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참 튼튼한 나라 같다. 주류 언론, 특히 보수 성향의 주류 언론들은 대한민국에서 어떤 경천동지할 사태가 벌어져도 그저 당면한 선거에 미칠 영향 분석이 더 우선순위인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국가정보원이 간첩 증거를 조작한 것이 사실로 드러나고, 검찰이 조작된 증거를 짐짓 모른 척하고 법원에 제출했다는 의혹 앞에서도 지난 10일 전까지만 해도 보수 언론들은 6.4 지방선거에서 여야에 미칠 득실을 빼놓지 않고 거론하고 있었다.
또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문제 같은 사적인 성향이 강한 의혹에 대해서는 '사실 확인'을 위한 취재를 마치 국정원처럼 하는 보수 언론들이 정작 대한민국의 국격까지 걸린 문제에 대해서는 취재 능력 밖이라는 듯 '중계보도'에 그치고 있다. 보수언론들은 '간첩 사건'일 때는 대서특필하다가, '간첩 조작 의혹 사건'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게 되어서야 갑자기 태도를 바꿔 국정원을 질타하고 나섰다. 보수 언론의 이런 '뒷북치기 논조'는 '간첩 증거 조작 사건'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지 못해서였을까?
반면 나는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로 넘어가기 전부터 주변에 "아마 박근혜 정부에서는 이명박 정부 때도 보지 못한 엄청난 일들이 벌어질 것 같다"고 말해 왔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설마 정권에서 그런 일까지 할까" 하는 일들이 적지 않았지만, 박근혜 정부에서는 "그럴 리가 없다"고 오히려 내 귀를 믿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과연 내가 혜안이 있는 것인가"하고 '자뻑'을 하고 있다. 좋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측이 맞았다면 '자뻑'도 기분좋게 할 만할텐데, 참 씁쓸한 '자뻑'이 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자뻑'도 잠시, 나는 "간첩 증거 조작 사건만큼은 사실일 리 없다"고 지금도 믿고 싶다. 21세기 대한민국 정부가 벌인 일이라고는 너무 수준 이하라서 그렇다. 어찌된 일인지 박근혜 정부는 대선 때부터 지방선거에 이르기까지 국정원을 중심으로 한 국가권력 개입 의혹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선거와 관련된 의혹이니까, 선거가 이미 끝난 뒤에 문제삼는 것은 '선거불복'이고, 또 앞으로 있을 선거와 관련된 의혹은 그저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따지면 그만인 것일까?
차라리 국익을 위해 조작했다는 해명이 그립다
국정원의 대선개입 의혹 때만 해도,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어도 대선후보까지 직접 책임질 일이냐에 대해 논란이 분분해서 박근혜 정부가 직접적인 타격을 빗겨갈 여지는 있어 보였다. 하지만 '간첩 증거 조작 사건'은 선거에 미치는 득실을 따지는 선에서 그칠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간첩 증거 조작'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국가권력기관과 여권에 나오는 말이 수준 이하이다. 정권이 국가권력을 초법적으로 동원한 사실이 드러날 때 흔히 "국익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거나 "통치행위였다"거나 하는데, '간첩 증거 조작' 사건에서는 이런 해명이 그리울 지경이다.
지금까지 국정원과 검찰의 해명이 바뀌는 과정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국정원의 협력자 한 사람에 의해 국정원이 농락당했고, 심지어 검찰도 농락당했다는 쪽으로 가고 있다.
국정원은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씨가 간첩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 문서들을 검찰에 제공했고, 이 증거문서를 발행한 것으로 되어 있는 중국 정부가 "위조된 문서"라고 확인해준 뒤에도 "위조는 없었다"고 주장해왔다.
심지어 새누리당의 실세라는 윤상현 원내대표는 "중국 정부가 발급 절차가 허술했다는 자기네 문제를 감추기 위해 '위조' 운운하는 것일 수 있다"고 마구 던지기 식의 '국정원 방패막이'를 자처했다. 외교적으로 매우 위험한 공개발언이었다. 심지어 대검찰청 감식팀이 국정원이 제출한 문서의 관인이 위조된 것이라고 확인을 한 뒤에도 국정원은 "같은 인장도 다르게 찍힐 수 있다"는 엉뚱한 해명을 내놓았다.
