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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려잡았는데, 간첩 아니면 책임질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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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려잡았는데, 간첩 아니면 책임질 겁니까?"

[다시 '국가폭력'을 말하다] '귀순용사' 김관섭은 왜 피켓을 들었나 <2>

고문이 끝났다. 김관섭 씨가 간첩이 아니라는 결론은 언제 내려졌던 걸까. 포대자루를 벗은 김 씨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던 순간? 중앙정보부 신문관들이 푸근한 분위기에서 족발과 소주를 권하던 때? 아니면, 김 씨가 중앙정보부에 들어오던 첫 날? (지난 회 기사 보기)

간첩 아닌 것 같다면서도 고문했다면?

고통스런 질문이다. 김 씨가 귀순자라는 쪽으로 결론이 나 있는데도, 고문이 그치지 않았다면, 그 고문은 대체 무얼 위한 건가. 김관섭 씨의 말이다.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때려잡았다. 그래서 간첩이 맞으면 상을 받는다. 그건 좋다. 그렇다면, 반대 경우엔 책임이 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 때려잡았는데, 간첩이 아니면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다. 간첩이 맞으면 좋고, 아니어도 책임질 일이 없고, 이런 경우가 어디 있나."

1974년 8월 26일 강화도 해안가에 도착한 전직 북한군 중대장 김관섭 씨는 서울 신길동 대성공사에서 하룻밤 고문을 받고, 남산 중앙정보부로 옮겨져 45일 간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대성공사로 이송돼 고문을 받았다. 대성공사 특수독방에서 사흘을 보내고, 포대자루를 뒤집어 쓴 채 차로 한참 돌아다니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뒤부터는 고문이 없었다. 김 씨를 담당한 신문관은 왜 욕을 하지 않고 만세를 외치느냐고 캐물었지만, 사실상 김 씨가 간첩이라는 의심은 풀린 상태였다. 그때가 1974년 11월이었다. (☞관련 기사 : "'자유 대한'이 나를 고문했다")

"신문관들이 북한을 몰랐다진급에 눈 멀어 때려잡기만"

이듬해, 김 씨는 목에 화환을 걸고 귀순용사 환영행사를 했다. 간첩이 아니라고 판명됐으니, 김 씨는 자유를 얻었을까. 그건 아니다. 김 씨는 1978년 3월까지 대성공사에 갇혀 있었다. 만 3년 반 동안, 대성공사에서 지낸 셈이다.

왜 이렇게 오래 갇혀 있어야 했을까. 김 씨도 모른다. 중앙정보부 인사 문제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추측만 할 뿐이다.

고문이 끝난 뒤엔 대성공사 생활도 할만 했다. 외출도 허용됐다. 신문관들과 외식도 종종 했다. 술도 마셨다. 윤락여성과 성관계도 했다.

당시 그가 주로 한 일은 북한군 정보 제공이었다. 500여 건쯤 넘겼다. 이 가운데 129건이 군 당국에 의해 고급정보로 채택됐다. 당시만 해도, 북한군 전방부대 지휘관이 남한으로 넘어온 사례가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남한 정보당국이 보유한 북한 정보는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 북한 군인들은 '승리' 담배를 피웠다. 남한 군인들이 피우는 '청자' 담배보다 맛이 좋았다. 그런데 나를 고문한 신문관들은 북한 담배 이름도 몰랐다. 한마디로 '전문성'이 없었다. 진급에 눈이 멀어서 그냥 때려잡기만 한 거다."

"다른 귀순자들을 회유했다"

다른 '귀순자'들을 회유하는 일도 당시 그가 한 일이다. 자발적으로 남한에 왔지만, 북한 정보 제공에는 소극적인 이들이 있었다. 그들을 설득해서 정보를 내놓게끔 하는 일을 김 씨가 했다. '귀순' 이후, 다시 북한으로 가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마음을 되돌리는 일도 했다. 이런 일들이 김 씨는 보람 있었다고 한다. 그를 고문했던 신문관들은, 대성공사에서 지낸 나머지 기간 동안 김 씨의 동료가 됐다. 장교 출신인 김 씨는 서류 작성에 익숙했다. 바쁠 때면, 신문관들이 할 일을 대신해주기도 했다. 서류 업무를 그들보다 더 잘한다는 자부심을 느끼는 기회이기도 했다.

신문관들에게 김 씨가 느끼는 감정은 양가적이다. 분명히, 친밀감도 있다. 폭력 가해자가 태도를 바꾸면, 오히려 피해자가 호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비슷한 해석이 가능하다. 지옥의 시간, 소소한 친절을 베풀었던 신문관이나 헌병에 대해서도 고마운 기억이 있다. 따지고 보면, 그들 역시 가해자 그룹이다. 그런데도 고맙다.

김 씨는 대성공사에서 나온 뒤에도 신문관들의 경조사를 꾸준히 챙겼다. 정보 당국은 신문관과 귀순자가 함께하는 모임을 꾸리도록 지원했다. 김 씨도 모임에 참석했다. 어찌됐든, 남한에서 맺은 가장 오래된 인간관계다. 그를 혹독하게 고문했던 한 신문관의 모친 상가에 갔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여럿 눈에 띄었는데, 오래 앉아있기가 불편했다. "먼저 일어납니다." 상주였던 신문관이 한참 따라 나와서 배웅했다. 김 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게다.

40년 지나서야 고문 공론화 하는 이유

고문의 기억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함께 웃고 밥 먹고 술 마신 세월로도 씻을 수 없는 분노가 있다. 그러나 김 씨는 나이 여든을 넘기고서야 과거 고문 사실을 공론화할 결심을 했다. 죽을 날이 머지않아서, 무서울 게 없어지고서야 가능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한 세월이 40여 년이다. 그를 고문한 신문관들을 고소할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그때마다 참았다. "혹시 모를 역효과와 보복 가능성까지 생각하다보니 40년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권력은 자유가 그립다며 찾아온 적성국가 군인을 때리고 달래서 길들이는데 성공했다. 속에 쌓인 분노를 그저 삭이기만 하도록 길들여진 그를, 대한민국 정부는 어떻게 쓰다가 버렸나. 다음 편에서 그 이야기를 다룬다.


▲김관섭 씨. ⓒ프레시안(서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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