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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스트 탄생 시점은 미국의 '철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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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스트 탄생 시점은 미국의 '철도 전쟁'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21> 남북전쟁과 철도

1861년, 남북전쟁이 시작될 무렵 연방의 정규균 병력은 1만6000명에 불과했다. 이 중 상당수는 서부에서 인디언을 내몰고 백인 정착지를 보호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남군과 북군은 전쟁에 소요될 젊은이들을 새로 불러 모아야 했다. 1861년 7월, 의회는 지원병 모집을 승인했다. 통상적인 복무 기간이 3개월에 불과했던 것에 비해, 새로 모집되는 지원병은 의무 복무 기간을 3년으로 정했다. 그러나 지원병 제도로는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었던 연방정부는 1863년 3월, 의회의 동의를 얻어 성인 남성 대부분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 강제징집법(national draft law)을 동원해야 했다. 단 군대를 대신 보낼 사람을 고용하거나 300달러를 정부에 내면 징집을 피할 수 있었다. 부자들은 종군기자들이 취재한 뉴스를 통해 전쟁을 경험하면 족했다.

초기 전세는 남군(南軍)에 유리하게 진행됐다. 전쟁 초반 전투에서 남군이 북군(北軍)에 연이어 승리를 거두게 된 이유가 있었다. 먼저 전쟁에 임하는 병사들의 의지에서 차이가 있었다. 북군은 다양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돼 있었다. 북군 병사의 경우, 남부의 반란을 제압하고 연방을 유지해야 한다는 지휘부의 의지를 절대적으로 공유하지 않았다. 노예제를 반대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대부분 가난한 이민자 출신 노동자들로 구성된 병사들은 목숨을 바쳐 싸워야 할 공통된 가치를 갖지 않았다. 또 대부분의 전투 현장이 남부였기 때문에 낮선 곳에서 원정군이 가져야 하는 핸디캡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전쟁을 지휘하는 장수들도 수행 목표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결정적인 순간에 작전을 회피하거나, 성급한 공격을 실시, 피해를 자초하기도 했다. 그러나 군 경험이라고는 잠깐의 민병대 복무 경력이 전부인 링컨(Abraham Lincoln)은 전쟁의 성격을 북군의 장수들보다 더 잘 간파했다. 링컨이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었다는 게 북부로서는 다행스러울 정도였다. 링컨은 전쟁의 전략을 이해하지 못하는 최고 사령관을 계속 갈아 치웠다.

반면 남군은 북군의 승리가 남부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지원을 했다. 남부의 백인 대부분은 전쟁을 지지했다. 전투를 수행함에 있어서도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릴 수 있는 남군이 유리했다. 뛰어난 야전 능력에 더해 병사들의 신뢰까지 확보했던 리(Robert E. Lee) 장군이라는, 발군의 인물이 있었다는 점도 남군의 전력을 탄탄하게 했다.

그러나 뛰어난 전략과 용맹한 군인들이 전쟁의 승패를 갈랐던 이전의 전쟁과 남북전쟁은 그 양상이 조금 달랐다. 남북전쟁에서는 세계 곳곳에서 앞으로 전개될 '산업화된 전쟁'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링컨은 북부의 발전된 산업 시스템을 전쟁에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영토를 점령하는 고전적인 방식이 아니라, 적군의 자원을 파괴시켜 전투 능력을 상실시켜야 하는 현대적 군사전술을 이해하고 있었다.

▲ 이동시간과 비용에 있어서 상상할 수 없는 효율성을 보인 철도는 전쟁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놨다. 철도를 이용하는 북군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 http://lancasteronline.com/blogs/civilwar/wp-content/uploads/2012/04/RailroadExhibit1.jpg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꾼 '남북전쟁', 그리고 '철도'

