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정당공천제 폐지론자들은 도대체 다 어디에 갔을까?
미리 밝혀 두지만 나는 정치학자로서 국회의원을 뽑든 지방의원을 뽑든 정당공천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신념과 상관없이 지난 대선 과정에서부터 줄곧 정당공천제 폐지는 주요 정당 후보의 공통된 공약이었고, 국민 여론 역시 한시적 또는 기초자치단체에서만큼은 공천제를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압도적이다.
어쨌든 현재의 정치 상황은 한편의 3류 코미디에 가깝다. 원칙과 소신의 정치인이라던 대통령은 지방선거가 불과 70일 남은 상황에서 한 마디 공식적인 해명이나 사과 없이 정당공천제 폐지를 없었던 일로 뭉개고 있다. 한편 민주당과 안철수 신당의 통합의 촉매제였던 정당공천제 폐지는 희망의 축가가 아니라 선거 전패를 몰고 올 암운으로 비쳐지고 있다. 이런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비례대표를 꿈꾸었던 여성정치인들이나 진보계열의 소수 정당 정치인들은 암울하고 불확실한 전망에 한숨만 쉬고 있는 실정이다.
정말 모를 일은 정당공천제 폐지를 정치개혁의 핵심인양 목청 높여 주장하였던 그 많던 언론인들, 행정학자, 특히 현역 단체장들의 행태이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더 이상 정당공천제 폐지를 소리 높여 외치지도, 공약을 폐기한 대통령과 여당을 향해 날선 화살을 날리지도 못하고 있다.
해법은 영호남 지역의 정당공천제 폐지이다
지지하는 정당을 떠나 상식선에서 생각해 보자. 게임의 규칙을 규정한 선거법의 생명은 공정성이다. 정당공천제와 같은 중요한 규칙이 어느 한쪽은 지키고, 다른 한쪽은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도 공약을 파기한 쪽은 이득을 얻고 실천한 쪽이 피해를 입는다면 앞으로 도대체 어느 누가 약속을 이행하겠는가?
꼬일 때로 꼬여 있는 현재의 정치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리당략을 넘어선 여야의 정치개혁의 의지와 지혜,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통령의 결단이 필수적이다. 여야의 타협을 통해 정치를 발전시키고 나아가 국민의 신뢰를 얻는 길은 의외로 쉽고 간단하다. 그것은 이번 선거에서만큼은 약속대로 여야가 합의를 통해 영호남의 기초단체에서 정당공천제 폐지를 전격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해법은 간단하지만 그 효과는 엄청나다. 기대되는 첫 번째 효과는 추락할 대로 추락한 정치권의 신뢰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여야는 정당공천을 둘러싼 소모적인 논란을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위헌 논란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사법적 개입 없이 모처럼 제 할 일을 하였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세 번째 효과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진전이다. 최근 선거법의 두드러진 흐름은 지역적 다양성의 보장이다. 특히 지방자치가 발전된 국가일수록 지역별로 다양한 선거법을 갖고 있다. 왜 전국적으로 모든 지역이 정당공천제를 일률적으로 시행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다른 선진국들처럼 지역 거점의 지방 정당(local party)을 허용하지 않고 있는가? 이러한 천편일률적 규제야말로 박근혜 대통령이 말하는 암 덩어리가 아닌가? 자 이제 왜 전국적인 기초자치단체가 아니라 영호남에서 정당공천제 폐지를 먼저 실험해야 하는 지를 설명할 차례이다.
복지의 불모지이자 부패의 온상인 영호남의 지역정치
영호남 지역에 한해 먼저 정당공천제 폐지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가장 중요하고도 새로운 논거는 이들 지역이 복지정치의 후진 지역이라는 사실이다. 필자는 2008-2012년까지 민선 4기와 5기를 대상으로 지방정부의 복지 재정에 대한 비교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번 연구에서 밝혀진 가장 놀라운 사실(?) 중 하나를 미리 귀띔하자면 영호남 지역의 복지 수준이 대부분의 분야에서 수도권은 물론이고 전국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다음의 그림이다. <그림 1>은 현재 영호남 복지 수준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전국적으로 지방정부의 교육비 지출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영호남 지역에서만은 오히려 정체 또는 감소하고 있는 추세이다. 정치적 경쟁이 없는 지역에서 복지 수준이 낙후된다는 것은 정치학에선 오랜 상식이다.
