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2003년 9월. 독일 뮌스터대학 송두율 교수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청으로 한국을 찾았다. 북한에 대한 ‘내재적 접근법’이라는 학문적 방법론 때문에 ‘친북 학자’로 낙인찍혀 살아온 그였다. 37년 만에 찾은 조국. 환영에 앞서 국가보안법의 칼이 송 교수를 맞았다. 귀국과 동시에 그는 국가정보원에 의해 구금됐다.
국정원은 변호인 입회조차 허락하지 않은 채 수사를 진행했다. 피의사실이 무차별적으로 흘러나왔다. 송 교수는 북한 권력 서열 23위인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보수언론에 대서특필됐다. 희대의 간첩 사건에 나라가 들끓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나섰다. 그해 10월 13일 국회 시정연설. 노무현 대통령은 “송두율 교수에 대한 수사와 처벌의 문제는 분단 시대 극단적인 대결 구도 속에서 만들어진 법과 상황에서 지금 거론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어느 한 쪽의 극단적인 견해가 일방적으로 여론을 지배하는데 대해 상당히 우려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불구속수사 원칙을 당부한 것이다.
시정연설 분위기는 단 한 번의 박수도 없을 정도로 얼어붙었다.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는 시정연설을 마치고 본회의장을 나서는 노 대통령과 악수하는 순간조차 “검찰이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말하면 되겠느냐”고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검찰도 대통령의 의중을 거슬렀다. 송 교수를 구속하지 않으면 다른 공안 사건을 수사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결국 검찰은 송 교수를 구속 기소했다. 청와대와 검찰 사이의 긴장이 더욱 가팔라졌다. 수사를 지휘했던 박만 서울중앙지검 3차장은 승진 누락을 이유로 사표를 제출했다. 김종빈 검찰총장은 또 다른 시국 사건인 강정구 교수의 구속 여부를 놓고 불구속수사를 지시한 천정배 법무부장관의 지휘권 발동에 즉각적인 사표로 항변했다.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은 김 총장의 사표를 수리하며 “송두율 교수 사건의 경우 검찰은 엄청난 사건인 것처럼 몰아 구속했으나 법원 판결로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다”고 했다.
그랬다. 5년 가까이 이어진 재판 결과, 송 교수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송두율 간첩 사건’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검찰 공안부 사이의 악연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다. 이전까지 각종 시국 사건, 간첩 사건을 주무르며 정치의 전면에 서왔던 공안부는 노무현 정부 들어 ‘공안부 폐지’가 주요한 검찰 개혁 과제로 제시될 만큼 위축됐다. 대검찰청 공안3과와 전국 15개 지방검찰청의 공안과가 폐지됐다. 승승장구하던 공안검사들은 한직으로 밀려났다. 고문과 조작으로 생사람도 간첩으로 둔갑시키던 국정원과 검찰의 못된 버릇이 잠시 잦아들었다.
얼마 가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임채진 검찰총장은 신년사에서 “우리사회의 친북 좌익 세력을 발본색원해야 한다”고 했다. 곧바로 폐지됐던 대검 공안3과가 부활했다. 2011년 취임한 한상대 검찰총장은 직접 작성한 취임사에 ‘종북 세력 척결’을 못 박았다. 그는 “이 땅에 북한 추종 세력이 있다면 이는 마땅히 응징하고 제거되어야 한다. 공안 역량을 정비하고 일사불란한 수사 체제를 구축해 적극적인 수사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했다. 원세훈의 국정원이 댓글로 야당의 대선후보를 ‘빨갱이’로 몰아붙인 것처럼 검찰도 공안 전성시대로 돌아갔다.
정부의 성격과 공안 당국의 활개는 통계로도 상관관계가 입증된다. 지난해 12월30일 대법원의 공개 자료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 시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된 경우는 한해 29건(2006년)까지 떨어졌다. 이명박 정부 들어 점차 증가세를 보여 2012년 98건으로 치솟더니 박근혜 정부 첫 해인 2013년엔 102건을 기록했다. 지난 10년 동안 100건을 넘어선 경우는 처음이었다. 반면 무죄가 선고된 경우는 노무현 정부 때 단 한건도 없었으나, 이명박 정부에선 기소 건수의 증가에 비례해 무죄 판결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맥락에서 국정원과 검찰이 조작한 것으로 드러난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도 우연히 발생했다고 보기 어렵다. 간첩 조작 사건은 이념의 제물을 찾아내 존재가치를 입증하는 공안 당국과 ‘종북 세력’을 상존하는 위협으로 가정해 정권의 기반을 다지려는 나쁜 권력이 공생을 위해 합작한 경우에만 발생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사건은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의 불씨가 번져가던 지난해 초에 불거졌다.
여동생의 진술로부터 시작된 유우성 씨에 대한 수사는 처음부터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여동생은 “손으로 머리를 때리고 발로 몸을 차는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오빠가 다 자백했다’며 진술서를 가져와 마지못해 인정한 것”이라고 했다. “앞날이 캄캄해 탁상시계를 깬 뒤 그 유리로 자살을 시도했다”고도 했다. 수사 과정에 폭력과 강압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것도 모자라 국정원은 간첩 혐의를 입증하겠다며 외국 정부의 공문서를 위조했다. 검찰은 공문서 위조 사실을 몰랐던 것처럼 이제와 발을 빼고 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다.
국가적 망신을 초래하고 국제적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는 외교 문서 위조까지 자행하면서까지 유 씨를 간첩으로 만들려 했던 국정원과 검찰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 방어를 위해 한없이 대범해진 국정원과 검찰의 공안 본능과 과연 무관할까? 이 사건 이후 국정원과 검찰은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에 대한 내란음모 혐의 수사를 벌였다. 대선개입 사건으로 정권에 불리해진 여론 지형을 한 번에 뒤집어엎는 효과를 봤다. 그러나 이석기 의원 사건의 재판 과정에서도 숱한 조작과 왜곡 의혹이 불거졌다.
마침 이 의원에 대한 1심 판결이 오늘 내려진다. 34년 만의 내란음모 사건이다. 지난해 벌어진 일련의 괴이한 간첩 사건들의 내막을 접하며 영화 <변호인> 속 고문 경찰 차동영 경감의 대사를 떠올린다. “우리가 잡아들이는 빨갱이들이 정말 다 빨갱이라면 우리나라는 망해도 벌써 망했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노무현 변호사가 대통령이 된 지 12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우린 아직 빨갱이 사건을 조작해야 정권이 유지되는 나라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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