남북전쟁의 승패는 군인들의 용맹성이 아니라, 두 지역이 갖고 있는 전쟁 수행 능력에 의해 판가름 났다.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중 하나는 철도였다. 남북전쟁 당시 북부의 철도망은 미국 전체 철도망의 7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체 철도 설비의 81%를 보유하고 있었다. 북부에 깔린 철도 길이는 3만2186킬로미터(km)였던 반면, 남부에 깔린 철도 길이는 1만 4484킬로미터에 불과해, 북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북군은 전쟁이 시작된 후 남부의 철도망을 노려, 노선을 파괴시키거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철도를 이용한 대량 수송이 가능해지면서 군대의 전술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 한 번에 수 백 명의 병사를 이동시킬 수 있게 됐다. 열차편을 이용해 손쉽게 수 만 명을 집결시키거나 수 만 명의 병사를 지원할 수 있게 됐다. 광활한 대륙에서 말먹이와 무기, 탄약, 식량 등의 보급품을 마차나 도보로 이동시켰을 때와 비교하면, 철도의 능력이라는 것은 마치 신화에서나 가능한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철도는 군대의 전술도 바꿔 버렸다. 과거의 작전은 아군이 유리하고 적군이 불리한 지형을 선점하거나, 신속한 진격이 가능한 주요한 장소를 택해 진행됐는데 철도가 등장한 이후에는 철도 노선 부근을 전쟁터로 삼았다.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스타크래프트에서 게이머가 충분한 전투 유닛을 쌓게 되면 대규모 러쉬에 대한 유혹에 빠지듯, 전쟁 지휘관들은 소규모 전투로 힘을 낭비하는 것보다, 물량을 마음껏 쏟아붓기 위해 철도를 활용한 대규모 전투를 선호하게 됐다.

철도의 유용성을 간파한 남과 북은 철도를 보호하면서 최대로 활용하는 한편, 상대방의 철도를 파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남과 북이 맞붙었던 전선의 가까운 곳에 있었던 미국 최초의 철도 노선, 볼티모어-오하이호선(Baltimore-Ohio) 부근의 선로와 역, 차량기지 등은 양 군대의 주요 목표였다. 특히 대부분 북군이 관할하고 있던 볼티모어-오하이오 구간에 대한 남군의 공격은 집요했다.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마틴스버그에는 '볼티모어 앤 오하이오' 철도회사의 차량기지가 있었다. 1861년 5월 남군의 스톤월 잭슨(Stonewall jackson) 장군이 이끄는 특공대가 이 차량기지를 습격해 기관차와 객차, 화차 등 50여 대를 파괴하거나 강탈했다. 잭슨 장군은 1861년 7월 불런 전투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북군의 강력한 공세를 저지하고 이어진 전투에서도 연전연승을 이끌었던 명장이다. 스톤월, 즉 철벽, 또는 바위벽이란 별명이 말해주듯, 남북전쟁에서 잭슨 장군의 이름은 승리를 보장하는 징표였다.

그러나 스톤 월 잭슨 장군은 1863년 봄 챈슨러즈 빌 전투에서 승리한 후 주둔지로 돌아가다 야간 매복 중이던 아군의 오인 사격으로 목숨을 잃는다. 일찍 죽지 않았다면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남군이 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스톤월 잭슨은 탁월한 군인이었다. 남북전쟁 이후 마틴스버그 차량기지는 복구되지만, 1877년 '볼티모어 앤 오하이호'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을 통해 또다시 역사에 등장한다.

▲ 스톤월 잭슨 장군의 마틴스버그 철도 차량기지 습격사건을 알리는 간판이 처마밑에 걸려있다.1861년 잭슨 장군이 마틴스버그에서 강탈한 기관차를 말로 끌고 와서는 이 곳에서 선로위에 올려놓고 남부연방으로 보냈던 사실을 알리고 있다. ⓒhttp://img854.imageshack.us/img854/1596/13greattrainraid.jpg

남군과 북군은 상대방의 철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선로를 파괴하거나 달리는 열차를 습격했다. 열차를 습격하는 방식은 양 군이 비슷했다. 선로 중 일부를 제거해 달리던 열차가 탈선하게 되면 기관차, 객차는 전복되고 큰 혼란에 빠진다. 이때 매복하고 있던 병사들이 공격을 가해 상대 측에 치명상을 입혔다. 이런 식의 열차 공격은 남북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도 인디언들이 백인들의 열차를 습격하는 방식으로 이용됐다.

