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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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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98>

일본

작년 초까지 세 번을 다녀왔다. 일본엔.

4332 년(1998년) 겨울 가와사끼(川崎) 시의 초청으로. 4333년(1999년) 봄 교토(京都) 장래세대를 위한 재단 초청으로 '공공성(公共性) 세미나'에. 그리고 4334년(2000년) 봄, 교포잡지 《새누리》 초청의 한일 세미나를 위해 이즈(伊豆) 반도에.

4332 년 겨울.

나리타 공항에 내리자 맨 먼저 만난 마이니찌신문 기자가 대뜸 물었다.

"왜 이제 왔는가?"

왜 이제 왔는가?

묘한 질문이었다.

가슴 아리고 정다운 질문,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의 무성의를 탓하는 뉘앙스도 들어있는 참으로 묘한……. 대답을 못했다.

다음 질문이 날아왔다.

"일본에 도착한 첫 소감은?"

"민족적으로는 원수의 나라, 개인적으로는 은인의 나라에 왔다. 두 느낌은 과연 어떤 관계일는지?"

"좋은 관계이길 바란다."

재미있는 기자다.

아! 공항에 연극연출가 가라 쥬로(唐十郞)형이 나와 있었다. 내가 연금돼 있던 마산요양원으로 달러 한 보따리를 갖고 와 배를 사서 나를 중국으로 탈출시키겠다던 그를 지금 도쿄에서 만난 것이다. 세월이란 무엇인가? 장소란 또 무엇인가?

반갑게 대화하며 가와사키까지 함께 갔는데, 그 대화는 회정할 때 도쿄의 한 호텔에서 텔레비전 대담으로까지 이어졌다. 그 대담에서 동양의 현대예술과 율려의 관계를 말했으나 그 끄트머리조차도 이해되지 않았다.

가와사키의 환영회 자리나 강연회에서도 역시 동북아시아의 세계사적 책임과 새로운 문화원리로서의 율려의 발견을 강조했으나 청중, 언론이 모두 다 어렵다는 반응이었고 주최측인 이인하(李仁夏) 목사님, 배중도(裵重度) 선생, 이다바시(板橋) 씨 등이 모두 다 고개를 외로 꼬았다.

하하하.

실패다.

한국에서도 역시 어렵다고 한다. 아마 현대화된 중국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니 유럽이나 미국이나 이슬람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생각 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나는 내내 밀어붙였다. 사상도 어떤 점에서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추억일 수 있는 것이니 훗날의 추억을 위해 지금 씨뿌린다는 배짱으로.

도미야마(富山) 선생과 홍성담(洪性潭) 아우의 2인전, '광주'가 전시되었다. 성담 아우의 역사화 속에는 나의 초상화도 있었다. 나는 이미 역사가 돼버렸나? 아직도 생성중에 있는 미확인 인생일텐데……. 몇년 뒤 개인전에서 내가 깜짝 놀라 격찬한 성담 아우의 '고문과 명상'의 주제의식이 예감처럼 떠돌고 있었고, 도미야마 선생의 '초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이며 풍자적이면서도 애수에 가득찬' 선구적인 동아시아 예술 앞에 나는 자주 자주 발을 멈추어야 했었다.

임진택 아우가 각색하고 연출한 〈밥〉이 공연되었고 거기 현지출연한 배중도 선생의 따님이 재미있었다.

우리는 2, 3일 뒤 가와사키 곁에 있는 한 도시, 그곳이 가나가와(神奈川)던가? 하여튼 그곳의 여성들 생명운동 모임에 초대되었다. 젊은 주부들이 몇십명이고 줄을 이어서 자기활동의 내용과 의미와 방향 및 자기 평가를 계속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생활적, 구체적이면서도 열정적이었다. 숟가락이 다섯 개, 젓가락이 일곱 개, 콩이 세 사발, 팥이 두 사발 반하고도 일곱 알 식이었다. 나는 그만 깜박하고 반해버렸다.

일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작지 않은가? 역사와 사회의 삶은 조각나버린 것인가? 어디서 언제 포괄적 담론과 연결될 것인가?

이 순간 한 여성간부가 마이크를 잡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데, 꼭 귀신한테 들킨 느낌이었다.

"이 모든 우리의 활동은 여기 모신 김지하 선생의 '동북아시아 생명공동체운동'의 일환으로 기획되고 추진되고 평가됩니다. 우리의 성공은 바로 김지하 선생의 올바른 지도노선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한말씀을 듣기로 합니다. 박수합시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박수 속에서 일어난 내가 뭐라고 답사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말할 때나 그 뒤 돌아올 때나 떠나지 않고 나를 붙잡은 것은 역시 쓰루미 스케 선생의 《일본제국주의 정신사》의 마지막 '일본의 미래의 해방은 여성들과 피차별소수 민중들에게 맡겨질 것이다'란 구절이었다.