영호남 지역 먼저 정당공천제를 폐지해야 하는 두 번째 근거는 이들 지역이야말로 지역주의의 폐해나 중앙정치에의 예속이 가장 심각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이를 뒷받침 할 근거 중 하나가 재·보궐 선거이다. 이번 지방자치 민선 5기(2010~2014년) 동안 전국 230개 기초 단체장 가운데 임기 중 기소된 단체장은 전체의 41%인 94명이며, 대법원의 유죄판결을 받은 단체장도 29명이나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지금까지 총 29회의 재·보궐 선거가 치러졌는데, 질병 등 사망은 단 한 차례뿐이었고, 대부분은 선거법 위반과 부정부패 관련(76%)이거나 총선출마로 인한 사직(21%)이었다(<한겨레21>(2013.06.03.) 제963호 참조). 놀라운 일은 이 중 무려 62%가 영호남 지역에서 벌어진 일들이라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이런 지역도 있다. 전북 임실군은 민선 자치시대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단 한 명의 군수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모두 중도 탈락하였다. 민선 1기 군수는 금품수수 의혹이 일자 자진사퇴하였고, 2기에서 5기까지의 군수들은 모두 뇌물 수수로 당선 무효를 선고받았다. 다소 옛날 자료이지만 한 때 대구·경북지역은 한나라당의 의석 점유율(96.5%)이 가장 높았는데, 지난 2006년 지방선거 이후 2008년까지 23개 자치단체장 당선자 가운데 무려 13명이 기소되어 이 또한 전국 최고라는 불명예를 얻은 적도 있었다.
대통령과 여야의 결단을 촉구한다
영호남의 정당공천제 폐지는 현재의 시점에서는 지방 선거(ballot)를 갈등의 도화선이 아니라 정치개혁의 돌파구로 만들 수 있는 마법의 탄환(magic bullet)이다. 그동안 여러 정치인들이 지역주의의 극복을 우리시대의 정치적 과제로 외쳐 왔다. 영호남에서 정당공천제 폐지는 지역주의를 해소함으로써 풀뿌리 민주주의를 소생시킬 매력적인 방안이다. 광주에서 민주당은 오랫동안 5공 시절의 민주정의당이라고 조롱당해 왔다. 서울사람들 눈에 대구는 다른 정치적 신념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보수의 철옹성이다.
대통령이 국정지표로 삼고 있는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해서도 영호남의 지역공천제 폐지는 한번 시도해볼만하다. 이번 문제가 여야 합의로 잘만 처리된다면 영호남에서 양당의 공천이 곧 당선이라는 비정상적인 공식을 바로 잡을 수 있다. 또한 이들 지역에서 참신한 신진 인사와 여성들, 그리고 소수 정당의 진입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시장, 군수 등 기초단체장을 포함할지 아니면 기초의회에만 적용할지, 기초의회 비례대표 문제는 어떻게 처리할지 등 세부 사항은 여야가 영호남 정당공천제 폐지에 합의만 한다면 그리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6.4 지방선거를 불과 두 달여 앞두고 새누리당과 새정치 민주연합 모두 진퇴양난의 덫에 빠져 있다. 한쪽은 집권당으로서의 정치적 신뢰를 상실하는 대신 기호 1번의 실리를 취할 단견에 빠져 있고 다른 한쪽은 대국민 약속이라는 명분에 집착하면서 정당정치의 근간을 훼손하고 있다. 대통령제는 최고 통치권자로서 대통령의 책임이 정치적 안정의 근간이라는 원칙에 기초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대통령은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책임의 상당 부분을 짊어져야 한다. 대통령의 언어를 빌어 말하자면 ‘영호남의 정당공천제 폐지는 대박’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4대강이나 무상등록금처럼 천문학적 재정 투입 없이도 어떤 정권도 이루지 못한 정치개혁의 주춧돌을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 좋은 것은 그것이 여야는 물론 소수 정당들조차 이익을 보는 윈-윈 게임이라는 것이다. 이 봄, 국민들을 위한 대통령의 원칙적 결단과 여야 정치인들의 용기를 기대해 본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