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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대한'이 나를 고문했다"

[다시 '국가폭력'을 말하다] '귀순용사' 김관섭은 왜 피켓을 들었나 <1>

그는 반공교육 강사였다. "자유대한의 품에 안겨 행복합니다." 30년 넘게 외쳤다. 지금도 보수단체 소속이다.

'자유 수호'를 입에 달고 다니던 그는, 고문 피해자다. '자유 대한'이 그를 고문했다. 41년 전 고문 후유증이 아직도 괴롭힌다. 하지만, 그는 고문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분단체제에선 인권보다 안보가 중요하니까. 그렇게 믿고,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남한과 북한이 서로 간첩을 보낸다. 간첩을 잡으려면 어쩔 수 없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간첩인가 해서 고문했는데, 아니었다면? "사과해야 한다.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

'독거노인' 된 '귀순용사'"나는 고문당했다"

하지만 그를 혹독하게 고문했던 '자유 대한'은 41년이 지난 지금도 아무런 사과가 없다. 그 사이, 그를 고문했던 신문관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때리고, 잠을 재우지 않고, 고춧가루 탄 물을 코에 들이붓던 이들도 집에선 아빠였다. 그들 역시 자식들이 결혼할 때면 청첩장을 돌렸다. 고문 후유증이 여전한 다리로, 결혼식장에 찾아가 축의금을 냈다. '자유 대한'에서 살아가려면,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자유 대한'에서 처음 알게 된 사람이 그들이었으니까.

올해 81살이 되는 '귀순 용사' 김관섭 씨의 사연이다. 그는 원래 북한군 전방 부대 중대장이었다. 남한이 보낸 북파 공작원도 여럿 잡아낸 유능한 장교였다고 한다. 그가 남한 사람이 된 건 1974년 8월 26일 아침이다. 전날 밤 북한을 출발해서 7시간 수영 끝에 강화도 해안가에 도착했다. 열하루 전, 재일 한국인 문세광이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를 저격했다. 살벌한 시국이었다.

그날 이후 김 씨가 한국에서 살아온 시간을 소개한다. 폭력적인 가부장을 닮은 국가권력이 제 발로 찾아온 적대국 사람을 어떻게 때리고 달래서 길들이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김 씨는 81살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 정정했다. 기억도 멀쩡했고, 말에 조리가 있었으며, 농담도 곧잘 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살아갈 날이 길지 않다는 걸, 총기가 흐려질 날이 머지않았다는 걸. <프레시안>은 경기도 안산에서 가족 없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살아가는 그를 여러 차례 만났다. 그의 머리가 녹슬기 전에, 그의 기억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 일부 '귀순용사'에게 행해졌던 고문 사실을 밝혀주길 요구하는 김관섭 씨. ⓒ김관섭

곳곳에 간첩 신고 포스터"북에서 왔습니다"
41년 전 그날 밤, 썰물이 빠지는 방향을 믿었다. 권총 한 자루를 쥐고 고무 튜브에 몸을 실었다. 남으로 향하는 해류가 그를 내려놓은 곳은 경기도 강화군 양사면 교산2리 해안가.

아무도 없었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서 걸어 나왔다. 이른 아침, 멀리 논두렁에서 참새를 쫓는 노인이 보였다. 소리쳤다. "나는 북조선에서 온 사람입니다. 지서가 어딥니까?"

노인의 뒤를 따라가던 중, 다른 농민 조 모 씨를 만났다.
"북에서 온 사람이래!"

총알을 뺀 권총을 조 씨에게 맡기고, 조 씨의 집으로 갔다. 김 씨는 젖은 속옷 한 벌만 걸친 채였다. 그 사이, 마을 주민들이 조 씨의 집으로 모였다. 동네 아낙들이 보는 앞에서, 홀딱 벗었다. 조 씨가 건넨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부끄럽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얼마 뒤, 순경이 총을 겨누며 들어왔다. 그들을 따라 경찰서로 갔고, 그리 찾아온 군인을 따라 서울로 갔다.

훗날 알았다. 그가 처음 봤던 노인이 그를 간첩으로 신고했다는 걸. 간첩 신고 포상금이 적힌 포스터가 전국 곳곳에 붙어 있던 시절이다. 노인은 자신이 김 씨를 발견했다고 경찰에 이야기했다고 한다.

"오늘, 김 선생은 고문을 받습니다"

김 씨를 태운 차량이 멈춘 곳은 서울 신길동 대성공사. 국군 정보사령부가 운영하는 기관이었다. 거기서 샤워를 하고 양치질을 했다. 향긋한 치약 냄새가 인상적이었다. 당시, 북한에선 치약이 귀했다. 대신 치분을 썼다.

점심 식사 뒤, 신문을 받았다. '귀순 동기'를 한참 동안 설명하고, 대성공사 안에 있는 숙소에서 잠이 들었다. 오랜 긴장 속에서 피로가 쌓인 상태였다.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권 모 신문관이 찾아왔다. 책을 두 권 건넸다. <나는 공작원이었다>, <나는 여간첩이었다>.

'왜 이런 책을 보라는 걸까.' 영문을 모른 채 책을 듬성듬성 읽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974년 8월 28일 아침. 권 신문관이 다시 찾아왔다.

