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강신주와 오랜만에 전화 통화를 하던 중에 그가 툭 던진 말이다. 시인 김선우가 원효(617~686년)를 소설로 썼는데 "근사하다"는 것. 얼마 전에 나온 <발원(發願) : 요석 그리고 원효>(민음사 펴냄)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그러고 보니,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기자들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최근에 읽은 책으로 <발원>을 언급했다는 얘기도 생각이 났다.
메르스 사태로 핍진한 심신도 달랠 겸 그날 퇴근길에 <발원>을 폈다. 책을 보자마자 곧바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원효'가 아닌 '요석'을 먼저 내세운 부제에 눈길이 갔다. 그러고 보니, 로맨스 가운데 최고의 로맨스로 가공할 만한 이 둘의 사랑 이야기에 소설, 영화 또 드라마가 그간 시선을 두지 않았었다. '김선우가 선점을 했구나!'
소설을 읽으면서 또 다른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왜 지금 원효인가?' 입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는 시인의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와 실천에 호감이 있던 터였다. 이런 시인이 이 시점에 원효를 호출했으면, 거기에는 분명 중요한 이유가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시인은 <발원>을 통해서 지금 무슨 발언을 하고 싶은 것일까?
책을 덮고 나서는 시인 김선우의 변신에도 관심이 갔다. <발원> 이전에도 그는 몇 편의 소설을 펴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소설가가 아닌 시인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시인보다는 스토리텔러로서의 김선우의 모습이 또렷하다. 도대체 그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궁금증이 생기면 물어야 직성이 풀리는 게 기자다. 지난 16일 강남구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김선우를 만났다.
자유로워지는 사랑을 꿈꾼다
<발원>을 이끌어가는 두 축이 있다.
하나는 원효와 권력과의 갈등이고, 다른 하나는 원효와 요석의 사랑이다. 독자로서 원효와 요석의 사랑 이야기에 훨씬 눈길이 갔다. 사실 이 둘의 사랑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다. 원효는 요석과의 사랑을 통해서 '승려'라는 자신의 마지막 굴레를 벗어던지고 '소성(小姓)'으로 거듭남으로써 부처와 중생의 경계를 허문다.
요석 역시 마찬가지다. 권력자(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딸로서, 정략결혼을 비롯한 권력의 도구로 살아가던 그녀는 원효와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한 여성 '요석'의 삶을 찾는다. 그런 점에서 <발원>은 '구원으로서의 사랑'이라는 고전적인 소재를 김선우 식으로 변주한 사랑 이야기다.
- 원효의 삶을 요석과의 사랑을 통해서 재구성해보려고 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인류가 지향해야 할 몇 가지 가치들이 있습니다. 자유, 평등, 사랑 등. 그 중에서도 저는 사랑과 자유 이 두 가지 가치를 주목해요. 이 둘이야말로 인간의 행복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시간 수많은 문학 작품이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탐색해온 것도 이 때문이죠.
그래서 요석과 원효의 사랑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특히 제가 <발원>을 통해서 강조하고 싶은 대목은 사랑과 자유의 관계입니다. 자유가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을 통해서 자유로워지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죠. 원효와 요석이 바로 그랬죠.
그 둘은 바로 그 사랑을 통해서 각자를 옭아맸던 굴레(권력)로부터 자유로워졌어요. 이뿐만이 아니죠. 둘은 그렇다고 서로를 구속하지도 않았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았어요. 사랑을 하면서도 원효는 원효대로의 삶, 요석은 요석대로의 삶을 만들어 갑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야말로 자유로워지는 사랑의 한 본보기라고 생각했어요. 바로 제가 지향하는 행복한 삶이죠."
- 김선우 개인은 그런 사랑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항상 그런 사랑을 꿈꾸고 또 그런 사랑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소중한 인연을 만날 때마다 그 때 그 때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사랑하려고 노력해 왔어요. 그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웃음)
-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딴죽을 걸고 싶어요. 독자로서 불만이 있습니다. 원효와 요석의 사랑 이야기가 모자란 느낌이에요. 이 사랑의 필연성이 마음 깊이 와 닿지 않아요.
