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이 아빠’ 강양구 기자입니다. 저는 지난 3월부터 1년 일정으로 휴직하고 가족과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프레시안> 후배 기자로부터 ‘미국 의료 체험기’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부탁을 받고 참 난감했습니다. 한국 의료도 마찬가지지만 미국 의료도 그것만의 고유한 맥락(역사, 문화, 정치, 경제 등)이 있어서, 고작 8개월 살아본 게 전부인 제가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입니다. 더구나 ‘의료 체험’을 하려면 아파야 하는데, 더 좋은 기사를 위해서 일부러 아플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망설이다가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미국 의료는 잘 몰라도 한국 의료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저의 체험이 고국의 독자에게 양쪽을 비교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 글이 미국을 모델 삼아 추진 중인 박근혜 정부의 의료 산업 육성 (혹은 반대자들이 말하는 ‘의료 민영화’) 정책의 잘잘못을 따지는 토론의 불쏘시개가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고백하자면, ‘진보’ 딱지가 붙은 매체에서 일하다 보니 아무래도 미국의 의료 현실을 놓고서 긍정적인 얘기보다는 부정적인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가족과 함께 미국행을 준비하면서 내심 이런 생각을 했어요. ‘미처 몰랐던 미국 의료의 밝은 면을 보고 오리라!’
이렇게 기대와 걱정이 공존하는 상태에서 미국행을 준비하면서, 우리 가족이 제일 먼저 한 일은 1년간 우리를 ‘지켜줄’ 의료 보험을 드는 일이었습니다. 알다시피, 미국에는 우리나라의 국민건강보험과 같은 전 국민이 가입되어 있는 의료 보험이 없습니다. 65세 이상의 노인(12%)과 극빈층(15%)을 제외한 대다수는 자기가 알아서 의료 보험을 들어야 합니다.
제 나라 국민의 사정이 이러니, 우리 같은 1년짜리 방문자는 당연히 알아서 의료 보험을 해결해야죠. 국내외 여러 보험 회사의 견적을 내보고, 약 300만 원을 들여서 우리 가족 3인을 1년간 지켜줄 의료 보험을 들었습니다. 이 보험은 사고나 질환 건당 병원비를 5만 달러(약 5000만 원)까지 보장합니다.
그러니까 병원비가 6만 달러(약 6000만 원)가 나왔다면, 그 중 5만 달러(5000만 원)까지만 보장해주는 보험이죠. 나머지 1만 달러(1000만 원)는 제 호주머니에서 부담해야 하고요. 이런 설명을 듣고서, 좀 과한 보험은 든 건 아닌지 의아해할 분들도 있겠죠. 하지만 이 보험은 미국의 대학 등이 유학생에게 요구하는 ‘최소한의’ 조건을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럼, 미국은 어떨까요? 캘리포니아 대학 샌프란시스코 캠퍼스의 한 연구 팀이 2009년 캘리포니아 주에서 맹장 수술을 받은 성인 1만9368명의 진료비를 추적했더니 평균 3만3611달러(약 3300만 원)의 진료비가 청구되었습니다. 18만2955달러(약 1억8000만 원)의 진료비가 청구된 경우도 있다니 섬뜩할 수밖에요. 5만 달러 보장 보험이 왜 아슬아슬한지 실감이 나시죠?
다른 예도 있습니다. 첫째를 낳고 1년이 좀 지나서 미국으로 간다니, 짓궂은 지인 몇몇이 ‘원정 출산’ 혐의를 제기했습니다. ‘미국에서 둘째를 낳을 속셈 아냐?’ 둘째를 낳을 계획도 없었지만, 설사 그런 일이라도 생기면 얼른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족이 든 보험은 미국에서의 출산 따위는 보장해주지 않으니까요.
최근에 자연 분만으로 한국에서 아기를 낳은 한 후배한테 확인해 보니, 총 진료비 약 180만 원 중에서 60만 원 정도를 자신이 부담했습니다. 그 후배는 2박 3일 동안 1인실에서 묵었다고 하니,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는 6인실에서 묵었다면 본인이 부담해야 할 진료비는 30만 원 정도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아기 엄마가 전하는 미국 유학 중인 친구의 얘기도 있습니다. 임신한 이 친구가 지금 간절히 바라는 것은 ‘자연 분만’입니다. 산모와 아기를 위해서 ‘제왕 절개’를 피하고 싶어서냐고요?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죠. 하지만 진짜 이유는 제왕 절개를 할 경우에 낼 병원비가 부담이 돼서입니다.
대학 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이 친구는 제왕 절개로 아이를 낳을 경우 자연 분만보다 추가로 약 3000달러(약 300만 원)를 더 부담해야 합니다. 이 친구 얘기를 듣고서, 집 근처 대학 병원의 제왕절개 진료비를 살펴봤습니다. 약 4만6000달러(약 4600만 원)! 시민에게 최선의 의료비 정보를 제공하는 한 웹사이트(Healthcare Bluebook)에서 제시한 진료비도 약1만2000달러(약 1200만 원)!
그러니 우리 부부는 미국에서는 절대로 아기를 낳아서는 안 되는 운명을 안고 태평양을 건너간 것이죠. 웬만한 큰 사고나 질환이 아니면 병원비 수천만 원이 나올 일은 결코 없는 우리로서는 참으로 무서운 미국의 진료비. 이렇게 우리 가족은 처음부터 약간 겁에 질려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 의료 민영화, 재앙인가? 축복인가? |
* 이 기사는 미디어 다음과 공동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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