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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아이들에게 남한 과자 전달 못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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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아이들에게 남한 과자 전달 못한 까닭은?

[김동수의 북한 방문기] <3> 북에 와도 쉽게 만날 수 없던 조카들

김동수 교수의 북한 방문기를 연재합니다. 김 교수는 평안남도 덕천 출신으로 미국 버지니아주 노폭주립대학교에서 27년 간 교수로 재직하며 평화와 통일 운동에 몸담았던 국제평화운동가입니다.

남북 간 교류가 사실상 막혀있는 가운데 김 교수는 지난 4월 21일부터 28일까지 북한 어린이들을 지원하는 '코인 선교재단'(COIN Mission Foundation)의 폴 유 목사 부부와 함께 북한의 곳곳을 방문했습니다.

재미교포로 북한을 여러 번 드나들었던 김 교수는 북한은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인민의 낙원"은 아니지만, 남쪽의 일부 사람들이 믿는 것과 같은 "생지옥"도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2015년 현재 북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본 총 7편의 김 교수 방북기를 통해 북한의 실제 모습을 이해하고, 나아가 남북이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김동수의 북한 방문기>

셋째날, 오늘은 드디어 폴 유 목사가 지원해 온 고아원을 찾는 날이다. 평양에서 약 30km 떨어진 평성 애육원인데 과거 10여 년간 유 목사가 심혈을 기울여 두유, 빵, 시설, 트럭 등을 지원해 준 곳이다.

그런데 전날 라 동무와 의논하는 과정에서 이견이 나왔다. 아이들을 위해 미국과 남한에서 구입한 과자, 사탕, 초콜릿 등을 준비해 갔는데 그것을 분배해 주지 말라는 것이다. 이유는 아이들이 외국 과자를 얻어먹는 습관이 별로 교육적이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한글로 써 있는 남한 과자가 문제였을까? 위에서 무슨 이야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전쟁 전후 어디서나 미군 병사들이 아이들에게 던져주는 사탕, 껌, 초콜릿, 또 그것을 애걸하던 생각이 스쳐 간다. 아이들에게 사랑으로 주는 사탕에 국적이 중요한가? 평양을 벗어나면서 도로 사정은 좋지 않고 사람 옷차림도 점점 뒤져 보인다. 농촌 마을마다 모내기 준비가 바쁜 듯하고 차보다 자전거 여행자가 많다. 한 군데 무장한 군인 검열대(검문소)가 있어 모든 여행자를 점검하고 있다.

아이들을 찾아가며 빈손으로 갈 수 없다는 우리의 요청에 결국 지도원 동무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는지 평성에 이르러 어느 상점에 들렀다. 그곳에는 과자류와 다른 장기보관 식품이 엄청나게 쌓여있었다. 점원 몇 사람이 나서 급히 150여 명이 먹을 과자를 몇 상자 준비한다. 값도 좋기에 우리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열심히 집어넣었다. 그런 동안 두 번이나 잠시 정전이 됐지만, 아이들이 좋아할 것을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물건을 담았다.

과자를 실은 차를 끌고 애육원으로 향했다. 애육원은 동네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데, 'ㄷ' 자 모양으로 좌측에는 2층 교실 건물이 있다. 그 앞에는 식당, 우측에는 숙소가 있고 마당으로 된 작은 놀이터가 있다.

애육원에 들어서자 새로 온 원장이 우리를 교실로 안내했다. 애육원 아이들은 4~6살로 ,새로 입원한 60여 명을 포함해 약 150명 정도라고 한다. 아이들은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아이들을 안아주고 과자를 나눠주면서 같이 손뼉을 쳤다. 유 목사에 의하면 애육원의 시설이 많이 개선됐고 아이들도 많이 건강해 보인다고 한다.

▲ 평성애육원에서 장난감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 ⓒ김동수

아이들을 보면서 이들이 다 어디서 왔을까, 기아는 많을까, 이혼은 많은가 등등의 생각이 들었다. 상황을 알고 보니 장기 출장을 떠나는 부모의 자녀를 장기 위탁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떠나기 전에 원장에게 앞으로 특별히 지원해 줄 것이 무엇인지 묻자 이제는 국가에서 충분히 필요한 것을 지급하므로 다른 곳에 더 지원해 주라는 대답이 나왔다. 10여 년 전 어려웠던 상황을 떠올렸던 유 목사는 남다른 감회를 느낀 것 같았다.

혁명열사릉과 현충원, 갈라진 애국 영령

오는 길에 우리는 도로 공사로 막힌 길을 돌아 형제산구역 신미리의 '애국렬사릉'에 들렀다. 이 능은 대성산에 있는 '혁명열사릉' 보다 격이 낮은 국립묘지로서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 건설, 나라의 통일위업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된 애국렬사들의 위훈은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것"을 기념하며 김정일 위원장의 지도로 1986년 9월에 세워진 성역이다.

