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의 거취 문제가 정국 최대의 뇌관으로 떠올랐다. 박근혜 대통령이 10일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 조작 사건과 관련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당부한 가운데, 야권은 물론 새누리당 내에서도 남 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공개적으로 제기됐다.
박 대통령은 일단 '선(先) 검찰 수사'를 강조해 남재준 원장의 즉각적인 사퇴 요구와는 선을 그었다. 박 대통령은 그러나 "검찰은 이번 사건에 대해 한 점 의혹도 남기지 않도록 철저히 수사하고 국정원은 검찰 조사에 적극 협조해야 할 것"이라며 "수사 결과 문제가 드러나면 반드시 바로잡을 것"이라고 밝혀 책임자 문책 가능성을 시사했다.
박 대통령이 국정원을 향해 검찰 수사에 적극적인 협조를 종용한 대목은 그동안 증거 위조 사실을 몰랐다고 발뺌해 온 국정원에 대한 사실상의 질책으로 풀이된다. 사태를 방치하다간 국정원의 존립 근거가 허물어질 수 있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는 상황 인식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특히 이번 사건은 전 정부에서 발생한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과 달리 남재준 국정원장 체제에서 일어난 사건인 만큼 현 정부가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궁박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남 원장이 직원들의 증거 조작 행위를 몰랐다고 하더라도 정보기관 초유의 일탈 사건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대로면 박 대통령이 약속한 국정원 개혁도 남재준 원장 체제에선 공염불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
더욱이 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 사태를 초기에 진화하지 않으면 대형 악재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도 남재준 사퇴론의 배경이 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이 남 원장의 사퇴를 공개적으로 촉구하는 등 여권 내부도 술렁이고 있다. 이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간첩이냐 아니냐는 법원이 가릴 문제"라면서 "다만 증거 위조 논란에 대해서는 국정원장이 책임지고 사퇴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공직자의 바른 자세"라고 했다. 여권에서 남 원장의 사퇴 요구를 제기한 건 이 의원이 처음이다.
이 의원은 이 사건에 대해 "대통령께서 '매우 유감' 표명은 적절하다고 본다"며 "국정원장이 사퇴하는 것이 대통령의 유감 표명에 상응하는 처사라고 본다"고 했다.
이 의원은 또 "사실 국정원장은 (대선개입) 댓글 문제,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문제 등 정치적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며 "그때마다 당은 국정원 감싸기에 급급했다. 공당으로서 도가 넘었다"고 새누리당의 '남재준 감싸기'도 비판했다.
그는 "증거 위조로 간첩을 만드는 시대는 이미 한참 지났다"며 "시대를 거꾸로 돌리려는 그 어떤 공작도 국민들은 용납하지 않는다. 국정원은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박근혜 정부를 역사에 부끄럽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민주당과 안철수 의원 등 야권도 한목소리로 남 원장 사퇴와 특검 실시를 촉구하고 있다. <조선일보>도 사설을 통해 남 원장 사퇴를 촉구하는 등 보수 진영의 여론도 크게 악화됐다.
하지만 이 같은 정치권의 비판과 여론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이 당장 남 원장을 사퇴시킬지는 미지수다. 박근혜 정부의 첫 국정원장 인사가 1년여 만에 실패로 돌아갔음을 인정하는 듯한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다. 대선개입 사건과 NLL 대화록 공개 사건 등 지난 한 해 벌어진 각종 논란이 재부상할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여론의 악화와 정치적 부담에 직면한 박 대통령이 이번 사태 발생 이후 처음으로 내놓은 "매우 유감"이라는 입장 표명이 어느 쪽으로 귀결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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