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이코노미 21>, <월간 말>, <미디어오늘>을 거치며 오랜 기간 삼성을 추적해 온 이정환 <미디어오늘> 전 편집국장(현 경제부장)이 흥미진진한 책을 펴냈습니다. 책 제목은 <한국의 경제학자들>(생각정원, 2014년 10월 펴냄). 지난 10여 년간 재벌 개혁 논쟁에 참여한 다수 학자들의 다양한 주장을 소개하고 자신의 생각을 담았습니다.
저자가 책 서두에 썼듯이 한국의 재벌 개혁 논쟁은 지켜보는 이에게 "지적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합니다. 한쪽에서 창을 던지면 다른 쪽에서 방패로 막아서는데, 그 창의 예리함과 방패의 견고함이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물론 치열한 논쟁은 당사자들에게 상처를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고주의와 기회주의에 찌들어 논쟁을 기피하고 슬슬 눈치나 보며 부와 권력을 누리는 대다수 학자들에 비해 이들은 분명 좋은 학자들입니다.
저자가 장하준의 사회적 대타협론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
그가 이 책에서 중간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은 파트별 제목에서도 일부 드러나는데요. 그는 자신의 책을 10개의 파트로 나누고 이 중 9개 파트에 'OOO의 삼성 사용 설명서'라는 부제를 붙였습니다. '사용 설명서'라는 용어가 흥미로운데요. 장하성 교수와 같이 공격적으로 재벌 개혁을 지향하는 학자들은 '삼성 사용'이라는 용어에 거부감이 있을 듯합니다. 장 교수는 아마도 글로벌 스탠더드를 확보하면 되지 '삼성 사용'까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느냐고 항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파트별 제목 몇 개만으로 저자가 장하성 교수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 장하준 교수의 주장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책 서두를 보면 저자가 장하준 교수의 주장과도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외국인 주주들의 압박에 시달리는 재벌을 내세워 주주 자본주의와 맞서게 만들자는 (장하준 교수의) 발상은 참신했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면 무망하고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삼성은 주주 자본주의와 맞서기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결탁했죠. 노동자들을 탄압하면서 주가를 끌어올렸고 주주들에게 두둑한 배당을 줬고요. 이건희 회장은 사회적 대타협보다는 정부 관료와 국회의원들을 각개 포섭하고 매수해 리스크를 줄이는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6∼7쪽)
또 저자는 스웨덴에서 재벌 총수 일가와 노동자 계급의 대타협으로 경영권을 인정해주는 대신 고용 창출과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합의를 끌어냈다는 장하준 교수 등의 주장이 상당 부분 왜곡되었다고 지적합니다. "한국 사회에 잘못 알려진 것과 달리 찰츠요바덴 협약의 쌍방 주체는 고용자연합회(SAF)와 노동조합총연맹(LO)이었고 이들을 협상 테이블에 불러 모은 건 사회민주당이었으며, 애초에 이 자리에서는 발렌베리 가문의 경영권 인정 등은 의제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56쪽)는 것입니다. 즉 경영권 인정해줄 테니 뭐 내놓아라, 이런 식의 대타협은 있지도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저자가 김상조의 소액 주주 운동에도 거리를 두는 까닭
김상조 교수의 재벌 개혁론에 대해 저자는 또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김상조 교수 하면 소액 주주 운동과 주주 행동주의가 떠오르는데요. 여기에서 주주 행동주의란 기관 투자자들이 상당한 지분을 장기간 보유하면서 경영진에 압력을 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운동에 대해서도 저자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소액 주주 운동에서 소액 주주들은 주체로 나서지 못했고 배당을 늘리라는 등의 요구로 주식시장의 큰손들, 기관 투자자들과 외국계 펀드들이 훨씬 더 큰 혜택을 봤던 게 사실"(79쪽)이라고 지적합니다.
김상조 교수도 소액 주주 운동이 실패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교수는 여전히 기관 투자자들이 경영진에 압력을 가하는 주주 행동주의에 대해서는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합니다.
