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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제학이 걸었던 길 ③
군대라는 상수(常數)
문곡 김수항은 효종 9년(1658) 7월 부제학이 되면서 홍문관의 수장이 되었다. 홍문관은 제학, 대제학이 있지만 이는 겸직이고, 실직으로는 정3품 당상관인 부제학이 장관(長官)을 맡고 있었다. 문곡의 나이 30세였다.
이듬해 2월, 조정에 심각한 상소가 도착했다. 병조참지 유계(兪棨)의 상소였다. 유계의 상소는 군역(軍役)의 개혁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효종 때 군비를 강화하면서 민생이 고생을 했던 정황은 이미 서술한 바 있다. 원래 군대 가는 일이나, 군비를 유지하는 일 모두 민생에는 마이너스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다. 지금도 군대 가기 좋아하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세금과 군역은 국가가 있는 한 언제나 풀어야할 숙제였다. 잘 풀면 그런대로 살만한 나라가 되고, 풀지 못하면 민생이 허덕이거나 나아가 나라가 망하였다.
조선의 군역은 초기에 3명의 군역 대상을 묶어 '1인 징집, 2인은 징집된 집안의 노동력을 벌충해주는 봉족이 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는데, 이를 봉족제(奉足制)라고 하였다. 중종대를 거치면서 군역은 납포제(納布制)로 바뀌었는데, 군적(軍籍 병적)에 파악된 군역 의무의 대상자에게 현역 복무 대신 포(布)를 납부하게 하는 제도였다.
징병되는 보병 대신 군역을 지는 대립제(代立制)가 생기고 직업적인 대립인까지 등장하면서 이들 대립인과 이서(吏胥)의 농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당연히 대립가(代立價)가 폭등하고, 이를 견디지 못한 정병과 보인의 도망이 잇달아 군역제의 파탄을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군적수포법을 실시하였다. 이 법은 입영 대상자가 정해진 포(布)만 납부하면 지방관이 이를 병조에 보내고, 병조에서는 이 포를 각 부처에 나누어주어 대립하는 고용인에게 지급케 하는 제도였다. 이상이 현재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누구나 역(役)이 있다
그런데 인조반정 이후 군포를 거두는 사안은 훨씬 개혁적인 방향으로 진전하였다. 양반에게도 호포를 거두자는 논의가 제기된 것이다. 원래 조선조에 양반은 군역 대상이 아니었다. 신분제 아래서 서로 담당하는 역(役)이 달랐기 때문이다.
임꺽정이 백정 출신이라고 하는데, 백정은 소 잡는 백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렵·도살업도 하지만, 고리[柳器]나 갓을 만들기도 했다. 이들도 국가에 역을 바쳤는데, 이를 신역(身役)이라고 했다. 신역이 평민에게 부과된 것이 군역이었다. 중인(中人)이나 양반도 역을 졌다. 이들의 신역은 직역(職役), 즉 관청에서 일정한 시간 근무하는 의무를 져야했다. 중인이 진 직역은 지방 관아의 이방, 호방 같은 경우가 있고 중앙 관청의 잡역도 이들이 담당했다. 양반은 알다시피 문반과 무반의 관원으로서 직역을 수행하였다.(양반의 직역이 갖는 의미는 이전에 설명한 바 있다. 양반이 과거에 붙는 것은 신분-상승이 아니라 신분-유지이다.)
그런데 양반, 흔히 역사에서 사족(士族)이라고 기록된 계층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사족 중에서 출신(出身 문과 무과에 급제함)을 하거나 관원이 못 되고, 또 생원이나 진사가 되지 못하는 부류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모든 국민이 다 해야 할 의무를 못하는 것이었다. 인조반정의 주역 중 하나였고 조선중기 문장4대가로 이름난 장유(張維)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세도(世道)가 점점 쇠퇴해짐에 따라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사족들이 거드름피우며 자기 편할 대로만 행동해 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한 번 군역(軍役)에 편입되기만 하면 향리에서도 대우를 받지 못하고 좋은 결혼 상대자도 나서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군역을 피하는 것이 마치 죽음을 피하는 것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교생(校生) 중에 도태시켜야 할 대상자들에 대해서는 우선 무학(武學)에 배정하여 다시 한 번 시험을 볼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가 재차 떨어진 뒤에 군역(軍役)에 충정(充定)하기도 하고, 혹은 곧바로 정역(正役)에 충정하지 말고 별도로 하나의 호칭을 만들어 가포(價布)를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실제로는 군역에 충정하는 효과를 거두면서 그 이름만 없애 주는 방법도 배려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계곡선생집> 제17권 <군적을 논하면서 올리려고 작성해 두었던 차자[論軍籍擬上箚]>)
장유는 조선초기에는 사족이라 하더라도 급제하지 못하거나 관직을 지내지 못하면 모두 신역(身役)을 부과받았다고 하였다. 아마 충찬위(忠贊衛) 같이 공신 자제로 충당되었던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장유의 주장은, 신역을 지지 않고 있고 별로 공부도 하는 것 같지 않은 서원이나 향교의 교생에 대해 시험을 친 뒤, 불합격자에게는 아예 군대를 보내거나 군포를 내게 하자는 것이다.