우리 일행은 나, 아내, 그리고 김민기 아우와 김영동 아우 네 사람이었다. 우리는 교포 음악인 전월선(田月仙) 부부의 신세를 톡톡히 지고 있었다. 전월선 부부의 인도로 우리는 도쿄로 와 히비야 공원의 한 극장에서 교포연출가 김수진(金守珍) 아우가 연출한 뮤지컬 〈김지하〉를 보았고 박수 속에서 방일인사를 마쳤다. 나는 인사 속에서 왈,

"나는 오늘 드라마에서 일본말과 한국말이 번갈아 혼성적으로 발음되는 현상을 중요시한다. 앞으로 한국과 일본은 교포들을 통해서 또는 직접적으로 문화에 있어서의 새로운 창조에 협력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동북아시아 발(發) 세계 문화혁명의 시작이 될 것이다."

이튿날 가부끼를 보았다. 배울 점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의 탈춤과 탈굿에 비해 근원적인 영적 에너지가 약함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교토에서 쓰루미 선생과 간사이지방 문화계 인사들의 정다운 환영을 받았고 전통 일본가옥인 아카데미 호텔의 다다미 방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마산 방문 이후 처음으로 쓰루미 선생과 대좌하였다.

"이 집 숲속의 신사(神社)도 백제인 황후가 만들었습니다. 교토의 모든 전통건축들에 백제인의 창의력과 문화력이 배어 있습니다. 교토는 백제의 공주나 부여 같은 곳입니다.

지금 일본 문학은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재일 한국인 시인과 작가들로부터 활력을 얻고 있습니다. 일본은 경제적으로 망해야 정신적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아마도 앞으로 10년 후엔 완전히 망해서 한반도로부터 들려오는 새로운 문화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음악과 음식을 지배하는 것은 한국풍입니다. 음악과 음식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생활의 두 기초올시다. 두고보십시오. 일본이 어떻게 한국의 정신적 창조력에서 자기의 삶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인지…… 현명한 자들은 과거에도 그것을 보았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의 야나기는 청년들 속에서 나올 것입니다. 특히 젊은 여성들! 젊은 여성들!……."
이번 붉은 악마들의 월드컵 바람이 일본의 신세대에게 가한 충격은 엄청난 것이다. 지금은 겉만 한국에서 배우려 할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속까지도 배우려 할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쓰루미 선생은 훌륭한 일본 사람이다. 일본인의 길을 밝게 알고 있다. 문제는 한국인이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알고 있는가?

이번 붉은 악마들에 대해서도 여러 지식인들이 나치즘이니 파시즘이니 헛소리를 하고 있다. 그들 혹시 일본인 아닌가? 아니면 그들은 과연 세계적 차원의 삶을 사는 관용과 인류적 차원의 우정을 가진 사람들임에 틀림은 없는가?

한국팀이 독일에 패전했을 때 붉은 응원단 속에서 터져나온 두 가지의 연호를 깊이 생각해보라.

패전한 한국 대표선수들에겐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승전한 독일 선수들에겐

"도이치란트! 도이치란트! 도이치란트!!

이 두 가지 연호도 나치즘이고 파시즘인가?

우리는 우리의 길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우리 문제다.

7 백만 8백만이 모르는가? 자칭 세계주의자 지식인이 모르는가?

역시 쓰루미 선생의 인사말로 시작하는 오사카 강연회가 끝나고 우리는 간사이공항을 거쳐 귀국했다.

4333 년 봄.

벚꽃이 한창일 때 나는 교토에 있었다. 공공성(公共性) 세미나였다.

나는 세미나에서 지금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는 NGO, 시민운동의 배후에 있는 하버마스나 한나 아렌트의 공공성은 사회적 공공성으로 한정된 계몽주의적인 개념이라고 전제했다.

"공공성은 사회적 공공영역 안으로 우주적 생태적 사회성을 끌어들여야 한다. 시민생활에 대해서 자연생명은 환경이 아니다. 환경이라는 개념 자체가 얼마나 무식하고 낡은 인간중심주의의 산물이냐!

우주생명과 하나의 생명인 인간의 공공성은 그 자체로서 이미 우주사회적 공공성인 것이다. 한자로는 천하공심(天下公心)이 아니라 천지공심(天地公心)이다. '천지공심'에 터를 두어야 자연생명을 제 목숨같이 아끼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따라서 NGO, 시민운동은 천지공심, 즉 우주사회적 공공성에 토대를 두는 운동으로 변해야 한다. 그때 시민 개개인의 삶 안에 우주사회적 공공성이 실현된다. 그리고 정부와 시장의 아젠다를 일상적으로 우주화·생태화시킬 수 있다."