북부가 철도망이 훨씬 광대했다는 것은 북부의 산업이 남부보다 앞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 수행 능력에서 북부와 남부는 커다란 차이를 갖고 있었다. 북부의 인구는 2200만 명이었으며 징집 연령에 이른 성인 남자는 400만 명이었다. 이에 반해 남부 인구는 900만명이었고 그 중 350만 명은 남부인이 잠재적 '적대세력'으로 여겼던 노예였다. 전투 연령에 이른 남자는 120만 명에 불과했다. 이런 이유로 병력 부족 현상을 겪은 남부에서는 전쟁 말기에 "노예에 대한 남군입대를 허용하자"는 주장 나와 찬반 양론으로 인해 혼란을 겪는다. 흑인 노예의 남군 입대를 반대한 사람들은 "만약 노예가 훌륭한 군인이 된다면 노예제도에 대한 우리의 전체 이론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하우엘 코브의 주장에 동의했다.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에 노예로 부려도 도덕적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노예의 남군 입대는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는 문제였을 것이다. 흑인 노예들의 남군 징집은 남군의 패배로 현실화되지 못했다.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또 중요한 것은 전쟁 자금이다. 북부의 은행 예치액은 1억8900만 달러로, 미국 전체 예금액의 81%에 이르렀다. 보유한 순금은 5600만 달러였다. 반면 남부는 예금액이 4700만 달러, 금 2700만 달러로 북부와 전쟁을 치르면 치를수록 전쟁 능력이 소진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돈이 없던 남부는 전쟁 막바지인 1864년에 15억 달러나 되는 지폐를 발행했는데 결국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몰고 와 전쟁 중 물가가 9000%나 상승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북부의 물가가 80% 상승한 것에 비교하면 남부의 경제가 얼마나 심각한 국면으로 내몰렸는지 알 수 있다.

외형적인 규모의 차이 뿐 아니라 발전된 산업 시스템이 만들어 내는 기술의 격차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 남군과 북군의 병사들은 머스켓 총을 사용했다. 우리는 나폴레옹 시대부터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이르기까지 이 머스켓 총의 사격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현대식 소총과 큰 차이가 있었다. 머스켓 총의 총알은 종이로 감싼 봉지 안에 화약이 같이 담겨 있다. 병사가 입으로 종이 끝부분의 총알을 물고 봉지를 뜯어 화약을 총의 약실과 총구 안에 부어야 했다. 그후 입에 물고 있던 총알을 총구에 집어넣은 뒤 총열 아래쪽에 꽂혀 있는 긴 쇠침을 빼내 총구에 넣은 총알을 총 안쪽의 약실까지 밀어 넣는다. 쇠침을 다시 원래의 자리에 꽂은 다음 목표물을 조준한 후에 방아쇠를 당겨 총을 발사한다.

최고로 숙달된 병사가 1분에 4발을 발사 할 수 있었고 보통 병사들은 2발을 발사 할 수 있었다고 한다. 1분에 600~700발을 발사할 수 있는 현재의 소총에 비하면 원시적인 무기다. 게다가 이 머스킷 총은 유효 사거리도 짧았고 총알에 회전력을 더할 수 있는 총열안의 강선도 없었다. 쇠파이프 같은 총신을 가지고 있어 파괴력도 약했다. 그때 볼티모어의 올리버 윈체스터가 만든 연발 소총이 북군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지상전에서 남군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무엇보다 철강 기술의 발달로 대포의 파괴력이 커졌다. 전통적인 전술은 소용없었다. 조직적인 대열을 갖춰 집단으로 전투를 했던, 수 천 년을 이어온 전투 방식이 하루아침에 무력화됐다. 전장은 혼란스러워졌다. 각각의 병사들은 흩어져서 몸을 숨기기에 바빴고 적의 총알이나 포탄을 피하기 위한 엄호물을 찾아야 했다. 요새를 만들고 참호를 파는 일이 생존 본능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남북전쟁은 참호전이라고 불리는 1차 세계대전의 예고편이었다. 산업 자본주의의 토대 위에서 벌어진 남북전쟁은 생산력이 전쟁에 절대적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최초로 보여준다.

▲ 철도는 남군과 북군이 사활을 걸고 싸웠던 대상이었다.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f/fa/1st_Ohio_Volunteer_Infantry_(etching_by_Frank_Leslie,_1861).jpg

또 하나의 전쟁, 대륙횡단철도를 둘러싼 '동서전쟁'

남과 북이 사활을 걸고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에 또 다른 전쟁이 준비되고 있었다. 동서의 전쟁, 대륙횡단철도 건설을 둘러싼 전쟁이었다. 1862년 대륙횡단철도 건설이 결정되고 관련 법안이 통과되자 두 개의 신설회사가 산업계의 전면에 부상했다. 하나는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서 시작하는 대륙횡단철도의 서부 철도 건설을 담당하는 센트럴 퍼시픽 레일로드(Central Pacific Railroad:이하 CP)였고, 다른 하나는 아이오아주에서 시작하는 동부 철도 건설을 맡은 유니언 퍼시픽 레일로드(Union pecific Railroad:이하 UP)였다. CP를 이끄는 사람들이 캘리포니아에서 성공한 네 명의 상인들이었다면 UP는 163명의 이사진이 태평양 철도법에 따라 임명됐다. 여기에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5명을 포함해 철도관계자, 은행가, 정치인들이 참여했다. 이런 인적구성은 철도회사가 온갖 비리와 커넥션에 휘둘릴 수 있는 좋은 토양을 만들어냈다.