"정말요? 그럴 리가 없는데….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이런 반응은 처음입니다. (침묵) 강 기자, 감성이 너무 메마른 거예요! (웃음) 강 기자가 그렇게 읽었다니 좀 더 부연을 할게요. 요석과 원효의 사랑은 첫 눈에 반하는 그런 운명적인 사랑이 아니에요. 이 사랑은 두 사람이 적극적으로 만들어가는 사랑입니다."
- 특히 요석의 역할이 두드러지죠.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꼬시는 쪽도 요석이잖아요. (웃음)
"맞아요. 이 둘의 사랑을 주도하는 사람은 바로 요석이죠. 원효가 주저할 때마다 요석이 항상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어서 두 사람의 인연 더 나아가 사랑이 깊어지도록 이끕니다. 물론 마지막 반전의 주인공은 원효지만요. 바로 이렇게 사랑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면 둘 사이의 사랑의 필연성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텐데요."
원효와 요석은 정말로 사랑했을까?
실제로 감성이 메마른 터라서 반박할 도리가 없었다.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일연의 <삼국유사>의 원효 전기에는 요석이 이렇게 등장한다. 원효가 서라벌 저잣거리에서 이렇게 외친다.
"누가 네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수허몰가부(誰許沒柯斧)]? 나는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을 찍어 내리라[아작지천주(我斫支天柱)]!"
<삼국유사>에 따르면,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이 이야기를 듣고서 원효가 나라에 도움이 되는 위대한 인물을 낳고 싶다고 판단하고, 원효와 둘째 딸 요석을 이어준다. 도끼를 여성의 성기를 비유하는 상징으로, 여기에 기둥을 세우겠다는 얘기를 성관계를 원한다는 식으로 각색한 것이다. 이 스캔들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이두'를 만든 설총이다.
김선우는 <발원>에서 이런 일연의 해석을 비웃으며, 이 일화를 원효와 요석의 사랑이 꽃 피는 결정적 순간으로 비튼다.
- <삼국유사>의 원효와 요석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삼국유사>를 보면서 정말로 화가 났죠. '나의 원효'를 고작 씨를 퍼트리는 데 집착하는 한심한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렸잖아요.
사실 원효는 전혀 다른 의미로 그렇게 외친 거죠. 전통적으로 자루는 권력을 상징합니다. 그럼, '자루 없는 도끼'는 뭘까요? 바로 권력 없이 맨몸뚱이로 사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권력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 즉 기존의 질서를 찍어서 끊어버리고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는 불온한 생각을 표출한 것이죠.
김춘추 같은 당대의 권력자는 원효를 파계시켜서라도 그런 생각이 확산되는 걸 막고 싶었겠죠. <삼국유사>는 바로 그런 원효의 도발을 그들이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 그런 해석에 해제를 쓴 철학자 강신주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강신주는 해제에서 짓궂은 문제 제기를 합니다. '원효와 요석이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기는 했을까?', '더 나아가 실제로 육체적인 관계를 맺기는 했을까?' 강신주는 임신한 딸을 이용해 자신을 파계시키려는 김춘추의 의도를 알면서도, 원효가 요석과 그의 뱃속 아들을 포용하는 시늉을 했다고 설명하죠.
"강신주의 해석은 그대로, 김선우의 해석은 그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선뜻 강신주의 해석에 동의할 수 없어요. 강신주의 해석은 뭐랄까, 훨씬 더 중스럽죠. (웃음) 그런 해석대로라면, 원효는 시혜를 베푸는 대단한 성인이고 요석과 그의 아들은 그런 은혜를 받는 수혜자로 전락합니다.