주로 역사, 사회, 정치, 경제학 교수들인 그날 참가자들이 한결같이 환영했다. 그때 내가 한가지 제안을 했다.
"천지공심을 중심으로 한 한·중·일 아시아 르네상스운동' 제안이었다.

젊은 학자들이 모두 찬성하는데 유독 한 사람, 동양학의 대가인 도쿄대 명예교수 미소구치(溝口) 교수만이 유보적 태도를 취했다. 그는 왈,

"젊은이들은 김지하 씨와 함께 속도 빠른 신칸센(新幹線)을 타라. 그러나 나는 달과 별을 보고 한참 생각한 뒤 마차를 타고 천천히 뒤쫓아가겠다."

왜냐고 내가 물었다.

"일본은 아시아에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 누군가 나이든 세대에서는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염치가 없다."

나는 미래의 역사는 미래에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에 대한 담대한 해석을 내리는 자의 것이며 일본의 죄는 이 담대성 앞에서 모두 용서될 것이니 용기를 가지라고 말했다.

미소구치 교수가 울면서 울면서 고마워하면서 한마디,

"한국이 그런 아량을 갖고있다면 우리도 중국과 함께 한국을 쫓아갈 것이다. 아무래도 아시아 르네상스는 서울발일 것같다. 일본은 죄많은 과거라는 시간 때문에, 중국은 거대한 인구와 공간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다. 고맙게 김시인을 쫓겠거니와 사실은 세계사적 상황을 볼 때 이 길밖엔 없다. 그래, 나도 신칸센을 타겠다."

미소구치 교수는 그러고나서도 내내 울었다. 아아, 제국주의 일본의 눈이여!

벚꽃이 만발한 용안사(龍安寺) 뜨락에 놓인 돌이 열 개인지 열한 개인지 세어보다가 갑자기 판소리 얘기가 나왔다. 나와 김리박(金理博)이라는 교토의 교포시인 사이에서다. 내가 한마디 했다.

"한국의 전통미학에서는 소리가 아무리 좋아도 삶의 신산고초의 흔적이며 피투성이로 수련한 장인적 삭임의 자취인 '그늘이 없으면 끝입니다.' 일본에서는 이 '그늘'을 무엇이라 합니까?"

김리박형이 곧 대답했다.

"그 경우엔 '하나가 나이' 즉 '꽃이 없다'고 합니다. 꽃이 바로 그늘 같은 것은 아니지만 어떤 미(美)의 비밀이지요."

꽃과 그늘!

이것은 일본과 한국의 미학의 차이다.

꽃의 뛰어난 고립과 그늘의 드넓고 고통스러운 민중적 삶의 아픔의 차이.

한쪽은 어여쁘고 다른 쪽은 서글서글하고 구성지고 기우뚱하다.

이 차이는 좀처럼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다. 일본인 감식가들이 한국전통예술에 빠지는 가장 중요한 점이다.

금각사(金閣寺)의 눈부심과 벚꽃의 외로움과 흰눈 쌓인 후지산(富士山)의 뾰족한 아름다움!

그것들과 '기자에몬 오이도'라는 이름의 한국산 막사발과의 차이는?

나는 도쿄에서 미야다 마리에(宮田毬榮) 여사를 만났다. 얼마 전 한국에서 만난 이래 두번째였다.

호텔 커피숍에서 여사는 내 앞에 내가 서른살 때 썼다는 짧은 시 한편을 내놓았다. 아무리 애써도 기억나지 않는 작품이었다. 지금도 기억할 수 없는데 매우 풋풋한 시였다. 스무살의 나에겐 벼이삭과 풀포기가 있었으나 서른살의 나에겐 고통스러운 방황만이 있다고 했던가?

마리에 여사는 나로 인하여, 특히 나의 시 때문에 가정파탄에까지 이르렀던 자기의 과거를 이야기했다. 그 자리엔 와다 하루키 선생과 잡지 《삼천리》의 창간자이신 교포 이철(李哲) 선생도 계셨다.

그때 내가 나의 앞길은 '흰 그늘의 길'이이라고 말했다.

헤어질 때 마리에 여사는 내게

"현해탄을 넘어 우리 흰 그늘의 길을 함께 갑시다"라고 말했다.

마리에 여사가 그 얼마 전 서울에 왔을 때였다. 스위스 그랜드, 지금의 힐튼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그녀가 나에게 왈,

"세월이 많이 흘렀군요. 당신과 나 사이에."

그때, 그리고 인사동의 전통한복가게에서 그녀의 아들과 그녀에게 맞춤한복을 선물할 때 그녀의 두 눈 흰자위에 내리는 그것.