이사진 중에는 UP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듀란트라는 독보적 인물이 있었는데 대륙횡단 철도 건설과정에서 UP가 일으킨 많은 문제들에는 언제나 듀란트가 관계되어 있었다. 1863년 10월 29일 열린 UP의 주주총회에서 기존 이사진들이 해임되고 30명의 새로운 이사진이 선출된다. 사장에는 존 에이 딕스 장군이 취임했다. 그러나 딕스는 한물 간 65세의 노인이었고 실질적 지휘자는 부사장인 듀란트가 맡았다. 듀란트의 목적은 철도가 아니라 돈이었다. 철도가 돈벌이의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확신에 따라 철도사업에 열성적으로 뛰어 들었다.

UP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은 철도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을 갖고 있는 그렌빌 멜렌 닷지가 책임자가 되길 바랬다. 링컨이 대통령 선거 유세 때 대륙철도에 대해 의견을 나눴던 인물이 바로 닷지였다. 닷지는 남북전쟁이 터지자 북군의 장군이 되어 전투를 지휘했다. 닷지는 남북전쟁중에도 소질을 발휘하여 북군의 병력과 보급품 수송을 위한 철도 건설을 책임졌다. 특히 북부에서 미시시피주 코린트까지 103킬로미터(Km)의 철도를 놓는 등, 신선을 건설하거나 기존선을 보수하는 일에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다.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 장군은 닷지 장군을 가장 유능한 군인이자 동시에 숙련된 철도 시공자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닷지가 전쟁 수행을 위해 모빌-오하이오 래일로드 노선의 부서진 다리에 임시로 통나무 교각을 놓았는데, 전쟁이 끝난 후 철교를 부설하기 위해 기존 교각을 해체하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는 일화가 있다. 공사를 감독했던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은 "이렇게 튼튼한 걸 보니 닷지 장군은 전쟁이 끝도 없이 계속될 거라고 생각 했나 봅니다"라며 닷지의 철두철미함에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닷지는 북군의 장군답게 노예해방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난 흑인들이 해방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피흘리며 싸우면서, 농사도 짓고 있으니 그들 없이는 안됩니다"라고 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북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노예해방을 원하지 않았고 흑인들의 북군입대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1860년대의 환경에서 닷지의 노예해방 신념은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그러나 노예해방에 대한 확신과 다르게, 원주민인 인디언에 대한 태도는 무자비했다. 철도 건설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파괴하게 될 인디언 공동체에 대한 닷지의 태도는 야생동물에 대한 대응 방식과 다를바 없었다. 닷지는 당장 UP의 책임자가 되어 달라는 사람들의 요구를 계속 거절했다. 닷지는 링컨을 도와 일단 전쟁을 끝내고 대륙 횡단 철도 사업에 나서겠다는 입장이었다.

1862년 닷지는 총사령관 그랜트 장군의 보고를 전달하기 위해 대통령 링컨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대륙횡단철도 건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대통령의 책상위에는 대륙횡단철도의 출발 기점이 되길 원하는 지역의 도시와 마을들에게서 보내온 청원서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닷지는 철도 기술자답게 오직 최상의 철도 노선만을 고려했으나 정치인 링컨은 어디에 역을 세워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닷지는 철도 건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대통령에게 전했다. 사기업이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많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정부가 나서서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 닷지의 입장이었다. 엄청난 비용과 인력, 기술적 뒷받침이 있어야 가능한 철도 인프라는 정부가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민영화를 추진해 철도를 사적 기업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한국의 관료들과 철도 정책 연구기관 보다 150년 전 철도 전문가의 혜안이 더 뛰어났던 것 같다.

