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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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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9>

정일담

1975년 나의 반공법위반 사건 내용 중에 ‘장일담’ 구상메모가 들어 있다. 수사관들은 장일담의 모델이 누구냐고 거듭거듭 물었었고 출옥 후에도 그것을 묻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허구라고 대답해 왔고 물론 허구다. 장일담의 사상이 그러하니까. 허나 영상으로서의 모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제 밝히겠는데 그가 바로 정일담이다.

정일담은 연동의 전설적인 영웅이며 목포 건달세계의 신화적인 인물이다. 흔히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까지도 그저 ‘일담이’, ‘일담이’하고 불렀던 그는 한마디로 그 무렵 연동과 목포의 민주영웅이었다. 숙부와 쌍벽이라고는 하지만 숙부보다는 나이도 위였고 한 차원이 높은 큰 우투리였다. 그는 어릴 적 이후 지금껏 가장 절친한 나의 한 불알친구의 숙부이기도 하다.

지금 나의 뇌리에는 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큰 산맥 같기도 하고 큰 해일 같기도 하고 세찬 폭풍우 같기도 한, 한 인간의 생애가 광활한 지평선 위에 광활한 구름모냥 뭉글거리며 떠오른다.

내 어릴 적 친구들, 연동 산정국민학교 높은 돌담 및 신작로 가에 연이어 기대놓은 조선운수 쌀 실어 나르는 그 마차바탕들 위에 누워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과 그 위를 흐르는 눈부신 구름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 무렵 우리의 영웅이었던 ‘일담이’의 전설을 끝없이 이야기하며 한 ‘우투리’의 위대한 삶에 감동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고 상상은 끝없는 날개를 폈다. 그러한 밤엔 큰 꿈을 꾸다가 꼭 오줌을 싸곤 했다.

그는 바로 연동 출신이고 우리들 모두의 정다운 삼촌이었다. 장대한 골격, 거대한 두상, 먼지가 뿌옇게 앉은 듯 빛이 없는 꺼멓고 커다란 두 눈, 솥뚜껑 주먹, 빙긋 웃을 때의 그 하얀 잇속. 허나 그런 본모습보다 그가 더 크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의 행적에 대한 어릴 때의 숱한 이야기들, 상상과 전설을 통해서 내가 기억하기 때문일 게다.

전설은 이렇다.
일담은 태평양전쟁 말기 어느 날 밤 목포시내 가장 큰 청요리집이었던 인의관(仁義館)에서 술을 마시다가 옆방에서 어린 조선인 기생들을 할퀴고 때리고 짓밟는 일본놈 헌병장교들에게 그 잘못을 점잖게 꾸짖었다. 여기에서 싸움이 붙었다. 칼을 뽑아들고 총을 뽑아드는 그들 두 놈을 그냥 즉석에서 맨손으로 때려죽이고 그길로 연동으로 튀었다. 놈들이 호각을 불며 총을 쏘며 말까지 타고 뒤쫓았는데도 일담의 큰 걸음을 도저히 따라잡지 못했다.

연심이네 국밥집, 연심이는 내 계집애 친구고 그 집은 우리 외가 바로 앞집인데 바로 그 집 지붕을 일담이 한 걸음에 훌쩍 뛰어넘어서 여섯 걸음에 조카인 내 친구네 산정리 구시나무집에 닿아 냉수 한 그릇 마시고는 열두 걸음에 비녀산을 넘어 북상(北上), 그 이튿날 아침에는 만주에 도착했다. 일담은 만주에서 마적단 두목이 되었다. 그러니까 독립군 대장이 되어 일본놈을 수없이 수없이 죽여 없앴다. 이것이 전설이다.

그 전설 속의 정일담이 해방이 되자 목포에 나타났다. 당시 목포시 치안대장 정일담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 무렵 연심이네 국밥집에서다. 내가 직접 보았는지,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정말 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인지, 일담이 문태 숙부와 술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술을 마시는데 왼쪽 장화 속에서 기름때가 번질번질 검붉은 술이 길게 달린 큼직하고 퍼런 뙤놈 단도를 쑥 뽑아 술판 위에 콱 꽂았다. 그러자 숙부가 천장에 매달아 놓은 삶은 돼지다리를 홱 낚아채 단도날에다 쓱 썰어서 두 쪽 난 것을 한 쪽은 일담에게 주고 한 쪽은 자기가 들고는 함께 껄껄 웃으며 어적어적어적 씹어 먹었다는 것이다.

그 뒤 일담은 사라졌다. 북으로 갔다고도 하고 만주로 중국으로 갔다고도 하고 소련으로 갔다고도 한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내 주변에서 그 무렵 매일 되풀이 되었다. 이야기 속에서도 내 꿈 속에서도 ‘일담이’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커다랗게 부풀어 장군이 되고 총사령관이 되고 대원수가 되고 나중엔 대지를 뒤엎는 거대한 신이 되어 한없이 커지다가 우주 속으로 서서히 흩어져 버렸다. 어른이건 아이건 연동사람들 이야기 속에서 드디어 일담이가 사라졌다.

그 사라진 일담이가 6.25때 인민군 들어온 뒤 한참있다 어느날 정치보위부 대좌 계급장을 단 군복차림으로 사이드카를 타고 연동에 나타났다.

연심이네 국밥집에서 국밥을 먹었고 동네어른들과 만났다. 그리고 그 무렵 ‘악질반동 부화분자’로 찍혀 솔개재 오동나무거리 교화소(矯化所)에 갇혀 모진 고생을 하고 있던 문태 숙부를 석방했다. 그리고 또다시 사라졌다. 이번에는 영원히. 그 뒤 전설도 점차 야위어가고 어른들은 죽고 아이들은 그곳을 떠나 객지에서 늙어버렸다.

정일담.
그러나 그는 가난한 모든 아이들의 끝나지 않는 꿈, 내 마음 속의 소박한 소박한 영웅의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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