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증언을 듣던 한 할머니는 오열하다 끝내 의무실로 이송됐다. 국회의원도 울고, 방청하던 시민들도 울었다. 25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6월 11일 밀양 행정대집행 상황에 대한 긴급 증언대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바다였다.
새정치민주연합 장하나·정청래·진선미 의원 등이 주최한 이날 증언대회는, 행정대집행 당일 이어진 경찰의 인권 침해 행위 등을 다시금 공유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고발해 책임을 묻고자 마련됐다.
밀양 주민 30여 명을 비롯, 약 50명이 참석한 이날 증언대회는 행정대집행 당시 상황을 담은 밀양인권침해감시단의 영상을 시청하며 시작됐다.
765킬로볼트 송전탑 129, 127, 101, 115번 예정지 인근에 지었던 움막들이 처참하게 부서지는 장면을 보며 주민들은 너나없이 눈물을 터뜨렸다. 129번 현장을 지켰던 한옥순(67) 할머니는 "지금도 경찰이 칼을 이렇게 움켜쥐고 머리 위에서 움막을 찢는 악몽이 계속돼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호소했다.
한 씨의 말처럼 경찰은 당시 움막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길이 10센티미터가량의 날카로운 칼을 사방에서 찔러 넣으며 안쪽으로 빠르게 진입했다. 수많은 사람이 뒤엉킨 아수라장 속에서도 버젓이 칼을 손에 쥔 채 서 있거나 걸어 다니는 경찰도 여러 차례 목격돼 "경찰부터 안전엔 관심이 없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 씨는 집행 당일 옷을 벗어 경찰에 저항했던 주민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내 생존권을 지키려고 옷을 벗었다"며 "이렇게 할머니들을 죽이라고 하는 법이 있는지 묻고 싶다. 우릴 죽이라는 법이 있으면 우리도 따르겠지만, 내가 알기엔 그런 법은 없다"고 말했다.
127번 현장에 있었던 정임출(73) 할머니에게도 움막이 찢기던 순간은 잊힐 수 없는 '공포'로 남아 있다. 정 씨는 "한 군데만 찢은 게 아니라 사방을 돌아가면서 다 찢었다"며 "공무원이 해야 하는 철거를 경찰이 이미 다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정 씨는 당일 움막 안 굴속에서 경찰 손에 붙들려 끌려 나온 뒤 실신했고, 한참 후에야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다. 그는 "행정대집행 전에 내가 죽더라도 병원에 싣고 가지 말라고 당부했었다"며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고 싶었다"고 말했다.
"진압 후 씩 웃는 경찰…집행 끝나자마자 과수원 쑥대밭"
상동면 주민인 김영자(58) 씨는 경찰의 반복적인 비웃음과 비아냥거림을 증언하며 몸서리쳤다. 김 씨는 "115번 현장에서 진압이 끝난 후 김수환 경찰서장이 옆에 서 있는 경찰과 씩 웃고 있는 모습을 봤다"며 "평소에도 많이 보는 모습이다. 그걸 보면 과연 사람이냐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보기 : 할매 목 향한 '펜치'…'작전' 끝낸 경찰은 V자 미소)
115번 송전탑 예정지는 과수원 한가운데에 있다. 송전탑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일터이자 삶 터인 이 곳은 행정대집행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쑥대밭이 됐다고 김 씨는 말했다.
그는 "과수원 한가운데를 향해서 굴착기가 올라와 저희 생명줄인 감나무와 매실나무를 다 망가뜨렸고 그 며칠 후엔 콩이고 들깨마저도 전부 짓밟힌 상태였다"며 "정부가 이럴 수가 있나. 국가가 어떻게 삶의 터전과 생명을 이렇게 위협할 수 있는 건가"라고 물었다.
증언대회는 김 씨의 말을 들으며 오열하던 고정마을 주민 김순남 할머니가 호흡 곤란 증세를 보여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고통을 호소하는 김 할머니를 주변인들은 의원회관 안에 있는 의무실로 이송했다.
단장면 주민 송영숙(58) 씨는 당일 함께해준 '연대자'들을 떠올리며 쉬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송 씨가 머물렀던 101번 현장은 다른 곳에 비해 특히 산새가 험해 접근이 쉽지 않았던 곳이다. 그럼에도 쌍용자동차 해고자들, 용산참사 유가족 등 수많은 연대자들은 경찰 감시를 피해 늦은 밤, 몇 시간에 걸쳐 산을 오른 후 마지막까지 주민들과 함께했다.
송 씨는 "그간 우리를 보호해준 분들이 있어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며 "나중에 비슷한 피해를 입을 사람들에 대한 연대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움막 안팎에서 취재 방해 심각…변호사 접견·교통권도 침해
이날 증언대회에는 <프레시안>도 참여해 당일 있었던 경찰의 취재 방해, 즉 국민의 알 권리 침해 행태를 증언했다. 경찰은 당일 취재진임을 알 수 있는 비표를 꺼내 보여도, 움막 안에서 벌어지던 일을 촬영하거나 기록하고 있던 기자들을 강제로 수차례 끌고 나왔다.
"안전을 위해 움막 안에서 벗어나 달라는 양해를 구한 것"이라는 게 경찰의 해명하지만, 취재 통제 및 방해는 움막 밖에서도 여전했다.
단적인 예가 101번 현장에서 끌려 나온 주민들에게로 취재진이 접근이 차단돼 있었던 점이다. 부상을 입었거나 울부짖는 20명가량의 주민을 취재하고자 해도, 경찰은 이들을 겹겹이 둘러싼 후 비표를 보이는 기자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밀양인권침해감시단과 밀양법률지원단은 이와 같은 경찰의 인권 침해에 대해 앞으로도 지속해서 문제를 제기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감시단은 "밀양에서 경찰이 철거한 것은 '사람'이었다"는 제목의 네 번째 밀양인권침해 보고서를 정리해 내놓은 상태다. 이들은 보고서에서 당일 행정대집행을 "국가폭력과 반(反)인권으로 점철된 진압작전"이라고 명명했다.
법률지원단의 정상규 변호사는 "강제 퇴거나 강제 처분을 위한 영장이 없었고, 연행 시에도 미란다 원칙 고지가 없었으며 변호사의 접견·교통권이 침해됐고 과도히 통행이 제한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며 "총체적으로 위법한 공무집행이었던 만큼 국가 배상 및 손해배상 청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