재벌의 역할에 대한 논쟁, 김상조가 더 옳다
재벌 개혁을 둘러싼 장하준 교수와 김상조 교수의 충돌은 워낙 흥미롭기 때문에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일차적으로 재벌의 역할에 대해서 두 교수는 격렬하게 맞섭니다. 장하준 교수는 여전히 재벌이 고도성장의 견인차라고 주장합니다. 반면, 김상조 교수는 재벌로 경제력이 집중되는 것이 오히려 경제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이 대목에 대해서 저자는 특별한 코멘트를 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두 교수가 지나치게 자기주장만 앞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듭니다. 재벌의 역할에 대해서 장하준 교수는 문어발식 확장이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최근의 연예 기획사들처럼 성공한 부문에서 돈을 끌어다 취약한 부문에 투자하는 것이 나쁘냐는 것입니다. 반면, 김상조 교수는 대형 마트 등의 확산이 보여주듯이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이 서민 경제의 토대를 붕괴시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어느 쪽 주장이 옳은 것일까요? 완승과 완패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대목에서만큼은 장하준 교수 주장보다는 김상조 교수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재벌들은 과도할 정도로 문어발식 확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서민 경제를 매우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넣은 것도 사실입니다. 동반 성장, 그리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재벌들의 문어발식 확장은 상당 부분 제어되어야 합니다.
국가의 역할에 대한 논쟁, 장하준이 더 옳지만 보완이 필요하다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도 두 교수는 첨예하게 맞섭니다. 장하준 교수는 국가가 재벌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김상조 교수는 국가의 개입을 부정하고 시장 원리로 재벌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앞에서와 달리 이 대목에서 저는 김상조 교수 주장보다는 장하준 교수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고 봅니다. 시장 원리로 재벌을 통제한다? 소액 주주와 기관 투자자들의 힘으로 재벌을 통제한다? 현실성이 낮은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은 기업의 지배 구조가 개선되어야 주가가 오르기 때문에 소액 주주와 기관 투자자들이 적극적으로 재벌 통제에 나설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한 것인데요. 과연 그럴까요? 소액 주주와 기관 투자자들은 오히려 재벌들이 근로자들을 더 많이 잘라서 기업 가치를 높이고 주가를 올리기를 원할 겁니다. 저자도 이 대목에서 필자와 유사한 생각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관건은 국가의 성격인데요. 김상조 교수는 국가를 관료들의 이해를 반영하는 도구로 인식하는 듯합니다. 반면, 장하준 교수는 유럽식으로 다양한 국민들의 이익이 충분히 반영하는 국가를 가정한 듯한데요. 두 사람 주장 모두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국가를 관료들의 이해만을 반영하는 도구로 인식하는 김 교수 주장이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가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고위 관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국가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합니다. 물론 장하준 교수도 국가의 역할만 강조할 뿐, 국가를 어떻게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부합하도록 개혁할 것인지 그 내용이 빈약해 보입니다. 장하준 교수가 국가 개혁에 관한 구체적이고 풍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의 국가 역할론도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말 겁니다.
미래 성장 전략, 장하준·김상조 모두 부실하다
미래 성장 전략에 대해서도 두 사람의 생각은 다릅니다. 장하준 교수는 주주 가치 극대화 논리가 단기 실적에 매몰돼 장기적인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고 보고, 여전히 재벌 주도 성장 전략이 유효하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김상조 교수는 재벌로 경제력이 집중되는 것이 성장을 저해하므로 주주들이 직접 총수의 횡포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주주 행동주의로 경영자와 이사회를 압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래 성장 전략에 대해서도 역시 두 사람 주장은 빈약합니다. 미래 성장 전략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대학, 연구 기관, 지자체가 긴밀하게 교류, 소통, 협력하며 동반 성장을 모색하는 클러스터 구축형 성장 전략이어야 합니다. 특히 중소기업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대학 개혁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두 사람 주장을 들어보면 한쪽에서는 재벌 주도 성장만 강조하고, 다른 쪽에서는 중소기업 보호만 강조합니다. 미래 성장 전략의 '극히' 일부만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분명한 사실은 재벌 주도 성장만으로, 또는 중소기업 보호만으로 한국 경제가 결코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재벌 총수의 역할에 대해서도 두 사람은 충돌합니다. 장하준 교수는 총수의 책임 경영이 더 효율적이라고 주장한 반면, 김상조 교수는 주인 없는 주식회사가 오히려 더 합리적으로 굴러간다고 주장합니다. 주인 없는 주식회사가 더 합리적이라는 주장과 재벌 총수 경영이 더 합리적이라는 주장, 둘 다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유럽식으로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구축할 것인지 그것을 고민해야 합니다.