장유의 이 상소는 '왕에게 올리려고[擬]' 했던 상소이다. 올리려고 했으나 그러니 못했던 상소이다. 문집에 실린 순서로 보아, 대략 인조 4년이나 5년경에 썼던 상소로 보이는데, 아마 인조 5년에 있었던 정묘호란(1627) 때문에 상소를 올릴 상황이 아니었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상소를 생각했다는 것은 이미 직역을 수행하지 못하는 양반에게 군역을 지우든지 아니면 군포를 내게 하자는 논의가 개혁적인 관료나 학자들에게서 제시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장유와 마찬가지로 인조반정의 주역 중 한 명이었던 최명길(崔鳴吉) 역시 호패법 시행을 건의하면서, 양반에게 군포를 거두자는 양반수포론을 제기한 바 있기 때문이다. 최명길은 이미 인조 2년에 "백성은 다 소속된 곳이 있는데, 중간에 양반이라고 칭하면서 신역(身役)이 없이 한가롭게 노니, 생각건대 획일적으로 신역을 정하는 것만 못하다"고 지적했다.(<인조실록> 권6 2년 5월 29일(임오))
양반도 호포를 내라
최명길, 장유의 양반수포론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효종대 군사정책에 치중하다보니 군역의 개혁이 다시 요구되었고, 이 와중에 유계의 상소가 올라옴으로써 다시 양반수포론이 제기되었다. 유계는 이렇게 진단하였다.
"군포 징수만은 너무 무거워 백성의 피땀을 이미 다 짜낸 데다 노인·약자·도망자·죽은 사람의 세금까지 탕감하지 않고 분담시켜 같은 문중의 겨레붙이나 이웃 마을 사람들이 아울러 혹독한 피해를 당하고 있으니, 이런 경우는 실로 고금 천하를 통해 봐도 일찍이 없었던 큰 폐단입니다. …… 군정(軍丁) 가운데 도망자·죽은 사람·노인·약자에게 군포 걷는 일은 전액 모두 면제해 주고, 보병이 응당 바쳐야 하는 베 두 필은 특별히 한 필을 면제해 주어 큰 은혜를 베풀고 두터운 신망을 확고히 세우소서.
위로는 조정의 모든 벼슬아치에서부터 전함(前銜 전직 관리)과 생원·진사·유학(幼學)·품관·과거 시험 입격자·서얼로서 허통(許通)된 자에 이르기까지 일체 군역(軍役)에 합당하지 못한 부류로서 나이 60세 이하에서 아내가 있는 사람 이상은 무명베 1필을 바치도록 윤허하소서."(<효종실록> 권21 10년 2월 11일(임신))
유계의 말 중에, "노인·약자·도망자·죽은 사람의 세금까지 탕감하지 않고 분담시켜 같은 문중의 겨레붙이나 이웃 마을 사람들이 아울러 혹독한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지적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황구첨정(黃口添丁 어린이를 군적에 올림. 어린 새는 부리가 노랗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백골징포(白骨徵布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징수함), 족징(族徵 친척에게서 징수함), 인징(隣徵 이웃에게서 징수함)을 말한다.
유계의 주장은 앞서 살펴본 장유의 주장과 흡사하다. 그러나 대상 범위가 대폭 확대되었다. 장유는 양반 교생 중에서 공부 안 하는 교생만 대상으로 포를 거두자고 했지만, 유계는 군대 안 가는 양반은 다 호포를 내자는 의견이었다. 효종은 유계의 상소를 토론에 붙였다. 토론 장면을 생중계해보자. 비변사 회의, 요즘으로 말하자면 국무회의이다.
호포법 토론 생중계
효종 : 유계가 상소한 의견을 여러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분부했다. 여러 사람의 의논은 어떠한가?
영의정 심지원(沈之源) : 갑작스레 사족들에게 군포를 징수해서 전에 없었던 일을 새로 만들어 놓는다면 혹시 이 뒤에 원망하고 괴로워하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스럽습니다.
효종 : 원망과 고통으로 따져 말한다면 도망자와 죽은 자의 원망과 고통이 사족들의 원망과 고통에 무엇이 다르겠는가.
좌의정 원두표(元斗杓) : 군인과 민간의 고생이 지금보다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만일 이 시기에 변통하지 못하면 저 군인과 민간의 원망이 과연 어느 때나 풀리겠습니까.
심지원 : 우리나라가 유지되는 것은 바로 사대부의 힘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루아침에 갑자기 일찍이 없었던 일을 만들어 서민들과 똑같이 군포를 징수한다면 그 원망 소리 또한 크지 않겠습니까. 꼭 그만둘 수 없는 일이라면 다음과 같은 한 가지 방법은 있습니다. 위로 삼정승에서 아래로 말단 관원까지 그 품포(品布)를 걷어서 사용하되, 품포가 부족할 경우에는 감영과 병영에 간직하고 있는 포목을 실어다 보태 쓰는 것이 아마 좋을 듯합니다.
