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의 여자들>(현실문화, 2015년 3월 펴냄)을 읽기도 전부터 아우슈비츠에 대해서 몇 가지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 한밤에 기차에 올라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유대인만이 아니라는 것, 집시나 정치범이나 동성애자도 있었다는 것, 그들 중 대다수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 도착과 동시에 벌거벗겨지고 소지품을 빼앗겼다는 것, 그들의 소지품 가방엔 절대로 망각할 수 없는 주소가 아주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는 것, 뽑힌 금이빨은 금괴로 만들어졌다는 것, 천장에 샤워기가 달린 죽음의 가스실이 있었다는 것, 그 가스실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하늘을 뒤덮어서 수용소 근처에는 새조차 날지 못했다는 것,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굶고 추위에 노출되었고 죽도록 구타당했고 장시간 노예 노동을 했다는 것, 우월한 인종을 만들기 위한 생체 실험이 마취제도 없이 이루어졌다는 것, 독극물 주사가 있었다는 것, 쌍둥이들의 장기는 떼어내졌다는 것, 약자는 이내 선별되어 죽게 되었다는 것, 가스가 부족한 날은 산 채로 화형당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대변을 본 그릇에 식사를 배급 받았다는 것, 담요도 없는 널빤지 침대엔 쥐와 벼룩과 이가 득실댔다는 것, 석 달 동안 팬티를 갈아입지 못했다는 것. 더 많은 끔찍하고 잔혹한 이야기들을 대화의 소재로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한 어린 소년은 빵을 훔쳤다는 이유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그런데 그는 몇 날 며칠 동안 죽지 않고 밧줄에 그대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소년은 너무나 가벼워서 죽지도 못했다.
1943년 1월 24일 프랑스 각지에서 체포되어 31000번 기차에 올라탄 여성 230명에 관한 이야기인 <아우슈비츠의 여자들>에도 이 내용들이 모두 정확하게 들어 있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해도 이 사실들을 다시 글로 읽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여전히 고통스럽다. 고통에 관한 한 그 일을 겪은 사람에겐 적당한 '언어'란 없을 것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했던 곳에서 존엄성을 처절하게 지켜낸 그녀들
처음부터 프랑스 여성들은 서로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들은 끊임없이 자리를 바꿨기 때문에 아무도 차가운 바깥쪽에 오래 서 있지 않았다. 여자들은 서로를 꼭 부여잡았다. 만약 누군가가 특히 추워하면 그 사람을 대열의 안쪽에 밀어 넣었고 샤를로트의 시계를 사용해 15초마다 자리를 바꿨다.
먼저 도착한 여성들은 프랑스에서 기차를 타고 이곳으로 오는 신참 여성들의 숙소에 잠입해 그들에게 해야 할 일과 피해야 할 일에 관해 짧게 설명해주는 일이야말로 자신들이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말해주었다. 결코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피곤하다거나 아프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젊고 건강해보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서로서로 돌보는 일이라는 것을.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 그들이 계속해서 조직하고 적응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깨달았다. 명령에 너무 늦게 반응했다는 이유로 구타당하지 않기 위해 그들은 독일어를 비롯해 수용소에서 사용되는 조잡한 은어들을 필사적으로 익혔다. 친구들과 떨어져 있지 않고 함께 뭉쳐 서로가 서로를 보호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배웠다.
눈이나 얼음이 얼어붙은 시냇물로 얼굴을 씻거나 몸을 깨끗이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런 노력이 몸을 더 건강하게 만들어 줄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게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삶에서 단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친구들이 없다면 누구도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누더기를 두른 채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해골로 변해버린 여성들 사이에서 '말하는 신문'이 생겨났다. 바깥세상의 소식과 수용소 내의 정보뿐 아니라 심지어 시까지 담고 있는 이 신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 교사들은 문학과 역사에 관한 교실을 열었다. 수학자들은 모래 위에 수학 문제를 적었다. 토끼를 기르는 문제에서 난해한 철학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관해 토론하는 그룹이 생겨났다.
청결 유지, 경계하기, 유머 감각, 끈끈한 우애를 고수하는 것. 이 여성들 간의 우애는 그녀들이 예전에 알았던 그 어떤 것보다 더욱 강렬했다. 우애야말로 이들을 설명하는 단어이자 신조였다.
모두 살해될 예정이었던 폴란드 (생체 실험으로 불구가 된) 불구 소녀들의 구조는 32동 프랑스 여성들뿐 아니라 다른 여성들의 도움 덕에 가능했다. (…) 행정사무실에서 일하던 여성들은 몇 시간 동안 수용소의 전기가 나가도록 했고 그 때문에 점호가 늦춰졌다. 그 시간을 이용해 다른 여성들은 소녀들을 수용소 곳곳에 숨겨두었다. (…) 폴란드 소녀들은 모두 살아남았다.
연합군이 접근해옴에 따라 후에 나치 강제 수용소로 불리게 될 이곳에 대해 기록해두려는 강렬한 욕망들이 생겨났다. (…) 여성들은 오줌을 이용해 편지의 행간에 비밀문서를 적었는데 따뜻한 다리미로 다리면 숨겨진 글자가 보였다.
두 팔에 각각 아이를 끌고 가던 젊은 여성을 본 SS 대원은 그녀를 줄에서 휙 잡아끌어 총으로 쏴버렸다. 다른 여성들은 아무 말 없이 남은 두 아이의 손을 잡아끌고 계속 걸어갔다.
