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타력 쇄신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데 그는 그 단초를 부산에서 찾는다. 새누리당의 근거지인 영남을 양분하는 부산이 바뀌면 새누리당도 혁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안철수 신당의 등장으로 인해 호남이라는 지지 기반을 잃을 위기에 놓이면서 혁신을 강요당하는(?) 민주당의 상황에서도 알 수 있다.
한편, 민주당의 입장에서도 부산이 과거의 야성을 되찾기만 한다면 지금 호남에서 겪는 난관을 상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지리멸렬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싸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꿈에 그리던 전국 정당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것이다. 부산의 변화가 결국 한국 정치권의 구조적이면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정당 혁신과 정치 실험의 최전선에 서왔던 그의 생생한 경험에서 나오는 증언이다. 권력에 취하면 안 보이게 된다는 것,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성공은 오히려 몰락의 길을 자초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신뢰와 애정이 없으면 함께 정치하기 힘들다는 그의 지적은 정당 정치의 울타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것들이다.
2014년 지방 선거에서 부산시장에 도전할 것으로 보이는 김영춘 소장과의 인터뷰, 두 번째 순서이다. (☞관련 기사 : "박근혜의 '카오스 대한민국'이 두렵다!")
▲ 김영춘 인본사회연구소장(전 국회의원). ⓒ인본사회연구소 |
개혁 보수의 좌절
-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에서 잘 나가던 젊은 정치인이었는데 2003년 탈당했다. 한나라당의 혁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건가? 결정적 계기는?
이회창 씨가 대선 후보가 되면서 당을 장악했는데…. 그가 대통령이 될 기회도 있었지만 한나라당이 좋은 보수 정당이 될 기회도 있었다. 그런데 이 둘 다 날아가 버린 거다.
그는 이른바 개혁 보수의 이미지로 정치권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국민도 보수지만 개혁적인 사람, 양심적이고 깨끗한 사람을 원했다. 지금의 안철수 현상과 비슷하다. 그런데 첫 패배 후 두 번째 도전하게 되면서 점점 대구·경북(TK) 민정계 중심으로, 즉 정치적으로는 과거 민정당 출신들, 지역적으로는 TK 세력에 얹혀서 개혁 보수가 아닌 수구 보수의 스탠스로 정치를 했다.
당시 대세론이 나돌긴 했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내가 2002년 4월 당 대외협력위원장직 사표를 내면서 이회창 씨에게 "이대로 가면 국민들이 마음을 안 주고 돌아설 것이다, 당 쇄신해야 한다, 개혁 보수 진용을 구성하고 대선 치러야 한다"고 요구했다. 나는 TK 민정계 일색으로 친위 부대 편성하면 필패할 것이라고 봤다. 그랬더니 나더러 정치를 잘 모른다는 식으로 힐난하더라.
결국 다 이긴다는 선거를 졌다. 근본적 반성과 쇄신이 있어야 했는데 그 분위기가 딱 두 달 가더라. 당을 바꾸자니까 대부분 "너희가 나가라" "적당히 해라" "귀찮다" 이런 식이었다. 희망이 없었다. '도로 민정당'이 된 한나라당에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 그래도 김영삼 전 대통령(YS)을 따르는 상도동계가 있지 않았나.
상도동계, 그러니까 민주계가 있긴 했지만 민정계에 수적으로 열세였고 또 이회창이 당을 장악하게 되니까 민주계 70~80%가 이회창 지지로 돌아섰다. 김무성 의원도 이회창 쪽에 붙었다.
사실 내가 입당하게 된 것도 YS가 당 대표였음에도 내각제 파문 때문에 완전 핀치에 몰렸기 때문이었다. 3당 합당 1년 뒤 대학원을 마칠 땐데 YS가 부르더니 "대학원 다 끝나지 않았냐. 돌아와서 내 마지막 싸움을 내 옆에서 도와달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원래 남 앞에서 힘들다, 어렵다 말씀을 안 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내가 힘들다"고 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당시 실세는 박철언 씨였는데 박철언 씨가 내각제 합의 문서가 있다면서 "내각제 합의 해놓고 왜 없었던 것처럼 그러느냐, 김종필(JP)도 같이 합의하지 않았느냐"며 YS를 맹공격할 때였다. 박철언이 YS를 토사구팽하려는 작전에 들어간 것이다. YS가 당 대표였지만 세력으로 보면 민주계 20, JP계 10, 민정계 70의 비율이었다. 근데 JP가 민정계와 연합했으니 8대2 구도였다. YS가 당 대표였을 때도 이 정도였으니 이회창이 대표할 때는 어땠겠나.