링컨은 닷지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하진 않았지만, 정부가 철도를 건설하는데 아낌없는 뒷받침을 해줄 것이라고 약속을 했다. 연방정부가 철도회사에 해줄 수 있는 것은 철도 노선부지와 주변의 땅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광대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주인 없는 땅을 내어주는 일이라 정부로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철도 노선 주변의 땅을 대규모로 갖게 되는 철도 회사에게는 커다란 특혜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철도 주변 마을과 도시에 상권이 형성되고, 땅값이 상승하자 철도회사와 그 주주들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철도 주변의 땅은 주인없는 땅이 아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땅이었다. 철도 건설 부지를 정부가 제공하는 것은 곧 인디언 공동체의 삶을 파괴시키겠다는 것을 전제로 했다.

대기업, 주식회사, 그리고 '언론 장악'과 '로비스트'의 탄생

동부와 서부에서 비로소 대기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규모의 회사가 생기자 대기업에 걸맞는 사업 방식도 하나 둘 씩 생겨났다. 먼저 횡단철도 건설 사업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사람들의 입을 막아야 했다. 바로 언론이었다. 언론을 길들이는 방식은 돈이었다. 오늘 날 한국에서도 유용하게 쓰이는 방식이다. CP가 발생시키는 문제들은 언제부터인가 지역 유력지 <새크라멘토 유니언>에 실리지 않게 됐다. 철도 경영진들의 정책과 철도 회사가 만들어 줄 장밋빛 미래에 대해서만 지면이 할애됐다. 철도 공사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살인적인 노동 조건과 저임금, 사측의 반인륜적 감독 행위 등은 가려졌다. 자본이 미디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거대 철도회사가 몸소 시범을 보인 결과다. <새크라멘토 유니온> 편집장은 1863년 2000달러 상당의 CP 주식을 인수했고, 1874년에 1600달러의 주식을 추가로 받았다. 워싱턴에 파견된 특파원도 CP의 주식을 받았다. 대기업이 '뇌물'과 '선의의 기증'을 동의어로 만든 역사는 꽤 오래된 셈이다.

▲ 크레디트 모빌리에의 주식. UP의 경영진들은 크레디트 모빌리에의 주식을 정부와 의회의 유력인사들에 제공하면서 철도산업을 거대한 부정과 비리의 탑으로 만들었다. ⓒhttp://images.amcnetworks.com/blogs.amctv.com/wp-content/uploads/2011/12/RailwayShareFront.jpg

대륙 횡단 철도 건설에 나선 이들이 당면한 문제도 결국 돈이었다. CP와 UP의 관계자들은 철도법의 개정을 위해 정신없이 뛰어 다녔다. 철도법 개정을 통해 연방정부의 철도 지원을 늘리는 것이 철도 회사의 생존과 이익에 직결됐기 때문이었다. 대륙 횡단 철도 관계자들은 의회가 있는 워싱턴에서 의원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호텔에 진을 쳤다. UP의 듀란트 부사장은 조셉 스튜어트에게 25만달러의 회사채를 공작금으로 넘겨주었다. 조셉은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장군이었던 셔먼의 형을 비롯, 많은 의원들에게 공작금을 뿌렸다. 새로운 철도 법안 작성에 나선 변호사들도 한 몫씩 챙겼다. 의원들이 자주 모이는 호텔의 로비에는 철도회사에서 파견된 이들이 신발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이들은 로비에서 정치인들을 매수한다는 의미로 '로비스트'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로비스트의 활동이 합법적으로 보장되는 미국 사회에서 그 첫 기원은 철도회사들이었다.

철도회사의 로비를 받은 의원과 변호사들의 머리에서 새로운 태평양 철도법이 나왔다. 링컨은 1864년 7월 2일 이 법안에 서명을 한다. 대륙 횡단 철도 건설을 맡은 CP와 UP의 1차 담보 채권을 국채와 같은 액수로 마련할 수 있도록 했다. 선로가 32킬로미터만 완성되도 차관으로 제공할 국채를 발행할 수 있도록 했다. 철도회사에 주는 무상 불하 토지도 과거의 법에 비해 두 배로 증가시켰다. UP의 경우 투자 유치 확대를 위해 UP주의 액면가를 1000달러에서 100달러로 분할했다. 1인당 보유한도도 없앴다. 철도회사에 대한 파격적인 정부 보조가 시작된 셈이다. 철도 때문에 미국 사회에 새로 등장한 것은 로비스트만이 아니었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가장 대표적인 기업 형태인 주식회사 형태가 자리를 잡게 된다.

