖지 못한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습니다.
'간첩 무죄'. 너무도 기다려왔던 순간이었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지 1년 하고도 1개월 만에, 철이 씨는 지긋지긋했던 누명을 벗었습니다.
무죄 선고와 동시에, 오랜 구치소 생활도 끝났습니다. 구치소에 있는 짐은 그대로 둔 채, 변호사들과 함께 법원을 나섰습니다.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고마웠어요. 나는 간첩이 아니니까 당연한 판결이긴 한데, 그렇게 되기 쉽지 않잖아요. 1심 재판부도 큰 결심 해주셨고, 변호사님들에게 특히 고맙고. 한국에 편향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래도 진실을 밝히자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만으로 따뜻함을 느꼈어요."
"늘 미행당하는 기분"
2014년 11월, 철이 씨는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습니다. 드디어 남한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셈이었습니다.
보통은 신청만 하면 되지만, 철이 씨에게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주민등록증 하나 받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무죄 선고를 받고 석방이 되었음에도, 철이 씨는 한동안 탈북민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통일부가 철이 씨의 재판이 모두 끝날 때까지 보호 여부 결정을 보류한 것입니다. '보호 결정 보류'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철이 씨는 정부 보호를 받는 다른 탈북자들과 달리, 재판이 무죄로 끝날 때까지는 집도 받지 못하고 정착 지원금도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남한 땅에 아는 이 하나 없는 철이 씨는 변호사들과 종교 단체 도움을 받아 근근이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변호사들은 철이 씨에 대한 가족관계등록 창설을 허가하고, 북한이탈주민보호법에 따른 보호 결정을 서둘러 달라며 국정원과 통일부에 촉구하는 기자 회견을 열기도 했습니다.
자유의 몸이 됐지만, 철이 씨는 남들처럼 온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늘 누군가로부터 감시를 받는 듯한 느낌에 시달립니다.
"제가 동네 편의점에서 밤에 자주 술을 마시거든요. 그런데 저랑 같이 마시던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누가 저를 계속 쳐다본다고요. 저번에는 전철을 탔다가 잘못 탄 줄 알아서 후다닥 내렸는데, 어떤 여자도 같이 내리더라고요. 종점이라 문이 오래 열려 있었는데 갑자기 제가 내리니까 같이 뛰어내린 게 이상해서 '날 미행하느냐'고 물어보니 말도 없이 그냥 쌩 하고 가더라고요. 오해일 순 있는데 찜찜하더라고요.
그래도 신경 쓰지 않아요. 난 간첩이 아니니까요. 따라다니다 힘들면 그만두겠지요. 같이 입국한 탈북자 친구들도 웃어요. 내가 간첩이면 자기들도 간첩이라고요."
"합리적 의심을 갖고 바라봐주세요"
철이 씨는 요즘도 계속 재판정에 나섭니다. 검찰 측에서 1심 결과에 불복해 항소를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철이 씨는 생일을 맞았습니다. 생일 바로 다음 날이 2심 공판이 열리던 날이라, 공판이 끝나고 변호사들과 늦은 생일 파티를 했습니다. 케이크 촛불을 끄는 철이 씨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습니다.
"국정원에서 조사받을 땐 '한국에 왜 왔지' 하고 후회를 많이 했어요. 그냥 그 땅(북한)에서 죽을걸. 그러면 적어도 내가 자라던 땅에는 묻힐 텐데. 여기서는 내가 죽어도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니 정말 억울했거든요. 그래서 어찌 됐든 살아야 하긴 하니까 허위 자백도 하게 된 거죠.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이제 후회는 하지 않을 건데, 정말이지 저는 남한 와서 이런 고초를 겪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북한에 있었을 땐 워낙 계급 문제 때문에 사회에 대한 원망이 많아서 남한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이 있었거든요. 그랬던 제가 간첩으로 몰리다니….
저 같은 사건이 생기는 건 결국 분단이 만들어낸 비극이라고 봐요. 반세기 넘게 남북이 떨어져 지내면서 서로 편향적 사고를 갖게 되고, 또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특정 세력이 자기 주의주장이 옳다는 걸 입증하고 자기 지위를 유지하려고 간첩 사건 같은 걸 만들어내서 힘없는 사람을 피해자로 만들고. 저는 이런 사회 풍조가 가슴이 아파요.
사건들이 제기되면 우선 의심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사건이든 다른 비슷한 사건이든 국민들과 사법부 판사님들께서 부디 합리적인 의심을 가지고 바라봐주셨으면 좋겠어요."
* 이 기사는 미디어 다음과 공동 게재합니다.
(☞바로 가기 : "나는 간첩이 아닙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