- 이회창 씨가 왜 변했다고 생각하나?
그때 나에게 "아직 자네는 정치를 잘 몰라"라고 했는데 여기에 비밀이 있는 듯하다. "정치는 먼저 자기 세력을 확고하게 결집시켜야 한다. 이건 전쟁이다. 내 전투 부대가 단단해야 한다. 넌 그걸 모른다"는 식이었다. 내가 말하는 개혁 보수는 자신의지지 세력과는 거리가 멀다고 판단한 것 같다.
문제는 당을 장악하고 지지 세력도 모았으면 그 다음에 중원 공략에 나서야 했는데 아첨꾼들의 말에 취해가지고 오히려 점점 더 보수 강경파 기조로 가버렸다. 이게 권력의 중독 증세 같은 거다. 스스로 권력에 취하면 안 보이게 된다.
- 한나라당에 있으면서 쇄신을 위해 노력한 것이 있다면?
일단 쇄신에 동참할 사람들을 모아 조직화 하려고 했다. 원내외 쇄신 모임도 만들었고 미래연대라는 젊은 의원들 모임도 만들었다. 2002년 대선 패배 후 당 쇄신을 위한 결사대 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국민 속으로'인데 원희룡, 김홍신, 서상섭 등 열 명이었다. 그 중 다섯 명이 나중에 함께 탈당했는데 그게 '독수리 5형제'다.
세를 조직화 하는 것 외에 내가 시도했던 실질적 혁신 방안은 호남 출신이 당대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 대표로 김덕룡 씨를 지지했다. 대선 후보 경선과 대표 경선 때마다 김덕룡 씨를 지지했다. 이회창 씨 지지한 적은 없다. 한나라당이 변하려면 TK 위주의 지역주의부터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 김 소장은 영남 출신인데 당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 조금 의외다. 그게 그때 좀 먹혔나?
전혀 안 먹혔다. 심지어 상도동계 사람들도 등 돌리고 이회창 밑으로 줄을 섰다. 상도동계로 남은 사람은 김덕룡 외에 이성헌 의원 정도였다.
"김문수, 너마저…"
- 결국 당시 초선이었는데도 탈당했다. 그런데 YS가 젊은 피 수혈하겠다고 영입한 운동권 출신들, 김문수, 이재오, 고진화는 남지 않았나.
그들이랑 나랑 정치하는 이유가 다른 거다. 당이 이회창을 앞세운 TK 민정계에 의해 '도로 민정당'이 돼버려 개혁 운동을 하자고 했더니 개혁 보수하겠다던 사람들조차 등을 돌렸다. 특히 김문수 현재 경기도지사가 그랬다. 그는 '여기의 논리, 여기의 주류가 원하는 정치를 하고 싶다, 왜 또 비주류를 해야 하나'라며 거부했다. 이재오 의원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결국 나서지 않았다. 이우재 전 의원은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 탈당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2003년 탈당 때 YS도 말렸고 김성식 전 의원 등 동료 의원들도 말렸지만 (김 전 의원도 결국 2011년 탈당) 지역구에서 정말 힘들었다. "네 당선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네 마음대로 탈당 하느냐"며 말렸고 반발했다. 사람과 맺은 인연이 참 질기고 그걸 끊어 내는 게 인간으로서 못 할 짓이었다. 탈당 전날엔 한 70 노인이 무릎을 꿇고 울기까지 했다. 그걸 뿌리치고 나오는 게 너무 힘들었다.
- 이제 새누리당의 혁신은 불가능하다고 보나?