요석과 원효의 관계가 그런 식이었을 리가 없습니다. 원효는 구도자로서 자신의 모든 명성을 버리고 또 당대 권력이 백성을 호도할 수단으로 전락하면서까지 요석을 뜨겁게 사랑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서 요석과 원효는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거고요. 바로 이런 해석이 훨씬 더 매력적이지 않나요?"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앞에서 잠깐 나왔듯이 원효는 신라의 권력과 끊임없이 충돌한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끝없는 전쟁에 중독된 정치권력, 그런 정치권력을 뒷받침하는 황룡사로 대표되는 종교권력, 그리고 이 와중에 전쟁터에서 죽고 또 끼니를 연명하기도 어려워 아들딸을 몇 푼짜리 노예로 내놓을 수밖에 없는 힘없는 서민들. 이들 사이에서 원효는 '국가의 역할'을 묻는다.
- <발원>의 곳곳은 현실과 겹치는 일화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소녀 단이의 죽음에 서라벌 백성이 저항하는 모습이 그렇죠. 이렇듯 원효와 권력의 갈등을 통해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있었습니까?
"<불교신문>에서 처음 연재를 했던 시점이 2012년 봄부터 2013년 봄까지였어요. 그러니까 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상황에서, 새롭게 들어선 정부를 놓고서 얼마나 더 안 좋아질지 가늠할 수도 없는 때였습니다. 그렇게 1년 연재를 하고 나서 고치고 또 고쳤어요.
그러다 2014년 봄에 세월호 참사를 겪었습니다. 이 소설의 퇴고에 더욱더 집요하게 매달렸어요. 이 소설을 통해서 묻고 싶었습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 먼저 선덕여왕 얘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발원>에는 비담, 야신, 김춘추 같은 전형적인 '나쁜' 권력자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같은 권력자이긴 합니다만, 굉장히 특별한 캐릭터입니다. 저자의 애정이 느껴질 정도로요.
"선덕여왕 캐릭터를 만드는데 굉장히 공을 들였어요. 그는 정말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권력자죠. 한 편으로는 원효에게 공감하고 어떻게든 그를 도와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를 이용하죠. 끝없는 전쟁에 환멸을 느끼지만, 결코 전쟁을 멈추지 못합니다. 권력 투쟁에 진절머리를 내지만, 결국에는 비담 등의 상대편을 숙청하죠."
- 바로 그런 선덕여왕 캐릭터를 통해서 <발원>은 통상적인 '좋은 국가'/'나쁜 국가' 같은 접근을 넘어섭니다. 억압 기구로서 국가의 본질 그 자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죠.
"그 동안 역사에서 호출된 인물을 보세요. 이순신? 충분히 매력적인 인물이죠. 하지만 그는 결국 '구국의 영웅'으로 표상됩니다. 정도전은 어떤가요? 그도 결국 '조선을 만든 영웅'으로 복원되잖아요. 그렇게 국가를 항상 중심에 놓는 방식에 원효와 요석을 통해서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발원>을 통해서 제가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국가의 역할을 묻지만, 그것이 좋은 권력자를 옹립하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되고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죠. 정치권력과 자본 권력이 좌지우지하는 오늘날의 국가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런 국가를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 것인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그리고 세월호 참사를 거치면서 우리는 비로소 이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단순히 감정의 배출이 아니라 진짜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바로 요석과 원효의 이야기가 그런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하길 바랐어요."
국가 없는 새로운 정치
조국, 충, 용맹, 임전무퇴. 이 모든 관념은 한 줌 지배 귀족의 권력 욕망에 소모되는 가여운 희생을 낳을 뿐이다. 헛된 망상을 조장할 뿐이다. 어떤 것도 생명 앞에서는 모두 삿되다. 나는 있는 그대로 보겠다. 있는 그대로 고통의 실상과 대면하겠다. 신라는 보이지 않으나, 저 소년은 보인다. 신라의 맥박은 뛰지 않으나, 저 소년의 맥박은 뛰고 있다. 내게 조국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경계 지어 놓은 삿된 국경보다 더 큰 조국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새로운 조국을 찾아낼 것이다. 조국의 이름으로 살생하지 않아도 되는 조국을. (115쪽)
국가 없는 새로운 정치. 원효는 끊임없이 모든 사람이 부처로 존중받는 불국토를 꿈꾼다. 하지만 그를 막아서는 것은 권력만이 아니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신라의 보통 사람은 끊임없이 원효를 배신한다. 나중에는 육욕에 눈이 먼 파계승 원효에게 돌까지 던진다. 역사의 맨얼굴이다.
