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임경구 프레시안 정치 선임기자 및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번갈아 담당하며, 경제는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남북관계·한반도는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국제는 이승선 프레시안 국제 선임기자, 생태는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맡고 있습니다.
이중 매주 한두 편의 칼럼을 공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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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2012년 12월 16일로 옮겨봅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문재인 민주당 후보 간의 마지막 대선후보 TV토론이 있던 날입니다.
토론에서 박 후보는 말합니다. “국정원 여직원이 댓글을 달았는지 증거도 없는 걸로 나왔다. (민주당은) 여성 인권 침해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고 사과도 하지 않는다.”
문 후보는 반박합니다. “그 사건은 수사 중인 사건이고, 지금 발언은 수사에 개입하는 것이다.”
이 토론회가 끝난 직후인 밤 11시. 서울 수서경찰서는 전격적으로 긴급 브리핑을 엽니다. “국정원 직원 김 씨의 컴퓨터를 분석한 결과 대선후보 관련 댓글 작성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경찰이 중간 수사결과 발표를 통해 박 후보의 토론회 발언을 곧바로 뒷받침해 준 셈입니다. 사흘 뒤, 박 후보는 108만 표 차이로 문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경찰의 발표는 거짓이었습니다. 4개월 뒤 경찰 스스로 ‘혐의 있음’으로 뒤집었습니다. 검찰 수사를 통해 여직원 김 씨뿐만 아니라,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대선에 개입한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허위로 드러난 경찰의 중간수사결과 발표에 법적인 책임을 질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됐습니다. 지난 2월 6일 이 사건을 맡은 1심 재판부가 공직선거법 위반, 경찰공무원법 위반, 형법상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에게 무죄를 선고했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의원의 말대로 “범죄는 있는데 죄지은 사람은 없다”는 기묘한 상황입니다.
법원은 “(중간수사 발표) 시기와 내용에서 최선의 것이었는지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며 “당시에 확인된 내용을 단정하기 어려웠던 상황을 고려해 수사 확대 여지를 밝히는 등 불필요한 오해를 피할 수도 있었다”고 하면서도 형사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피고인의 주장이나 변명이 모순되거나 석연치 않은 면이 있는 등 유죄의 의심이 간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해야…”라는 법 논리에 기댔습니다.
사건의 전체적인 흐름보다는 유죄를 확증할 수 있는 증거에 집중하는 법원의 생리를 인정한다고 해도 아쉬움이 남는 판결입니다. 무엇보다 법원의 무죄 판결 뒤 밀려오는 당혹감은 민심에 부합하는 판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일을 현재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다고 해도, 국기 문란 사건을 덮어버린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죄를 묻지 않은 법원이 진실보다는 타협을 택한 듯한 인상도 남습니다.
하지만 진짜 비판을 받아야 할 쪽은 검찰입니다. 오죽하면 재판부로부터 “검사의 주장과 논리가 우연적이고 지엽적인 사실의 조각들로 성글게 엮여 그 안에 여러 불일치, 모순, 의문이 있다”는 질타를 받았겠습니까. 새누리당 실세 의원이 국정원 인사와 대선 직전 통화한 사실을 확인하고도 검찰은 이를 전화번호만 적어 누구 것인지 모르게 법정에 냈다는 사실이 판결 뒤에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 윤석열 전 수사팀장에 대한 ‘찍어내기’에서 확인된 각종 ‘외압’ 앞에 검찰 스스로 무릎을 꿇은 결과가 1심 판결로 드러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습니다. 검찰이 2월 12일 항소장을 제출했지만, 이제라도 관련 증거를 제대로 취합해 2심 재판에서 심기일전 할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이 사건을 정권의 정통성이 걸린 문제로 보고 결사적으로 방해하는 정권의 태도에는 한 치의 변화가 없습니다.