자력 혁신은 불가능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금 박근혜 대통령을 정점으로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이회창의 한나라당 때보다 더 심하다. '도로 민정당' 수준이 아니라 '도로 공화당' 수준으로 떨어진 거다. 유신 시대로 돌아갔다는 말이 맞지 않나.
새누리당의 자력 쇄신은 물 건너간 거고 결국 타력 쇄신인데 타력 쇄신의 근본적 승부처는 결국 영남이다. 영남에서 자기들의 기득권이 흔들리지 않으면 새누리당은 절대 스스로 혁신하지 않는다. 내가 부산에 돌아온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부산에서 지각 변동이 조금이라도 일어나면 그게 새누리당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나아가 부산을 발전시키는 길이기도 하다. 물론 민주당도 전국 정당으로 자리 잡는 확실한 기회가 될 것이다. 그래서 부산은 양수겸장의 승부처다. 설령 정치적으로도 전사하더라도 충분히 전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열린우리당과 개혁 진보의 붕괴
- 탈당하자마자 혁신 정당을 표방하며 만든 게 열린우리당인데 기존 정당들이 결국 가만 놔두질 않았다. 그런데 대통령 탄핵 같은 엄청난 일이 어떻게 가능했나?
미우니까.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 간에 미운 감정이 공유되니까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꼬리를 트집 잡아 시작한 거다. 사실 열린우리당은 현역 의원 40명 정도로 시작했는데 처음엔 70~80석 정도의 제3당을 예상했다. 그런데 창당한 지 두세 달 지났는데 영남에선 지지도가 한나라당과 비슷하게 올라갔고 호남에선 민주당을 뛰어넘었다. 저 싹을 그냥 두면 양당이 공멸한다는 위기 의식에 휩싸였다. 결국 싹을 잘라야 한다고 최병렬 대표와 조순형 대표가 합의한 거고 그 싹을 자르려면 노무현을 탄핵하는 것 외엔 길이 없다고 본 거다.
- 탄핵 역풍 덕에 엄청난 성공을 거뒀지만 결국 몇 년 안 가 참담하게 몰락했다.
2004년 총선에서 152석을 얻어 과반 의석을 가진 제1당이라는 예상 못했던 성공을 거뒀는데, 열린우리당은 당시 제1당으로서의 준비도 돼있지 않았고, 그에 걸맞은 실력도 없었다. 대통령 권력과 과반 제1당의 권력을 가졌지만 정확한 비전과 청사진이 없었다. 의욕 과잉, 당내 분열, 당청의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 아무리 그래도 과반 제1당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나.
실력 이상의 성과가 문제였다. 그 실력 중엔 당 구성원들의 철학적 정체성, 당의 조직 문화를 규정하는 논리나 원칙도 중요하다. 이런 게 있어야 현안에 대한 판단이 달라 논쟁을 하더라도 당에 원심력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공유되는 원칙도 약했고 서로에 대한 애정의 두께도 달랐다.
그런데 방법까지 달라지니 대통령이 대연정이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제안하며 문제가 생기자 완전히 서로 적대적인 논쟁으로 돌입해 버렸다. 당을 함께 할 수 없는 상황까지 몰린 거다. 당시 열린우리당에는 민주당 그룹, 개혁당 그룹, 이른바 '탄돌이' 그룹, 전문가 그룹 등 출신 성분이 너무 다양했다.
- 열린우리당 시절 유시민에게 "저렇게 옳은 말을 저렇게 싸가지 없이 하나"라고 했다가 이게 많이 회자되기도 했는데 이것도 당시 당내 분위기와 맞물린 것인가? 후회하나?
그때 내가 비판했던 유시민의 방식으로 똑같이 비판했다는 사실이 후회스럽다. 그 사람에게 너무 상처가 됐다. '형 말이 맞는데 왜 그 말을 그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게 비판을 하느냐'는 취지였는데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해버리고 말았다. 그게 바로 당시 열린우리당의 문제였다. 동지적 신뢰 없이 끊임없이 서로를 공격하고 물어뜯는 그런 정당은 오래 갈 수 없다. 지금 민주당이 상대적으로 조용한 이유가 변화의 에너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때의 아픈 상처 때문에 조심하고 지켜보는 것이다.