- 원효와 민중과의 긴장 관계도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바로 그런 당대의 리얼리티(현실성)를 잃지 않으려고 소설 연재를 시작한 시점부터 퇴고를 끝내는 시점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시민이든, 민중이든, 다중이든, 대중이든 현실의 보통 사람의 모습이 바로 그렇잖아요? 때로는 변화에 앞장서다가도 때로는 지독히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고요.
권력도 마찬가지죠. 비담이나 야신 같은 굉장히 극악스러운 모습의 권력도 있는 반면에, 선덕여왕처럼 선한 모습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도 있습니다. 또 보수 기득권층이라고 해서 다 나쁜 사람만 있는 건 아니죠. 김준후나 보현처럼 정말로 선한 의지를 가진 보수도 있죠. 이런 현실의 복합적인 모습을 소설 속에 투영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발원>을 읽은 독자들이 단순히 옛이야기를 읽고 책을 덮는 게 아니라, 당대의 현실을 이해하고 또 사색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죠. 아마도 그럴 거라 믿습니다."
시인 김선우가 아닌 '작가' 김선우
- 강신주도 '해제'에서 지적했습니다만, 읽다 보면 마치 영화나 드라마를 위한 스토리텔링이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예요. 곧바로 영상으로 옮겨도 무리가 없어 보이기도 하고요. 혹시 의도한 건가요?
"그럼요. 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영화나 드라마를 의식했다는 게 아니라 스토리텔링에 정말로 공을 많이 들였다는 얘기예요. 이전에는 소설을 쓰더라도 시인 김선우의 정체성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 소설을 쓸 때는 정말로 독자의 입장에서 최대한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려고 정말로 노력했어요.
가능한 한 많은 독자들이 요석과 원효의 사랑과 그들의 고뇌에 감정이입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어요. 장면마다 영화나 드라마가 연상이 되는 것도 그 때문이죠. 결과적으로 만족스럽습니다. <발원> 이후에 자신감도 붙었어요. 이제 시인 김선우에서 소설가 즉 이야기꾼 김선우로 언제든지 전환할 수 있어요. 시도 소설도 쓸 수 있는 작가, 글쟁이 김선우가 된 것이죠."
- 그럼, 작가 김선우에게 묻겠습니다. 시를 쓸 때와 소설을 쓸 때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시인의 정체성으로 글을 쓸 때는 표현의 욕망이 더 강해요. 나의 느낌, 나의 생각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합니다. <발원> 작업은 좀 달랐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와 어떻게 소통할지를 가장 중심에 놓고서 글을 썼어요. 예를 들어, <금강삼매경론>의 핵심을 이야기 속에 어떻게 녹여낼지를 고심한 것도 그 한 예고요.
- 원효의 사상은 어렵기로 유명합니다. 처음 원효를 소설로 쓴다고 했을 때 도법 스님이 한 번 재고를 요청한 데는 그런 이유도 있을 겁니다. <발원>과 함께 원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다른 책이 있을까요?
"<발원> 이 소설 하나면 충분해요." (웃음)
- 정말로요? (웃음)
그러니 <발원> 한 권이면 일단은 충분하다고 감히 말하는 거예요. 이 책 한 권이면 원효의 삶을 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이 어떤 고민과 실천 속에서 나온 것인지도 감을 잡을 수 있어요. <발원>을 통해서 원효를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 이후 집필 계획을 살짝 귀띔해 주실 수 있나요?
"원래는 시집 작업을 시작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발원>을 내고 나서, 또 먼저 읽은 여러분의 반응을 보면서 이 책이 좀 더 많은 이들과 만날 수 있도록 제가 직접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올해는 <발원>과 함께 원효와 요석이 좀 더 많은 독자를 만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당장 이 글을 읽는 독자부터 직접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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