이번 판결이 특별검사제 도입의 필요성을 더욱 각인시킨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지만, 이를 관철할 정치권의 동력이 바닥난 건 역설적입니다. 무엇보다 새누리당이 “꿈도 꾸지 마라”며 완강한 태도입니다. 지난해 12월 3일 여야가 “국가기관 대선개입 의혹에 대한 특검의 시기와 범위 문제는 계속 논의한다”고 합의했음에도 새누리당은 이제 와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치미를 뗍니다. 민주당의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지난 연말을 거치며 특검 논의에서 손을 떼어버린 민주당이 지금 다시 당위론적 차원에서 특검을 하자고 하니, 당 안팎에서 빈축만 삽니다. 특검을 도입할 의지도 수단도 없이 그저 국면을 넘기고자 하는 민주당 지도부의 무기력이 또 한 번 확인된 겁니다. 이래선 특검 도입은 무망합니다.
지방선거 전 특검이라는 최대의 뇌관을 가볍게 해체한 새누리당은 선거를 향한 거침없는 질주를 이어갑니다. 정몽준 의원과 김황식 전 국무총리의 서울시장 경선 성사가 가시권에 접근했습니다. 소위 ‘빅 매치’라는 애드벌룬을 띄우고 관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언론에 보도된 여론조사 결과와 달리, 여야에선 이미 두 사람 모두 박원순 서울시장에 비해 우세를 보이고 있다는 내부 보고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17곳의 광역단체장 선거 가운데 야권에서 가장 경쟁력 있다고 평가받는 박원순 시장이 재선에 도전하는 서울이 이 지경인데, 다른 16곳의 사정은 미루어 짐작할 만합니다.
새누리당의 동물적인 선거 감각도 놀랍지만, 집권 2년 차를 맞은 박근혜 대통령의 행보는 표를 긁어모아 새누리당에 무더기로 안겨주는 것 같습니다. 연초 신년 기자회견에서 언급한 “통일은 대박” 발언이 공전의 히트를 치며 한 달이 넘도록 회자됩니다. 누구도 거부하기 힘든 통일 담론을 거대 보수언론과 함께 전면에 내세운 치밀한 기획입니다. 물론 통일대박론은 한반도 현안을 풀어나갈 구체적인 방안이 미흡하고 실효성에 의문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북한 붕괴를 전제로 한 위험한 발상이 배경에 깔려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도 없습니다. “북한 붕괴를 전제로 한 통일대박론이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엄청난 부담을 지우지 않을까 우려 된다”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지적은 새겨들어야 할 대목입니다.
하지만 선거 문법으로만 보면 통일대박론은 지방선거의 대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 당장 박 대통령이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하며 시작된 남북 접촉이 남북 고위급 회담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협상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우리가 주도하는 형국으로 진행되고 있어 결렬되면 북한 책임이고 성사되면 박근혜 정부의 성과로 챙길 수 있습니다. 결국 통일대박론에 깔린 위험한 의도와는 별개로, 국내 정치적으로는 상당한 호응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지난 대선 때 박 대통령이 경제민주화와 복지 담론을 주도해 성공을 거둔 바와 같이 올해는 진보진영의 전유물이던 통일 담론을 주도해 정국을 이끌어가겠다는 구상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오는 4월에 있을 아시아국 순방 일정을 바꿔 한국 방문을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우리 정부는 외교력을 총동원하다시피 해 미국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이 최근 “한국·일본과 남북한 통일문제를 협의하고 있으며, 중국과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박근혜 정부의 통일담론에 호응한 데 이어 지방선거를 코앞에 둔 4월 말 오바마 대통령이 방한해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하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되는 셈이죠. 한일관계의 파탄에 따른 우려가 비등한데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가 역사 문제 등으로 일본과 첨예한 대치선을 긋고 있는 배경에도 국민들의 반일 감정을 국내정치에 활용하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일본 정치인들의 과거사 부정 발언이 혐한 정서와 맞물려 증폭되는 맥락에 정치적 이유가 작용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내치의 혼란상도 빠르게 수습해가는 모습입니다. 그토록 말 많고 탈 많던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을 전격 경질한 데 이어 비교적 합리적이라는 평을 받는 4선 의원인 새누리당 이주영 의원을 후임으로 발탁했습니다. 그동안의 불통 논란을 의식한 듯 당과 청와대 간의 원활한 소통에 무게를 실은 인사입니다. 청와대는 아직까지 추가 개각은 없다는 입장이지만, 지방선거 출마자들을 중심으로 개각 요인이 발생할 수 있어 인사를 통한 분위기 쇄신 카드는 박 대통령의 손에 여전히 들려 있습니다. ‘비정상의 정상화’의 우선순위에 오른 공공기관 개혁 문제도 개혁의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공기업 노조의 ‘철밥통 깨기’ 여론에 편승해 거침없이 전개해 나갈 겁니다.