이 능에는 돌에 흑백사진으로 새겨진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항일투쟁 당시와 그 이후 국가에 공헌한 여러 분야의 '애국열사'를 포함하고 있다. 안내하는 여성 동무에 의하면 9만여 평에 모신 500여 영령 중에는 외부의 열사가 30여 명, 기독교인 8명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필자는 여기서 직접 알고 있는 분들과 부모를 통해서 알게 된 이름을 찾았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우리 일행이 잘 알고 있는 홍동근 목사의 묘지다. 홍 목사는 서울 영락교회, 일본 교토 한인교회, 미국 로스앤젤레스 '선한 사마리아인 교회' 등을 목회하면서 조국의 평화 통일을 위해 많은 수고를 하신 분이다.

그는 '통일신학'을 창시하고 말년에는 미국 장로교단의 지원으로 유일하게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기독교개론을 강의하다 2001년에 병사하였다. 만주 국민(초등)학교시절 필자의 3학년 담임선생이었던 그와는 특별한 사이이기도 하다.

우사 김규식 박사의 묘비가 다소 놀랍고 반가웠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한국전쟁 당시 월북 또는 납북된 전 상해임시정부 요인들 (김규식, 최동오, 조소앙, 조완구, 윤기섭, 엄항섭, 이준(가묘), 이용(이준의 아들), 유동렬 등)의 묘소가 여기 있다고 한다.

민족의 분단은 애국열사들의 마지막 길도 갈라놓았다. 남쪽의 '국립서울현충원'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순국한 호국 영령들' 또는 국가유공자를 안장하고 있는데 그들 대부분은 참전용사들이다. 자유를 수호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전사하거나 생을 바친 고마운 분들의 묘역이다.

그런데 이념과 체제를 넘어 민족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현충원에는 동족을 많이 죽이고 동족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또는 미국의 베트남전쟁 시 용병처럼 파병되어 산화한 대한 용사들이다. 일제강점기 자주독립을 위해 생명을 바쳐 싸운 독립투사의 묘는 많지 않다. 만주 벌판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독립군은 물론, 민족주의 계열의 대표적 의사인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골과 백범 김구 선생의 유해는 이곳에 없다. 7개의 묘역에 6만여 순국 영령들 중 260여 애국지사 묘는 오른쪽 언덕 한 곳에 밀려있다.

현충원 묘지뿐만 아니라 지금의 대한민국은 태생부터 부끄러운 역사로 시작됐다. 반민족친일 매국노를 제대로 처단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 세력이 국가의 지배층을 이뤘다. 그러면서 외세, 특히 미국에 과도하게 의존했다. 민족정기와 긍지를 말살한 사대주의적인 모습이었다. 민족의 해방과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사투한 진정한 애국영령은 어디에 있나?

현충원 정면에는 한국에서 인기 있는 세 대통령의 묘가 가장 크고 장엄하게 안치되어 있다. 이 중 두 명은 민족적 관점에서 볼 때 심각한 문제가 있는 독재자들이다. 해방 직후 제헌국회가 설정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강제 해체하고 친일파세력을 기반으로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수립하였던 1~3대 대통령 이승만과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던 일본국 중위 출신인 '다카기 마사오', 즉 5~9대 대통령 박정희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북의 애국열사는 여기에 없고 여기 애국 영령은 북에 없다. 남과 북에서 애국의 의미가 다른가? 필자의 부친 묘도 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있는데 비문에는 출생과 항일투쟁의 근거지인 평양이 어떻게 서울로 둔갑돼 있다. 단순 행정착오일까?

고대하던 조카들을 만났지만…

오후에는 고려호텔에서 상점을 구경했다. 우리는 기념될만한 토산품을 서너 개 샀다. 관광객들은 달러, 유로, 현지 화폐를 모두 사용할 수 있어 편리하다. 다만 상품을 사고 값을 지불하고 포장하는 절차가 거의 30분 정도 걸렸다.

저녁에는 고대하던 조카들을 만나게 됐다. 필자의 외사촌 (미국 로스앤젤레스 거주)의 조카들과 그 자식이고 보니 먼 친척이지만 만나서 기쁘다. 한성숙과 그 남동생 효철이와 딸 동해, 다른 조카 홍정금이 해외동포원호회 윤동하 참사와 평양지구책 백성일 참사의 주선으로 호텔에 오게 된 것이다.

▲ 김동수 교수 부부 (왼쪽에서 두 번째까지) 일행과 조카들 ⓒ김동수

다소 왜소하고 피곤해 보이지만 큰 웃음이 반가움을 대변한다. 필자가 몇 년 전에 한 국제교육 NGO를 통해 '평양과학기술대학' 방문차 평양에 잠시 왔었지만 이들과의 재회는 9년 만이다. 필자는 원호회의 배려에 감사를 표했다. 북에 와서도 친척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절차는 있다. 호텔에 돌아와서 허락을 받고 신분증을 호텔 카운터에 맡기고야 조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방에 들어온 조카들과 별로 은밀하게 할 이야기는 없었지만, 각 집 아이들 3명에게 주려고 준비해 온 학용품과 과자류와 용돈을 들려 보냈다.

남북 1000만 이산가족의 아픔은 아직도 남아있는 분단의 최대 고통이다. 1985년부터 어렵게 몇 번 상호방문의 기회가 있었으나 아직도 많은 이산가족들이 친척을 만나지 못하고 있고, 연로한 분들은 깊은 한을 안고 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민족의 혈통이 70년째 막혀 있는 셈이다. 누가 우리의 핏줄을 끊어 놓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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