"오늘, 김 선생은 고문을 받습니다."

그날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포승줄로 상반신을 묶은 뒤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입과 콧구멍에 수건을 덮고 고춧가루 탄 물을 주전자로 들이부었다.

"너, 문세광 사건 알지? 너, 남한에 왜 왔어?"

그제야 전날 받은 책의 용도를 알 수 있었다. 책 내용은 일종의 모범 답안이었다. 그대로 대답하라는 것.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고문을 당하리라.

결국 허위 자백을 했다. "박정희 암살하려 왔습니다."

중앙정보부에서 보낸 45일

고문이 끝났다. 화장실에서 오줌을 누는데, 고춧가루 냄새가 확 끼쳤다. 29일 오전, 김 씨가 늘어져 있던 독방 문이 열렸다. 밤새 그를 고문했던 신문관들이었다. 중앙정보부 소속이던 그들이 김 씨를 끌어내 차에 태웠다. 차가 나가는데, 문 앞에서 누가 가로막았다. 대성공사 간부였다. 대성공사는 국군 정보사령부 소속이다. 따라서 김 씨는 정보사령관의 허락을 받아야 나갈 수 있다는 거였다. 중앙정보부 신문관들은 뿌리치고 그냥 나갔다.

남산 중앙정보부에서도, 독방에서 지냈다. 도착 첫날, 한 간부가 찾아왔다. 남한에 와서 처음 듣는 친절한 목소리였다.

"정말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러 왔나?"

털썩 무릎을 꿇었다. 펑펑 울었다. "어젯밤에 너무 무서워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저는 귀순하러 왔습니다."

간부는 말없이 나갔다. 그리고 다시 고문이 시작됐다. 약 45일 간, 중앙정보부 독방에서 별의별 고문을 다 받았다. 우선, 잠을 재우지 않았다. 자리에 누우면, 눈 가까이에 백열등을 밝혔다. 빛과 열 때문에 눈을 감아도 잠을 잘 수 없었다. 간질이는 게 고문의 한 방식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자리에 눕혀놓고, 온몸을 간질인다. 그게 지속되면,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댄다. 더 이어지면, 비명이 터지고 통곡을 한다. 그 고통은 겪어본 사람만 안다.

'박 대통령 죽이러 왔느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하면 때리고, 그렇다고 하면 멈췄다. 그러니까, 김 씨는 고문당할 때는 '박정희 죽이러 왔다'고 하고, 고문이 멈추면 '실은 귀순하러 왔다. 아까는 무서워서 그렇게 말했다'고 답하기를 반복했다. 그를 부축해서 화장실로 데려가던 헌병이 속삭였다. "오락가락 대답하면 안 돼요. 솔직하게 말하세요."

어느 날, 다른 신문조가 들어왔다. 분위기가 편안했다. 족발에 소주도 곁들여졌다.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더는 고문이 없었다. 김 씨는 중앙정보부에서 나왔다.

자살 시도를 감추다

다시 대성공사로 이송됐다. 거기서 그를 처음 고문했던 신문관들이 나타났다. "여기서 전에 신문받을 때, 고춧가루 냄새는 안 났었지?" 목소리가 딱딱했다. 고춧가루 탄 물로 고문당했던 사실을 부인하라는 압력이었다. 오줌에서 풍기던 고춧가루 냄새를 어찌 잊겠는가. 하지만, 또 고문을 당할까 겁이 났다. "생각이 잘 안 납니다."

그래도 고문 받았다. 이번엔 다른 신문관이었다. 대성공사 소속과 중앙정보 소속이 함께 고문했다. 그들은 김 씨에게 소주를 억지로 먹여서 취하게 한 뒤, 마구 때렸다.

계절이 바뀌었다. 눈이 오던 어느 날, 김 씨는 특수독방으로 옮겨졌다. 콘크리트 맨바닥이었다. 이불도 없었다. 식사도 없었다. 그렇게 이틀을 굶고 나서, 김 씨는 자살을 결심했다. 속옷을 찢어 끈을 만들고 그걸로 목을 맸다. 자살에 실패했다. 겁이 덜컥 났다. 독방에서 자살을 시도한 게 들키면, 또 고문을 당할지 모른다. 허겁지겁 하수구에 끈을 감췄다. 사흘째 되던 날, 독방 문이 열렸다.

'대한민국 만세' 외쳤더니

헌병이 어디론가 데려갔다. 그때, 그에게 친절하게 대해줬던 다른 헌병이 해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죽기 전에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세요. 그래야 삽니다."

도착한 곳은 식당. 한상 가득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오늘이 김관섭이의 마지막 날이다. 준비해라."

식사가 끝나자 헌병들이 옷을 벗기고 몸을 묶었다. 그리고 포대자루가 씌워진 채, 차에 태워졌다. 몇 시간이나 돌아다녔을까. 어디선가 차가 멈췄다. 포대자루가 벗겨졌다. 차 안에서 목청껏 외쳤다. '대한민국 만세'

방으로 끌려갔다. "너 이 새끼, 간첩 맞지. 진짜 귀순자면 그렇게 맞았는데 '대한민국 만세'라는 말이 나오겠어. '대한민국 개새끼'라고 할 거 아냐."


▲김관섭 씨.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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