<아우슈비츠의 여자들>에는 지금 인용한 것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작은 행동들이 나온다. 붉은 연필 가루를 반죽해서 병자들의 회색 얼굴이 생기 있어 보이게 해 죽음을 피하게 도와주기도 하고, 작업 공정에서 눈치 안 채게 나사를 느슨하게 조이기도 하고 약자를 숲에 숨겨뒀다가 다시 안거나 부축해서 데리고 돌아오기도 한다. 이런 행동을 한 그녀들은 특별한 영웅이 아니었다. 농부의 아내, 노동자, 카페 여주인, 미용사, 인쇄공, 호텔 메이드, 레지스탕스, 공산당원, 의사, 과학자였던 평범하고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그녀들의 실천은 아주 구체적이고 자발적이었고 현실적이었다. 누군가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 그것은 그녀에게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 아는 것과 같았다. 누군가 재능이 있다는 것, 그것은 나누는 것이었다. 그녀들이 택한 일상과 삶의 방식은 우정이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적응하는 것, 체념하지 않는 것, 무감각하지 않은 것, 씻고 먹는 것, 친밀감을 느끼는 것. 하나하나가 다 모여서 전체적인 개개인의 통일성을 이루었다.
[프레시안 북스 지난 호 바로 가기]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 강제된 침묵…다시, 인간을 묻는다
이 책을 아주 길게 인용한 이유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이런 이야기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이다. 살아 돌아온 그녀들도 궁금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 돌아왔지?' 그래서 훗날 만날 때마다 그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의 결론은 늘 우정으로 끝났다. 그런데 그 우정은 아주 특별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 뿐만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고상해질 수 있는지도 함께 이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증언 과정에서도 일관되게 '우리'라는 말을 사용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나도 친밀감을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노력할 필요도 없었고 억제할 필요도 없었고 서로 예의를 차릴 필요도 없었다. 우리 사이에서 우리는 우리였다."
'우리는 우리였다'는 말은 책에 나오는 다른 말로 옮겨보자면 '깊은 기억'이다(평범한 기억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사실의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에서, 내면 깊은 감정과 관련 있다는 점에서). 우정 때문에 삶이 죽음을 이겼고 인간으로 남을 수 있었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고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누군가 만약 수용소는 이제 끝났다고 말한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것이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것, 즉 '서로 돕는 것(상호 부조든 상호 협력이든), 우정, 사랑'들을 지금 우리는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혹시 여전히 딱지를 붙이고 분류해서 수용소에 가둬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서로 돕는다는 것의 느낌을 우리는 너무 많이 상실해 버리지 않았는가?
둘째, 생존자들이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녀들이 직면한 문제 중 가장 중요했던 것 중 하나는 '그런데, 이 책임을 누구에게 묻지?'였다.
4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프레모 레비가 말한 '회색 지대'의 애매함 속에서 희생자와 가해자 사이에 놓여 있었는가? 누가 처벌받아야 하는가? 독일군의 명령을 수행했던, 반유대인 법령을 실제로 시행하고 용의자들을 체포하고 고문한 뒤 나치에게 넘겼던 프랑스 경찰인가? 법정에서 레지스탕스에게 사형을 언도했던 프랑스 판사들인가? 억류자들을 수용소로 이송했던 프랑스 철도청의 프랑스인 운전수들인가? (…) 70만 명의 공무원들도 처벌해야 할까? (…) 종전을 목전에 둔 때에야 레지스탕스 편으로 넘어간 기회주의자들은 또 어떤가? 휴전 협정이라는 용어에 굴복해 점령군에 대해 과하게 '올바른 태도'를 취했던 수백만 프랑스 남녀는 또 어떤가?
그런데 우리도 아주 많은 부분에서 회색 지대에 있는 것은 아닌가? 죄책감과 책임감, 기억과 망각, 순종과 저항, 이기적인 생존 욕구와 우정, 홀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느낌과 홀로이고 싶지 않다는 느낌, 행동의 무의미와 의미, 체념과 희망, 비겁함과 용기, 환멸감과 숭고함 사이의 그 어딘가 회색 지대에서 떠돌고 있지 않은가?
살아 돌아오지 못한 그녀들이 가족에게 보낸 마지막 말 중에는 "기다려", "돌아올게" 같은 말들이 있다. 우리 세월호 아이가 가족에게 보낸 마지막 문자에도 "살아 돌아올게요. 기다려요"가 있었다. 겹쳐서 생각이 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들은 수용소에서 수도 없이 생각했다. '만약 내가 돌아간다면.' 다시 겹쳐서 질문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우리 아이들이 돌아온다면.' 그녀들도 이제 그만 잊으라는 말을 들었고 침묵 속에 잠기길 강요당했다.
그래서 아우슈비츠에서 여성들의 행동이 더 이상 주변부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
인간은 서로 돕는다. 아주 구체적으로 돕는다. 성공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그렇게 서로서로 '우리는 우리다'가 되어간다. 그렇게 온전한 인간으로 남는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 사회가 도덕적으로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 환멸감에 대해서는 이제는 꽤 많이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환멸감 때문에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방관자가 될 수도 있고 그 덕에 현명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주 약하지 않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환멸감을 적어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기회, 현실에 안주할 기회, 무엇인가 해보려는 타인을 조롱할 기회로 삼지 않을 수 있어야만 한다. 환멸감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가? 인간은 최악의 순간에도 다른 인간의 안위와 행복에 관심이 있다. 삶 자체를, 따뜻한 수프나 소시지가 있고 커피와 꽃이 있는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누릴 수 있는 한 누리고 싶어 한다. 가진 재능을 나눌 수 있는 한 나누고 싶어 한다. 평범했던 그녀들의 행동은 인간성의 가장 고귀한 증거다. 우정이 있어서 우리는 우리고 나는 나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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