- 화해는 했나.
화해가 잘 안 됐다. 그에겐 그게 그렇게 상처가 됐던 모양이다. 심지어는 자신의 딸 이야기까지 하면서. 몇 년 뒤 '소주 한 잔 합시다' 했는데 응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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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할 수 없었던 승리
-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 한국의 진보는 서로에게 너무 예민한 것 아닌가. 관대함도 없고 자기와 의견이 다를 뿐인데도 잘못된 것으로 몰아붙이기도 한다.
우리나라 보수는 일종의 이익 공동체다. 서로 싸우다가도 공동 이익 앞에선 싸움 접고 단결한다. 반면 진보가 더 분별적인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진보가 보수와 다른 차이는 정의와 이성을 앞세워 더 인간답게 함께 살아보자는 자기 명령 속에 행동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 편이라고 무조건 눈감아주는 패거리 의식은 진보의 본령에 맞지 않다. 보수는 묻어버리지만 진보는 못 묻는다.
다만 아쉬운 것은 비판하더라도 적대적이 아니라 엄정하면서도 차분하게, 또 비판이 적대적 분열로 치닫지 않게 하는 애정 어린 자세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걸 치유하지 못하면 진보는 영원히 보수에게 끌려 다녀야 한다. 우리가 이성의 교지를 앞세우는 만큼 이성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
유시민 비판에 대한 반성도 그런 자각이 생겼기 때문이다. 차이를 분명히 하면서도 그 차이에 대한 다양한 비판을 서로에 대한 애정과 함께 하나로 수렴해가는 토론으로 승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 최근 6인회라는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구성원이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정치인들이라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것 같다.
2013년 총선 후 여전히 변함없는 새누리당 대 민주당의 구도로는 한국 정치가 발전하기는 무망하지 않느냐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거 전쟁이 그 단적인 예이다. 국가적 어젠다들이 산적해 있는데 보수 진보를 망라해 합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국가적 비전이 있지 않을까, 이 정도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국가적 전략 과제가 있지 않을까 몇몇이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런 것조차 공유하지 못하고 죽어라 싸우기만 할 것인가. 기성 정치의 문제점을 공유한 지식인들끼리 모인 것이다. 나와 김부겸, 홍정욱, 김성식, 정태근, 정장선이 멤버다.
- 안철수가 관심을 갖고 러브콜을 보낸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모임이 꽤 알려지게 됐다.
그게 2013년 4월 정도인데 그러면서 모임이 잘 안 됐다. 홍정욱 전 의원도 안 나오고. 한 달에 한 번 모여 담론 만들고 국가적 어젠다 만들어보자는 스터디 그룹이었는데 자꾸 정당으로 간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하니까 부담을 느낀 것이다.
- 안철수 신당 참여와는 별개로 어쨌든 정당 만들려는 시도 없었나.
정당 만들기? 정말 당을 만들려고 한다면 현재의 판을 그대로 둔 채 만들 수는 없지 않나. 변화를 위해 뭔가 해야 한다. 그러나 그 경로는 다양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안철수와 엮어 말을 하니 부담이 됐다. 나도 4월부터 안 나갔다. 모임이 안 되다가 다시 8월부터 모이기 시작했다. 우리끼리 그런 부담 갖지 말고 공부하자고 했다. 사실 지금 6인회 그 자체로는 신당이 되기 힘들다. 생각들에 편차가 있다.
안철수 정치 혁신 가능한가
- 안철수 신당은 그 구성원 간 편차가 대단히 클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스펙트럼이 너무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안철수 신당도 결국 열린우리당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되지 않을까.
이미 언급했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새누리당과 민주당에 끼지 못했던 사람들을 모아 당을 만드는 게 아니라, 새로운 비전과 정책을 가지고 세를 불려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독자적 정체성과 철학 없이 그냥 민주당을 구악으로 규정하고 민주당을 대체하겠다는 식으로만 나오면 그게 결국 야권의 분열만 조장하는 게 된다. 새로운 걸 보여주지도 못하고 오래 가기 힘든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거다. 안철수 신당의 성공 여부는 과연 새로운 시대정신과 비전을 확립하고 새로운 정책을 제시할 수 있느냐다. 그렇게 되면 새누리당과 민주당도 자기 혁신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당장 호남에서 물갈이 이야기가 나오지 않나.