"위조가 아니라"는 국정원의 주장이 꼬리를 내린 것은 지난 7일 국정원 협력자 김모 씨가 자살기도를 하면서 유서로 "위조됐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서였다. 이제 국정원은 "김 씨가 건넨 문서를 진본으로 믿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국정원은 일요일인 9일 밤 기습적으로 '발표문'을 기자들에게 보냈다. "물의를 일으켜 송구하다"며 짐짓 대국민사과를 하는 것이었지만, 검찰이 '간첩 증거 조작 사건'으로 공식 수사하는 사태가 '물의'인가? 그러니 발표문에서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문서의 위조 여부가 문제가 돼 국정원으로서도 매우 당혹스럽다"는 대목인 것으로 보인다. 정말 수준 이하의 국정원이고, '군인 정신'으로 국정원을 이끈다는 남재준 국정원장의 무능을 그대로 자인한 '발표문'이었다.
남재준 국정원장, 철저하게 무능했을 뿐이라고 믿고 싶다
좋다. 남재준 원장은 간첩 조작 사건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고, 위조 여부를 따질 의욕도 상실한 채 그냥 지내왔다고 믿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남재준 원장은 간첩 조작 사건의 몸통이 되기 때문이다.
야권에서는 당장 남 원장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어차피 남 원장은 경질될 것이다. 남재준 원장이 버티도록 내버려둔다면 곧바로 박근혜 대통령이 진정한 몸통이 될 위기에 몰릴 것이다.
정치 감각이 뛰어난 박 대통령이 가만히 있을리 없다. 중국정부가 공문서 위조 사실을 밝힌 지난달 17일 이래 22일 동안 침묵을 지키던 박 대통령은 10일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남 원장의 입지를 좁게 하는 입장을 밝혔다.
박 대통령은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인 서울시 공무원의 국가보안법 위반혐의 사건과 관련 증거자료에 위조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면서 "이 일과 관련한 실체적 진실을 정확히, 조속히 밝혀서 더 이상 국민적 의혹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검찰에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다.
곧바로 검찰은 이날 저녁 국정원에 대한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문제는 검찰이 '간첩 증거 조작 사건'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검찰 역시 국정원 협력자가 조작한 증거에 대해 "진본이라고 믿었을 뿐"이라는 입장에서 국정원과 다를 바 없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간첩증거 조작 사건'이 국가권력을 상징하는 검찰과 국정원이 모두 국정원 협력자 한 명에게 농락당한 사건이라면 믿을 국민이 있을까?
이미 검찰은 지난해 4월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으로 국정원을 압수수색했지만, 법원의 판결이 적당한 선에 그치도록 수사와 기소를 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이번에도 '간첩 증거 조작' 의혹이 불거진 뒤 한달 가까이 되어서야 단행된 '뒷북치기 압수수색'이라는 점에서 국정원 관계자 몇 명을 건드리는 정도에 그칠 것으로 우려된다.
신경민 민주당 최고위원은 10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국정원에게 007의 모습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찌질해도 너무나 찌질한 국정원"이라고 질타했는데, 이 질타는 검찰에게도 그대로 해당된다.
하지만 국정원과 검찰에게 "찌질하다"는 질타가 면죄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국가보안법 12조 1항은 타인으로 하여금 형사처벌을 받게 할 목적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죄에 대해 증거를 날조·인멸·은닉한 경우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경우 간첩죄와 같은 형량인 사형·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형으로 처벌할 수 있다. 검찰의 수사 결과 국정원에 위조 문서를 제공한 국정원 협력자만 이 조항에 따른 처벌 대상이 된다면, 기껏해야 이를 직접 지시한 국정원 관계자 정도의 처벌로 그친다면 어떻게 될까? 지방선거 결과와 관계없이 박근혜 정부의 임기 후반기는 생각하기 겁날 정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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