효종 : 모든 일을 반드시 대신이 담당한 후에야 도모할 수 있는데, 만약 서로 미루기만 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임금도 어떻게 혼자서 잘 운영하겠는가. 대동법은 김 영돈녕(金領敦寧 김육. 이 당시에는 세상을 떴음)이 혼자 스스로 맡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시행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지중추부사 이완(李浣) : 만일 부득이 변통해야 한다면 먼저 호패(號牌) 제도를 시행하는 일보다 나은 것이 없을 듯합니다.
형조판서 채유후(蔡裕後) : 신이 본디 우매하여 사무를 잘 모르지만, 이 일에 있어서는 시행하기 쉽겠다고 인정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조판서 송시열(宋時烈) : 이 일에 대해서 벌써 유계와 서로 의논하였으니, 유계에게 우선 사목(事目)을 골라내서 실시하기 편리한가의 여부를 살펴보게 하소서.
부제학 김수항(金壽恒) : 지금 피폐를 구제하는 데에 별다른 좋은 대책이 없는데다가 군포를 걷는 일은 부득이한 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집의 이경휘(李慶徽) : 이 법이 비록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영구히 시행할 제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효종 : 이 일은 명목이 매우 중대하므로 갑작스럽게 시행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군역 균등의 개혁 방향
보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호포법은 신분제의 명분을 흔드는 조치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양반이 평민이나 지는 군역을 져야한다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명분이 아니라 경제적인 부담이 따라왔다. 그러므로 양반들의 강한 반발은 충분히 예상되었던 터였다. 그런 점에서 비변사 회의의 분위기는 기실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느낌이 있다.
우선 영의정 심지원, 형조판서 채유후, 집의 이경휘 정도가 난색을 표했을 뿐, 대부분 군역의 개혁에 동의하였기 때문이다. 좌의정 원두표도 지금 개혁하지 않으면 백성들의 원망을 풀 수 없다고 강조했고, 송시열은 아예 이미 유계와 상의한 일이라고 하여 유계의 의견에 힘을 보탰다. 문곡은 다른 대책이 없는 상태에서 나온 유일한 대안임을 확인하였다.
조금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효종의 태도이다. 효종은 미심쩍어 하는 심지원에게, "원망과 고통으로 따져 말한다면 도망자와 죽은 자의 원망과 고통이 사족들의 원망과 고통에 무엇이 다르겠는가"라며 사족 양반의 원망과 고통이나 족징, 인징을 당하는 백성들의 고통이나 마찬가지라며 얼핏 보기에 유계의 견해에 찬동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결국 명분을 이유로 추진을 보류하는 결정을 내려 정책화되지 못하게 하였다. 곧이어 효종이 세상을 뜨면서 양반호포제는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현종 15년 이유태(李惟泰)는 군역을 1필로 통일하고 이에 따른 재정부족을 메우기 위해 양반에게도 똑같이 1필을 부담시키자는 양반수포론을 다시 제기하였다. 문곡의 작은형으로 영의정이었던 김수흥(金壽興)은 생원, 진사를 제외하고 직역을 수행하지 못한 유학(幼學) 이하에게는 평민의 군역처럼 1필의 신포(身布)를 거두자고 주장하였고, 좌의정 정지화는 사람에게 지우는 신포는 경우에 따라 한 집안에 많은 포를 징수하게 되니 호포(戶布)로 하자고 주장하였다. 논의는 양반에게도 포를 거두어야 한다는 합의를 바탕으로 신포로 할 것인가, 호포로 할 것인가만 결정하면 되었다.
그러나 역사가 그렇게 쉽게 진행되지는 못하였다. 주지하듯이 곧바로 제2차 예송(禮訟)인 갑인예송이 시작되면서, 양반호포론을 주장했던 송시열, 김수흥 등은 오례(誤禮)의 비판을 받으며 귀양을 갔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대사헌 강백년(姜栢年)은 "일 없이 노는 선비들이 각기 베 한 필씩을 내어 많은 군역 대상자들의 도망으로 인한 이웃이나 친척의 피해를 덜어주는 것이 편리하고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것은 보탬이 경미하고 손해가 너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국조(國朝) 300년 동안에 선비들을 매우 후하게 대우해왔는데 개중에는 혹 부역 면제를 위하여 이름만 붙여두고 지내는 자도 없지 않았지만 그를 구별하기가 어려워 그냥 일체를 장보(章甫)로 대우했던 것입니다. 만약 똑같이 베를 징수하기로 하면 정역(定役)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아무래도 잘 생각해서 하는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라며, 양반 명분론을 내세워 반대하였다.(<현종개수실록> 권28 15년 7월 13일(을해))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숙종 후반 이후 군역 개혁 논의는 계속되었다. 나아가 사내종이 양인(良人) 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으면 자식은 종의 신분인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를 따라 평민이 되는 '노양처종모종량법(奴良妻從母從良法)'을 실시하여 노비를 줄이고 평민을 늘여나가는 정책이 추진되었다.(<영조실록> 권28 6년 12월 26일(경신))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균역법(均役法)은 이렇듯 부역 부담의 균등화를 위한 지루하고 긴 노력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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