- 그런데 안철수 의원은 자신의 고향인 부산보다는 호남에 더 공을 들이는 모양새다. 결국 영남은 새누리당의 무풍지대로 남게 될 것 같은데도 김 소장은 부산에서 계속 도전하는 이유는?
새로운 정치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내 고향을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무엇보다 부산에서 진보가 자리를 잡아 지금 오른쪽으로 쏠린 균형추를 조금이라도 가운데로 가져온다면 새누리당도 변하지 않을 수 없다. 부산은 새누리당 1당 독재의 피해를 가장 극심하게 겪는 지역이다. 특히 이명박 정부 때부터 지방 도시들이 더 힘들어지긴 했지만 특히 부산은 처참한 수준으로 추락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바뀔 조짐이 전혀 없다. 박 대통령이 부산 지역에 하겠다는 대선 공약 전체 소요 예산이 약 19조 원이다. 지금 2014년도 예산안 심의가 국회에서 진행 중인데 임기 2년차면 공약을 실천할 의지가 담긴 예산안을 만들어야 하는 법니다. 그런데 현재 국회에 제출된 박 정부의 부산 지역 공약 관련 예산 액수는 고작 127억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새누리당 시장, 새누리 국회의원들이 그렇게 많은데 이 결과는 뭔가.
오히려 야당 시장 뽑으면 정권 차원에서 야당 시장 무시 못 한다. 다음 총선, 대선 다 넘어가겠다는 걱정 때문에 부산에 더 많은 예산을 주고 신경 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시장이 되려는 것은 부산의 발전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 만약 박근혜 정부가 내년에도 계속 국민과 불통하고 일방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면 지방 선거에서 유리하지 않겠나?
부산 선거엔 더 나쁘다. 결국 강대강 대립 구도로 가버리면 감정이 증폭되게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부산에선 불리하다. 부산에선 정당 간 대립 구도가 완화돼야 야권에게 승산이 있다. 보수가 더 단결하고 박근혜 찍었던 사람들 심리가 더 강고해져 버리면 힘들다. 그쪽이 60%인데 그 중 10%라도 넘어오게 하려면 일단 마음이 말랑말랑해져야 한다. 대결 구도가 첨예해지고 원색적인 증오의 감정까지 더해지면 그 사람들은 건너오지 않는다.
수도권의 경우는 유리할 수 있다. 잠재적으로 야당이 더 많다. 보수 일변도의 지역은 안 된다. 그들은 논리로 설득이 되는 사람들이 아니다.
안철수 신당, 부산에서도 변화를…
- 그렇다면, 방법은 없는 것인가? 게다가 지금 여당 후보군에는 많은 다선 의원들이 포진한 반면 야당은 상대적으로 무게감이 약하다. 야권은 선거를 치르려면 뭔가 흥행이 되어야 할 텐데, 대비책은 없나.
지금으로선 없다. 뭔가 변화의 전기나 촉매가 있어야 한다. 한 가지 희망을 거는 게 있긴 있다. 안철수 측에서 후보를 내는 것이다. 그래서 안철수 신당의 역할이 중요한 거다. 다만 좋은 후보여야 한다. 나보다 더 경쟁력이 있거나 큰 그릇이 나오면 고맙지.
예를 들어, 부산이 고향인 김성식 전 의원이 시장 후보로 출마하는 거다. 안철수 신당 후보로 나와서 나와 경쟁해도 좋다. 부산 시장이 꼭 나 아니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사실 김 전 의원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우리끼리는 서로 신뢰할 수 있으니 공정하게 경쟁하고, 결정이 되면 각자 가지고 있는 자원들을 120% 동원해서 상대방 밀어주고, 그러면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부산의 안철수 지지자들 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다.
