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민영화 반대 서명이 화제다. 병원에 호텔, 수영장, 건물임대업 등 부대사업을 허용하는 내용의 의료법 시행규칙 입법 예고 마감기간인 22일 보건복지부 홈페이지가 한때 마비되기도 했다. (☞관련 기사 : 하루 새 '의료 민영화 반대' 서명 67만…합계 120만 명)
정부가 지난 6월 10일 발표한 정책의 핵심은 의료법인의 영리 자회사를 허용하고, 부대사업을 대폭 확장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영리 자회사를 통해 부대사업을 확장하면, 경영난에 빠진 병원이 자금을 얻는 데 숨통이 트인다는 논리다.
노동계와 보건의료계는 이번 조치를 '의료 민영화(영리화)'라고 규정하고 반대했다.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와 보건의료노조는 의료법 시행규칙 마감기한에 맞춰 21일, 22일 파업에 돌입했다. (☞관련 기사 : 세월호 유족 "의료 민영화 반대 싸움도 다르지 않다")
보건복지부와 박근혜 대통령은 '의료 민영화' 논란에 대해 '유언비어'라고 일축했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해 12월 '제4차 투자활성화대책' 발표 당시 "현 정부에서 영리병원 등 의료 민영화는 전혀 계획이 없다"며 "자회사의 부대사업 허용은 민영화와 전혀 다른 개념"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지난해 12월 30일 "SNS 등을 통해 퍼져 나가는 잘못된 유언비어를 바로잡아야 한다"며 "원격의료 제도 도입과 의료법인 자회사 설립이 의료 민영화다, 진료비 폭탄이 될 것이다, 이런 잘못된 주장들로 국민들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의료 민영화, 도대체 뭐기에?
일각에서는 '의료 민영화'라는 말이 혼란을 일으킨다며 '의료 영리화'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의료 민영화란 무엇이고, 정부가 추진하는 부대사업 확장과 영리 자회사 허용을 '의료 민영화'라고 일컬을 수 있을까?
의료 민영화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공보험인 전 국민 건강보험제도를 무너뜨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영리병원을 도입하는 등 의료 영역을 민간에 맡기는 것이다. (☞관련 기사 : 박근혜, 의료 민영화 '재앙의 문' 여는가)
정부는 전 국민 건강보험제도, 다시 말해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를 손볼 계획이 없으므로 이번 조치가 민영화가 아니라고 밝혔다.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란 모든 국민은 공보험인 건강보험에 가입해야 하고, 모든 병원은 건강보험 적용을 거절할 수 없게 국민건강보험법이 보장하는 제도다. 전 국민 건강보험제도가 없는 대표적인 국가가 미국이다. 특정 민간보험과 제휴한 의료기관에서만 보험 혜택이 제공된다.
다음으로 정부는 영리병원 도입을 추진하지 않았으므로 '의료 민영화'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여기에는 한국 의료의 특수성이 있다. 한국은 병상 수를 기준으로 공공병원 비중이 10%(의료기관 수 기준으로 6%)에 불과하다. 민간병원이 나머지 90%를 차지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권이다.
외국은 다르다. 한국에서 초등학교 대부분이 국공립이듯이, 선진국에서는 병원은 당연히 공공병원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조차 공공병원 비중이 26%이고(의료기관 수 기준 30%) OECD 회원국 평균은 75%다. '민간병원' 비중만을 보면, 한국은 의료가 이미 '민영화'돼 있다.
다만, 한국에는 민간병원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데서 오는 폐해를 방어하기 위한 두 가지 규제가 있다. 하나는 강력한 공보험(건강보험)이 의료 서비스의 가격을 통제한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도 허점은 있다. 한국은 건강보험 보장성이 60%대에 불과하다. 비보험(비급여) 진료비는 '가계 파탄'의 대표적인 원인으로 꼽혀왔다.
나머지 규제가 바로 '비영리병원' 제도다. 의료법은 민간이 운영할지라도 병원은 비영리로 운영하도록 규정한다. 다시 말해 외부 투자자들이 병원에 투자해서 수익을 빼 갈 수 없다. 병원에서 생긴 모든 수익은 전적으로 병원에 재투자해야 한다.
"영리병원 아니면 의료 민영화 아니다?…영리 자회사가 우회적인 영리병원화"
보건의료계와 시민단체는 이번 '영리 자회사 허용' 정책이 우회적인 '영리병원 정책'이라고 주장한다. 병원 수익이 자회사를 통해 우회적이지만 합법적으로 빠져나갈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다. 이를 두고 김철신 전 대한치과의사협회 정책이사는 "집(병원)에는 투자 못 하고 방(자회사)에는 하게 하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방, 거실, 화장실에 투자하되, 집에 투자한 건 아니므로 '비영리병원'이라고 정부가 강변한다는 것이다. (☞관련 기사 : "치과 의사 은어 '사시미 인레이', 아시나요?")
정부가 추진하는 '비영리병원의 영리 자회사'의 폐해가 드러난 대표적인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 회계감사원은 1993년에 작성한 보고서를 통해 "영리 자회사를 가진 비영리병원은 영리병원과 유사하게 운영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영리 자회사를 가진 비영리병원은 영리병원처럼 가난한 환자들을 덜 진료했고, 의료시설에 과잉 투자했으며, 부당 청구와 리베이트, 의료비를 증가시켰다는 점이 꼽혔다.
미국에서 영리 자회사가 하던 사업도 정부가 허용하려는 부대사업 목록과 거의 비슷하다. 미국에서는 첨단 치료·신의료기기 등 의료 관련 사업, 식당·식품판매업·의료 관련 상품 판매업 등 의료 보조 사업, 인력 제공·고객 관리 등 경영지원사업, 부동산 임대업 등이 활성화됐다. 보건복지부가 이번에 영리 자회사를 통해 할 수 있도록 열거한 부대사업 목록에는 의료기기·의약품 연구·개발, 생활용품 판매업, 호텔업, 외국인 환자 유치, 건물 임대업, 장애인 보장구 등 맞춤 제조·개조·수리업 등이 포함됐다. (☞관련 기사 : 박근혜, 미국식 병원 영리 자회사 모델 베꼈다)
정부는 부대사업이 환자의 직접적인 치료와 관련이 없으므로 의료비 폭등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부가 밝힌 대로,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진료비는 이번 정책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보험 진료비는 매년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가 결정하는 가격대로 정해진다. 문제는 비보험(비급여) 진료다. 비보험 진료는 의료기관이 임의로 가격을 책정할 수 있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병원이 영리 자회사가 연구·개발한 비보험 의약품, 의료기기를 처방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비보험 진료가 늘어나면 장기적으로는 건강보험 보장성이 흔들린다. (☞관련 기사 : "의료산업이 저성장 경제 돌파구…과연?")
환자 진료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건강 마케팅'도 활성화될 수 있다. '아쿠아 허리 치료' 방식으로 영리 자회사가 운영하는 수영장을 이용하게끔 하거나, 건강에 좋다고 홍보한 생활용품을 파는 형식이 가능하다. 이향춘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 서울지역지부장은 "서울대병원에서 갑상샘암 치료를 받은 환자에게 흉터가 남지 않는 화장품 판매하는 곳을 안내하고 있다"고 증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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