비원의 한 숲에서 눈길이 마주쳤을 때, 마지막으로 회식하던 날 함께 찍은 색채사진 속의 그녀의 이마에 어룽거리던 것.

그리고 공항에서 작별할 때.

그때, 그것이 '흰 그늘'인 것이다.

여사는 그것을 느꼈을까?

"현해탄 너머 흰 그늘의 길을 함께 갑시다……?"

세번째 일본에 간 것은 4334년 봄 이즈(伊豆) 반도였다.

아름다웠다.

역시 일본의 아름다움은 외롭고 완결적이다. 틈이 도무지 없다. 하천의 둔치를 없애고 수초들을 식생시키는 것에서부터 산과 언덕에 나무를 빽빽이 심어 빈틈이 보이지 않게 한 것 등에서까지 나는 왠지 갑갑함과 답답함을 느꼈다.

아름답지만 멋이 없는 것.

너무 작거나 너무 오밀조밀한 것.

'이즈'에서 내가 들은 여러 얘기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것은 일본인 몇 사람의 '파시즘의 재평가'라는 어사였다. 지금 진행중에 있는 시민운동들, '개구리풀의 소박함을 옹호하는 시민들의 모임'이라든가 '물방울의 투명함을 지키기 위한 시민들의 모임' 따위 작은 담론들은 거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반역사적이라는 비판을 들었다.

나는 물었다.

"당신들은 파시스트지요?"

대답은 한결 같았다.

"파시즘도 여러 가지입니다."

"파시즘을 재평가할 때가 왔습니다."

나는 또 물었다.

"당신들의 철학은 어디에 근거를 둡니까?"

누군가의 이름을 들었다.

"그분의 철학은 무엇에 기초가 있습니까?"

"주역입니다."

주역이라!

위험했다.

나는 속으로 그들의 대답을 대신 발음했다.

"우리의 철학은 갑갑함과 답답함에 근거를 둡니다. 주역은 껍데기올시다."

그 이튿날 발제시간에 나는 또박또박 강조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여러번 되풀이했다.

"지금 유행하는 시민운동의 작은 담론은 훌륭한 것입니다. 그것을 옹호하지 않으면 큰일납니다. 다만 그 작은 담론이 답답하고 갑갑하게 느껴지는 것은 작은 담론 안에 큰 담론이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카오스 이론이나 퍼지 이론을 예를 들 필요조차 없습니다. 이미 동양에서는 먼지 한 톨 안에도 세계가 살아있다고 가르쳐왔습니다. 작은 담론과 시민적 개인생활이라는 구체적인 그릇에 담지 않는 큰 담론이야말로 파시즘으로 직행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큰 담론이 작은 담론들을 가득히 담고 있으면 그것은 파시즘으로 갈 여지가 없지요. 중요한 것은 너무 작기만 하든가 너무 크기만 하든가 한 극단만 추구하는 것이 위험한 것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큰 것은 반드시 작은 것 안에 담기고 중심은 탈중심과 해체 속에서 새로운 촉매로 자기 기능을 계열화, 재조정하며 서로 모순 대립되는 것은 반드시 상호보완적이고 일치 조화한다는 것을 철저히 익히고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역입니다. 주역에서는 하늘만 강조하거나 땅만 강조하는 건 없습니다. 그런 것은 다 죽은 것입니다.

파시즘도 재평가하고 좋은 것은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일본은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남까지 망하게 할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세계화, 지구화, 그리고 지금과 같은 개별화, 개체화하는 추세 속에서 일본의 파시즘을 각 민족이, 일본의 모든 민중이 방관만 할까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즈반도, 이즈고원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함께 간 김병진(金丙鎭) 아우의 말처럼 그곳은 유형지였다.

잠들 수가 없었다. 까마귀가 까악까악 불길하게 울고 있었다.

예정보다 일찍 신칸센을 타고 오사카로 돌아왔다. 거기서 다시 도망치듯 비행기를 탔다.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나무들이 없어서 시뻘건 흙이 튀어나온, 빈틈이 많은 산천을 보자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것이 내 조국이다.

얼마나 서글서글하냐!

나는 한국의 미래가 밝다고 밝다고 싱글벙글 웃으며 일산으로 돌아오는 택시 속에서 이상한 안도감 속에 되풀이하여 되풀이하여 일본에 다시 가기는 힘들 것 같은 예감을 느꼈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장담하리오?

그 열도에 미야다 마리에 여사의 그 그늘진 두 눈의 흰빛이 타고 있는 한, 누가 그것을 장담하리오?

"일본의 미래의 해방은 여성들과 차별받는 소수민중에게 맡겨져 있다."

"십년 후에는 한반도로부터 들려오는 새로운 문화의 소리에 귀기울일 것이다."

쓰루미 선생의 이같은 예언이 있는 한 누가 그것을 장담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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