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성직자와 신자들이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도보순례를 한다. 일차적으론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독려하는 목적이다. 아울러 근대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에 새겨진 분열의 역사를 되새기고, 역사적 진실을 마주할 내면의 용기를 회복하기 위한 순례이기도 하다.
순례단은 지난달 29일 서울에서 출발해 전라남도 진도 팽목항에 도착했다. 진도체육관에서 하루를 묵은 뒤, 도보순례를 시작한다. 지난달 30일 팽목항을 떠나 오는 18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이들은 순례 동안 매일 글을 쓰기로 했다. 그리고 그 글을 <프레시안>에 싣기로 했다. 도보순례단의 글을 소개한다. <편집자>
매일 아침 길을 떠나기 전, 성공회 생명평화 순례자들은 함께 모여 기도를 올립니다. 기도시간은 진도 앞바다에서 예쁜 꿈을 접어야했던 아이들과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는 순서로 마쳐집니다. 순례단 동료 가운데 한 분은 공책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손글씨로 적어 품에 지니고 있습니다. 세월호에 갇혀, 아니 이 시대의 어둠에 갇혀 그만 검푸른 바닷물으로 사라져버린 단원고 아이들의 이름이 한 명씩, 한 명씩 불립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불림으로 인해 모든 순례자들은 그 아이들이 순례자들의 가슴 속에서 다시 부활함을 느낍니다. 아이들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제 자신들을 가두었던 이 시대의 어둠을 제발 밝혀 달라고! 맑고 푸르른 꿈을 차가운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간 저 부패의 사슬을 끊어 달라고!
순례단의 선두에는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걷는 생명평화 도보순례”라는 노란 깃발이 앞장 섭니다. 순례자들이 걷는 길섶에는 많은 들꽃들이 피어있습니다. 개망초와 구절초가 피어있고, 싸리 꽃과 왕고들빼기 꽃이 웃고 있습니다. 감국과 산국이 노랑색을 견주고 있고, 쑥부쟁이이와 벌개미취가 조용히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가을 햇살이 비치기 시작하자 나뭇가지마다 걸린 거미줄에는 이슬방울이 영롱하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냇물이 졸졸거리며 흘러갑니다. 아이들을 생각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순례자의 눈에는 이제 이 모든 생명들 속에서 아이들의 모습이 느껴집니다. 아이들의 웃음과 몸짓이 떠오릅니다. 못다 핀 아이들의 꿈과 생명이 이 뭇 생명들 속에 함께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노란색 나비 하나가 나풀 나풀 날아오더니 순례단 깃발 앞에서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순례단은 차도와 들판 사이로 뻗은 인도를 따라 걷는 중인데 신기하게도 나비는 차도로도, 들판으로도 날아가지 않고 마치 강아지가 앞장서 뛰어가듯이 순례행렬 앞에서 계속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신기한 동행은 자그마치 수백 미터나 계속 이어졌습니다. 노랑나비는 오랫동안 순례단을 이끌다가 작은 화훼단지가 나오자 그곳엔 핀 꽃들을 향해 날아갔고, 순례단은 그 화훼 단지 앞에서 고단한 다리를 펴고 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아이들이 마지막까지 주고 받았던 이야기들과 영상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것이 지난 봄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가을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100일이 지나가고 200일이 다가도록 우리들이 아이들을 위해 해준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우리의 기억은 벌써 희미해지는 것이 아닌지 자책이 들기도 합니다. 아이들과 유가족이 더 이상 희생자가 아니라, “그러잖아도 먹고 살기도 힘든데 경제를 망치는 귀찮은 존재로 손가락질을 하는” 이 시대 속에서 하루 하루를 부끄럽게 호흡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어린 아이들만 보아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먹먹했는데, 어느덧 무덤덤해지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순례길에 어디선가 나타나 앞장서서 날아가는 노랑나비를 보면서 세월호에 탔던 아이들의 영혼이 우리 곁에 언제 어디서나 함께 있음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모든 생명 속에 아이들이 살고 있음을 느낍니다. 무슨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유가족들에게 그 아이들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다는 생명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위로의 메시지는 결코 이 시대의 어둠을 향한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것이 돼서는 안됩니다. 이 부패한 사슬을 묵인하는 거짓 용서와 혼동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우리 곁에 함께 살아 있음을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어둠의 세력과 부패한 무리들을 반드시 물리치고 세월호 아이들과 모든 아이들이 구김살 없이 활짝 웃을 수 있는 세상을 열어가야 할 것입니다.
-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생명평화 도보순례 첫째 날, "팽목항에 내려가며 느낀 흐린 날의 여운" 둘째 날, "우리는 왜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미안했던 걸까?" 셋째 날,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는 세상, 생명의 길을 걷고 또 걷는다" 넷째 날, "걸으면 생명이 보인다" 다섯째 날, "아이들 목숨값 흥정하는 부모는 되지 않겠다" 여섯째 날, "강변 꽃길 대신 매연 가득한 길을 걷는 이유" 일곱째 날, "자식 잃은 부모는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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