이처럼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지방선거를 향해 성큼성큼 나가는 반면, 야권은 갈팡질팡합니다. ‘김용판 무죄’와 특검 관철 실패의 후폭풍을 겪고 있는 민주당은 지도부가 혁신안을 연달아 내고 당내에 혁신 모임을 꾸려 반전을 꾀하지만, 크게 주목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권이 여론의 비난에 떠밀려 마지못해 기득권을 조금 내려놓은 듯한 모양새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보여주기 식 혁신 경쟁의 한계인 거죠. 야당이 제출한 황교안 법무부장관, 서남수 교육부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도 실제로 관철하고자 하는 치밀한 전략의 결과라기보다는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했기 때문에 무산된 겁니다. 사정이 이런데 대중들이 민주당을 보고 박수 칠만한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제3정당을 만들고 있는 안철수 의원 쪽도 선거 일정에 떠밀려 신당을 추진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탈이 납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등이 지방선거 전 창당보다는 좀 더 장기적으로 제대로 된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으나, 이는 오래전에 기각됐습니다. 당면한 선거를 방기하면 ‘안철수 현상’이 언제 어디로 흩어질지 모르며, 전국단위 선거를 위해서는 신당 추진이 불가피하다는 현실론이 득세한 탓입니다. 추후 공개할 정강정책을 봐야겠지만, 안 의원 측이 최근 발표한 새 정치 플랜의 내용은 전혀 새롭지 않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탈(脫)이념과 실용주의 정당을 지향한다면서 이념적 지향성을 흐리다 보니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기존에 밝힌 것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만 취사선택한 것 같은 정체성의 혼란으로 비치는 겁니다.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머리 좋은 사람이면 누구나 낼 수 있는 정책”이라고 혹평을 했더군요.
예컨대 안 의원 측이 ‘성장친화적 복지’를 표방했는데, 이는 복지에 관한 소극적인 인식이 묻어나는 대목입니다. 복지와 성장이 배치되는 관계가 아닌데도 굳이 ‘성장친화적’이라는 수식어를 썼으니 말이죠. 보편적 복지도 선별적 복지도 아닌 절충의 형태인데, 이는 박 대통령이 이미 밝힌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국민적 동의를 전제로 한 점진적 증세” 역시 박근혜 정부의 기본 입장입니다. 이처럼 새 정치 구상에 비판 일색이다 보니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된다고 태스크포스(TF)가 혼자 붙잡고 하다가 이렇게 된 것”이라는 내부의 푸념이 나오기도 합니다.
민주당과 안철수 세력 등 야당에게 정말 시급한 건 뭘까요?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시대적 전환은 아니라 하더라도 지금의 한국에 변혁을 가져올 세력은, 그리고 그 지도자는 누구일까?”라고 묻습니다. 또한 “사람이 누구인가는 둘째 문제다. 어려워지기만 하는 서민 생활을 그리고 대외적인 난국을 타개할 명제를 제시할 것인가가 핵심”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정당과 정치 리더의 존재 이유에 관한 가장 직접적인 물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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