거대 장치 산업인 철도는 어느 한 사람이 소유한 돈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 십시일반 사람들로부터 돈을 모금해야 했고, 이 모금된 돈에 수익을 붙여 돈을 댄 사람에게 돌려줘야 했다. 또한 이 돈은 안정적으로 관리 되어야 했고, 사회가 인정한 증서로 소유권을 인정받도록 해야 했다. 투자액의 크기에 따라 경영에 대한 발언권이나 지배권을 확보하는 기업 체제도 필요했다. 투자한 돈 만큼의 증서를 주식이라는 이름으로 제공했다. 이 주식은 기존에 돈을 빌려주고 받는 차용증과 다른 것이었다. 또 투자자는 일정한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단 회사에 대한 무한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투자한 액수만큼 '유한 책임'을 지면 됐다. 대신 기업이 성공할 경우 투자액 이상의 배당금을 받을 수 있었다. 주식의 매각을 통해 현금을 확보할 수도 있었다. 이런 특성들은 이 새로운 기업 형태를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가장 일반적인 기업 형식으로 만들었다.

주식회사의 등장은 또 다른 파생 기업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바로 신용회사, 신탁회사들이었다. 미국 최초의 신탁회사는 UP의 부사장 듀란트가 만든 '크레디트 모빌리에 오브 아메리카'였다. 듀란트는 크레디트 모빌리에를 만드는 초기과정에서 30만 달러를 챙기기도 했다. 듀란트는 크레디트 모빌리에에게 철도 공사의 시공을 맡겼다. 이 과정에서 고도의 금융 기법, 혹은 희대의 사기 기법이 발생한다. UP가 크레디트 모빌리에에게 공사대금을 수표로 지불하면 크레디트 모빌리에는 그 돈으로 UP의 주식과 채권을 매입했다. 일종의 내부거래가 이뤄지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식 가격이 상승했고, 이익을 챙김과 동시에 그 주식을 담보로 차관을 얻어 자본금을 늘렸다. 크레디트 모빌리에는 이렇게 모아진 돈의 상당수를 정치권 로비, 뇌물 비용으로 썼다.

▲ 산업을 보호하는 자는 누구인가 - 자본주의의 실체를 꼬집은 1883년 도의 삽화. ⓒhttp://hypocrisytoday.com/graphics/puck.gif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돈 케코(Don Keko) 교수는 미국 역사상 파문이 가장 컷던 4대 스캔들을 언급했던 적이 있다. '부적절한 관계'라는 유행어를 낳기도 했던 1998년 클린턴의 르윈스키 스캔들, 1972년 촉발 돼 닉슨 대통령의 사임을 불러왔던 워터게이트 도청사건, 1922년의 해군 석유저장시설과 관련된 티포트 돔(Teapot Dome)사건, 그리고 1872년 터졌던 크레디트 모빌리에 스캔들이 그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악했던 사례가 바로 크레디트 모빌리에 스캔들이었다고 돈 교수는 말한다. 정부와 의회의 유력인사들이 크리티에 모빌리에의 뇌물성 주식을 받은데다, 부통령까지도 연루 되었다. 하원에서 6개월 동안 지속된 청문회에서는 UP와 CP의 고위인사들이 증인석에 섰다. 1872년 9월 4일 자 <뉴욕선>지에 실린 헤드라인 기사는 크레디트 모빌리에 스캔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기의 왕 크레디트 모빌리에는 의회를 어떻게 사취했는가?", "대규모 뇌물 사건의 주범인 국회의원들은 시민들에게서 돈을 빼앗고, 지금은 국가의 '강도'를 뒤에서 돕고 있다. 과연 그들의 그 많은 재산은 어디서 났을까?"

남북전쟁의 영웅 그랜트 장군이 낙선의 위험에까지 몰렸던 것도 크레디트 모빌리에 스캔들이 민심을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UP의 전방위 뇌물 공세는 행정부와 의회의 특혜로 철도 경영진들을 웃음짓게 했지만, 시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정부 기구들을 부패와 비리의 온상으로 만들어버렸다.

철도는 자본주의의 모든 것을 탄생시켰다. 주식회사, 대기업, 신용을 이용한 거래, 도전 정신을 만들었고, 언론 장악, 금융 사기, 부정부패, 비리, 뇌물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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