국가의 금융 통제에 대해서도 두 사람의 생각은 많이 다릅니다. 장하준 교수는 금융을 시장에 맡겨두어서는 안되고 국가 권력이 적절하게 금융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김상조 교수는 관치 금융을 극도로 혐오합니다. 무능한 관료보다는 시장에 맡겨두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병천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장하준·김상조보다 진전된 대안
장하준 교수와 김상조 교수의 대안 모두 현실성이 낮다면 제3의 대안은 없는가. 이때 주목해 볼 수 있는 사람이 이병천 교수인데요. 이병천 교수는 장하준 교수의 주주 자본주의 비판에 동의하면서도 재벌을 신자유주의의 희생양이라 주장하는 장하준 교수 주장과는 거리를 둡니다.
같이 참여연대에서 활동했던 이병천 교수와 김상조 교수의 견해 차이도 흥미로운데요. 이 교수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자본주의가 주주 자본주의가 아니라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에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란 모든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즉 주주, 경영자, 채권자, 근로자, 소비자, 지역 단체 등의 공동 이익을 중시하는 자본주의를 지칭합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독일이 법률로 강제하고 있는 대기업들의 이원적 기업 지배 구조를 들 수 있는데요. 여기에서 이원적 기업 지배 구조란 의원내각제식 기업 지배 구조를 말합니다. 즉, 대기업에 이사회와 별도로 막강한 권한을 가진 감사회를 두어서 이사의 임명권과 해임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구조입니다. 이때 감사회는 주로 주주 대표(금융 기관 대표들, 연기금이 대주주로서 영향력이 막강)와 종업원 대표들로 구성되는데요. 이런 기업 지배 구조에서는 이사회가 금융 기관, 연기금, 종업원 대표들로 구성된 감사회의 견제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재벌 총수에 의한 소수 독재가 불가능합니다.
물론 김상조 교수처럼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민족주의적 정서와 결합할 경우 개혁이 지체될 수 있다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컨대 1999년 대우자동차 국유화 논쟁에서처럼 국유화 제안이 나왔을 때 노동조합과 채권 금융 기관 등 이해관계자들이 반발하여 결국 무산되고 해외에 매각된 경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던 1999년의 한 차례 사례를 들어 그것의 역기능만 강조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의문입니다. 경험주의의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독일에서 법제화한 것, 우리라 하여 못하란 법 없다
이 외에도 저자는 재벌 개혁 논쟁에 참여한 다수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만, 필자는 지면 관계상 장하준, 김상조, 이병천 교수 3인의 주장만을 다루었습니다. 우연히도 저자의 주장은 필자의 주장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장하준, 김상조 교수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유사했고, 이병천 교수와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도 유사했습니다.
물론 저자와 필자가 이병천 교수와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고 해서 이 교수 주장의 완성도가 장하준, 김상조 교수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병천 교수가 중간자 입장에서 장하준, 김상조 양측에 대해 유연하게 대하다 보니 좀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뿐일 것입니다. 이 교수가 일종의 후발 효과를 얻고 있는 셈입니다.
이병천 교수의 대안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해 당사자의 참여와 협력의 책임 자본주의를 어떤 방식으로든 살려내는 것"입니다. 예컨대 이 교수는 기업 이사회 구성에서 주주에게 이사직의 35퍼센트를, 노동자에게 역시 이사직의 35퍼센트를, 주거래 은행과 기관 투자자 등 나머지 이해 당사자들에게 이사직의 30퍼센트 정도를 할당하는 방안을 제시했는데요. 이것을 독일처럼 법제화할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저자는 그것을 법적으로 강제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 했는데요. 필자는 저자보다는 희망적으로 봅니다. 한국이 레드 콤플렉스가 심한 나라라는 점을 고려할 때 쉽진 않겠지만, 이 교수 대안에 준하는 대안을 법제화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모색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독일에서 법제화한 것을 우리나라라 하여 못하라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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