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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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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5>

15. 고통

나의 고통의 첫 경험.
고통이라니까 괜히 지레짐작할 것까진 없고 치통 말이다. 난 사탕을 너무 좋아해서 어려서부터 이빨이 엉망이었으니까.

자주 치과엘 드나들었다. 그 공포! 마취술이란 게 어디 변변했나! 갈데없는 고문이었다. 집게가 내 입안으로 들어오고 옆에서 내 팔다리를 붙잡기 시작하면 샛노란 하늘 복판에 시뻘건 태양같은 것이 핏덩어리처럼 터져 번지고 이어 캄캄한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완전한 절망이었다.

물을 머금었다 뱉고 나서 또 거듭되는 그 고문, 이상한 약냄새, 입속의 쇠붙이 느낌, 아랫배가 딱딱해지고 팔다리의 맥이 풀리고 울 기운마저 잃은 채 억-억-대며 부질없이 손만 허공에 휘저어 집게를 막아보고자 했다. 영락없는 지옥, 그러나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그 거듭된 고통은 뒷날 모든 형태의 고통을 견뎌내는 어떤 힘과 꾀를 내게 준 계기가 되었다.

차츰 자라면서 내겐 꾀가 한 가지 생겼으니까.
작은 짐승이나 벌거지들의 꾀. 그것은 온몸에서 힘을 빼버리고 아예 마음을 없애버리며 숨을 가늘고 고르게 내쉬면서 죽은 듯이 모두를 내맡겨버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내 몸의 일부가 외치는 비명을 가만히 귀기울여 듣는 것. 하나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긴장이었고 정신의 집중이었다. 항용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파김치가 돼버리곤 했으니까.

눈물범벅이 되어 부은 볼을 싸쥐고 어머니 등에 업혀 거리로 나설 때 생전 처음 보는 듯한 그 쨍쨍한 햇볕, 푸르른 하늘, 희고 고운 구름들, 울긋불긋한 포목전, 반짝이는 황금빛 유기전, 그리고 초록빛 가로수들이 눈물 속에서 영롱한 빛깔로 마술같은 형상을 만들곤 했다. 고통과 눈물 속에서만 나타나는 그 신기루같은 빛깔과 이상한 무늬나 모양들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

이 짓이 그 뒤로부터 나의 한 가지 ‘고통의 즐거움’이 되었다. 생각하면 참으로 위험한 유년이었다. 뺨을 간질이는 바람, 집에 닿기 전 나는 어느덧 잠이 들곤 했다.

B29 폭격기 편대의 폭음이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전쟁은 막바지, 일본의 발악도 막바지. 징병, 징용, 정신대, 공출 운력, 이런 것들이 어른들의 삶을 짓누르고 들볶고 찢어발기고 피를 말리고 있었다. 나는 공습을 피해 시내에서 연동 뻘바탕으로 옮겨졌다. 그 시절의 인상 몇 토막.

산정국민학교 정문. 노오란 군복에 각반을 친 일본군 보초병들이 집총하고 섰는데 한 장교가 붉은 말을 타고 들어가다가 무엇 때문인지 채찍으로 보초병 하나를 후려치자 그 보초병이 쓰러질 듯 한 쪽으로 몇 발짝 헛발을 내딛으며 휘청 기울었다 다시 제자리로 오뚝 돌아오고 또 후려치면 또 몇 발짝 헛발을 내닫으며 휘청 기울였다 다시 제자리로 오똑 돌아오고. 가엾은 오똑이!

터진목 고갯길을 흰 정복에 긴 샤벨을 절그럭거리며 일본순사가 헐레벌떡 뛰어서 넘어오고 있었다. 입을 헤벌리고 헉헉대는 우스운 몸짓에는 영 어울리지 않던 그 하얗고 으리으리한 정복! 그리고 샤벨!

작은 숙부가 군에 징발당해 일하고 있던 유달산 오포대 뒤쪽 측우소 그 뒤쪽에 있는 한 컴컴한 동굴로 작은 고모 따라 음식을 싸들고 찾아간 내 눈에 비친 그때의 광경이다. 노오란 센토보시, 전투모를 쓴 시커먼 얼굴의 숙부가 땀을 뻘뻘 흘리며 커다란 쇠망치로 쇠모루 위의 시뻘건 철편을 타앙 딱 타앙 딱 치고 있었는데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 한없이 치고 있었는데, 끔찍했다. 지옥?

난 이야기를 좋아했다. 이야기만 들려주면 밤이 깊을수록 점점 더 눈이 초롱초롱, ‘한 자리만 더, 한 자리만 더’하고 졸라대던 놈이 ‘야경똑딱’ 소리만 들으면 그만 순식간에 이불 속으로 쏙! 일제 때 딱딱이를 치며 밤거리를 돌던 야경인데 그저 온다고 겁만 줘도 그만 순식간에 이불 속으로 쏙! 팔자다.

그 무렵이었나, 그 뒤였나. 외가 유리문밖 신작로 한복판에 시뻘건 눈이 불쑥 튀어나오고 시커먼 수염에 어깨 떡 벌어져 팔대장성같은 웬 낯선 상투쟁이 중늙은이가 떠억하니 혼자 버텨서서 꼼짝않고 시내 쪽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서 있었다. 누굴까? 뭣하는 사람일까? 어디서 온? 혹시 우리 할아버지 만나러 온 사람은 아닐까? 신기해서 내내 보고 있었는데 지금도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그 사람 혹시 동학꾼 아니었을까?

외가 뒤뜰 좁고 더러운 쓰레기통 시커먼 뻘구덩에서 촉촉이 이슬맺힌 나팔꽃이 아침마다 피곤 했다. 첫 햇살을 받은 꽃이파리가 너무 예쁘고 영롱해서 꼭 그때쯤엔 끌리듯 일어나 뒤뜰에 나가 꽃 앞에 서서 인사를 하곤 했다.

아침 안녕!
나팔꽃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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