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1970년대 문학예술 속의 추한 미국
3. 1970년대 소설 속의 미국
막걸리 한 잔 마시면서 세상 살기 어렵다는 푸념을 해도 어디론가 끌려갔던 1970년대의 암울한 유신체제 아래서는 미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소설조차 발표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터에 재미있으면서 문학성도 뛰어난 기지촌 소설 한 편이 발표되었다. <한국문학> 1974년 8월호에 실린 천승세의 <황구의 비명>. 20쪽 분량도 되지 않는 단편소설로 1975년 만해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한국과 미국 사이의 불균형적 관계를 쉽고 재미있게 비유하며 반외세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게 일품이랄까. 다음과 같은 줄거리다.
주인공은 돈놀이하는 아내의 성화로 양색시에게 빚 받으러 기지촌으로 향한다. 첫째, 미군에게 몸을 팔고 있는 양색시를 기다리며 그녀의 방 앞에 놓인 신발 두 켤레를 보고 놀란다. "신발대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신발들은 너무나 잔인하게 크고 작았다. 기껏 한 뼘이 될까말까한 하얀 고무신 곁으로 두 뼘이 다 되는 워커가 묵중하게 놓여 있었다". 이러한 "엄청난 부조화"에 "너무나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둘째, 거구의 미군과 왜소한 양색시가 방 밖으로 나와 키스하는 모습에 충격 받는다. "항공모함 옆에 붙은 소해정처럼 한 쌍은 길고 짧은 그림자를 늘이우고 서 있었다. 흑인병사가 잔뜩 허리를 구부려 여자의 입술을 빨아댔다". 이렇게 "또 한 번 엄청난 부조화" 역시 불평등한 한미관계에 불편함을 느낀다.
셋째, 양색시에게 빚을 받기는커녕 적지 않은 돈을 건네주며 기지촌을 떠나라고 설득하는 중에 들판에서 한 쌍의 개가 교미하는 모습에 충격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수캐는 어마어마한 체구를 자랑하며 암캐의 엉덩이 위로 댕겅 몸을 실었고, 수캐에 비해 너무나 볼품없는 조그만 암캐는 그때마다 중량을 감당하지 못해 풀썩 뒷다리를 꺾고 주저앉는 것이었다. (…) 암캐는 복날이 서러운 조그만 재래종 황구(누런개)였다. 황구는 기구한 여인처럼 사력을 다해 순종하고 있었으나 수캐의 폭력은 절정의 극이었다. 수캐는 (…) 큰 입을 벌려 황구의 목덜미를 덥석 물었다 놓았다 하며 장군처럼 질겼고, 황구는 그때마다 닳아빠진 빗자루 같은 꼬리를 하늘 높이 쳐들고 뒷다리를 불끈 세워보는 것이었다. 고막이 따가울 정도로 앙칼진 황구의 비명이 터졌다.(…) 수캐는 황구의 불끈 들린 뒷다리를 끌고 있었다. 황구는 진창 바닥에다 턱을 끌며 그 요란스럽고 처절한 비명을 내뱉고 있는 것이었다. 황구는 죽어가는 듯 싶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황구여! 꼬리를 내려라! 제발!"이라 외치고, 그 처절한 모습에 양색시는 서럽게 울기 시작한다. 그가 그녀에게 "황구는 황구끼리…."라고 내뱉자 그녀는 미군 부대 기지촌을 떠날 것을 결심한다.
이 작품에 대해, 문학평론가 황광수는 강자와 약자의 관계에서 약자는 불가피하게 강자의 횡포에 빠져들 수밖에 없기에, 그러한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관계를 거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다.
참고로, 임희섭은 1976년 5월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실시한 한미관계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한미관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초래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인은 미국에 의한 한반도 분단과 미국에 대한 한국의 과도한 의존이었다. 세 번째 요인은 미국의 물질적이고 퇴폐적인 문화에 의해 한국의 전통문화가 파괴되는 것이었다.
송영의 1974년 단편 <원주민>과 홍성원이 1970~75년 발표한 장편 <6.25>에서는 미국인들이 한국전쟁에서 한 역할에 대해 한국인들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특히 홍성원은 한국전쟁을 미·소 초강대국 사이의 '놀이'또는 한국인들을 이용한 '대리전'으로 묘사한다. 한국의 한 언론인이 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한국은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자,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한국에서 피를 흘렸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면서 한국인들에 분노하는 모습도 이채롭다.
전상국은 1979년 <아베의 가족>을 통해 한 여인과 그녀 가족의 소름 끼치도록 비참한 생활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 임신부와 그녀의 시어머니는 한국전쟁 중 미군들에게 집단강간을 당한다. 시어머니는 수치스러움 때문에 두 번이나 목을 매달아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임신부는 낙태를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쓸모없고 더러운 동물"처럼 생긴 극단적인 기형아 '아베'를 낳는다. 그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한 뒤 여인의 딸 역시 일단의 미국인들에게 집단강간을 당한다.
이렇듯 기구한 운명의 여인은 "짐승 같은 미국인들"에 대한 "불타는 증오와 복수심"만을 지니고 살아간다. 1979년 한국문학작가상과 1980년 대한민국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니 문학성도 뛰어난 듯하다.
반미감정을 불어넣기 위해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꾸민 소설이 아닌가 의심할 수 있겠지만 어느 정도 실화에 바탕을 둔 작품이다. 오연호가 1990년 펴낸 <발로 찾은 주한미군범죄 45년사 : 더 이상 우리를 슬프게 하지 말라>에 따르면, 1967년 미군들이 훈련 도중 충남 서천의 민가를 지나가다 잠자던 어머니와 딸을 한꺼번에 강간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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