문제는 김 전 의원이 고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산으로 마음을 굳히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그렇지만 김 전 의원은 인격적으로도 훌륭하고 실력도 있는 분이다. 또 민주당 지지도가 안철수 신당의 반밖에 안 되는 상황이라 내가 질 가능성이 크다. 야권의 승산이 높아지기만 한다면 왜 그 선택을 못하겠는가.
또 하나의 가능성은 오거돈 전 장관이 후보 단일화 경선에 참여하는 거다. 오 장관 정도 되는 분이 경선에 참여하면 그건 흥행 카드가 된다. 그런데 오 장관은 민주당이고 안철수 신당이고 후보 내지 말고 자신을 추대하면 나가겠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예전 하던 방식대로 하면 필패다.
- 대구에서 이미 유시민이, 그리고 김부겸이 결국 실패했다.
처음 올 때 10년 투자할 생각이었다. 한 번은 당연히 떨어질 거라 봤다. 부산 전체를 골고루 잘 포석하면 5년짜리 프로젝트라고 생각한다. 아직 내 나이면 해볼 만한 프로젝트다. 돌아와서 정치적으로 성공 입신하는 것보다 과정에서 만족스러우면 되는 거다. 이제 2년 반 됐는데 후회스럽지 않다. 다음번 총선에선 부산에서 결실을 보게 될 거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약간의 행운이 따라준다면 올 지방 선거로 앞당길 수도 있을 것이다.
- 정치하면서 가장 기뻤을 때는?
결국 실패한 실험이긴 했지만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과반인 152석을 얻었을 때였다. 야, 이런 세상을 볼 때도 있구나, 했다.
그때 천당과 지옥을 몇 차례나 왔다 갔다 했다. 대통령이 탄핵된 후 난리가 나고 큰일 났다 싶었는데 역풍이 불어 우리 지지도가 막 치고 올라가 이게 웬일인가 했다. 그런데 정동영 전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이 문제가 되니까 지지도가 하루에 2~3%씩 계속 빠졌다. 나는 당시 정 의장 비서실장이자 중앙당 상황실장이었는데 비상 상황이다 보니 30분 거리인 내 지역구엔 가지도 못했다. 딱 두 번 연설하고 왔다. 열흘이 지나니 지지도가 25% 빠져있었다.
선거는 5일 남았는데 이대로 가면 역전될 상황이었다. 부산에서도 20% 앞서는 지역구가 다섯 군데나 됐는데 다 뒤집어졌다. 결국 비공개 최고위원회의에 들어가서 상황 보고해주고 "의장이 사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고 말해 버렸다. 그길로 정 의장과 나는 견원지간이 됐다.
어쨌든 정 의장이 당장 비례대표 후보 사퇴하고 당 의장직은 총선 후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희한한 게 딱 그 다음날 아침에 여론 조사 지지도 추락이 멈췄다. 그 지지율 그대로 유지하면서 3일 후 선거에서 152석 얻은 거다. 개표 까는 순간 내 정치 인생 최고의 희열을 느꼈다.
그런 결과를 얻었는데 우리가 그 결실을 소중하게 이어가지 못한 채 다 말아먹고 '도로 민주당'이 돼버렸다. 아쉬운 것은 그때 탄핵이 없었다면 열린우리당은 더 좋은 경로를 밟아 어쩌면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정당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100~120석 정도였으면 우리도 내실을 다지며 실력을 쌓지 않았을까. 그때의 승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승리가 아니었다.
LG 팬 아들, 롯데자이언츠의 부산으로
- 정치하면서 탈당할 때가 제일 힘들었다고 했는데 부산으로 갈 결심을 할 때도 힘들지 않았나?
부산으로 가기로 했을 때는 가족 때문에 힘들었다. 아내도 그렇고 아이도 서울 사람 아닌가. 솔직히 승산이 높은 건 아니지만 이거 안 하면 죽어서도 눈을 못 감을 거 같았다. 그래서 통보하듯 말했다. 같이 갔으면 좋겠지만 당신 선택에 맡긴다고. 안 가면 나 혼자 갈 테니 동의만 해달라고. 그랬더니 아내가 그게 무슨 동의냐, 통보지 그러더라. 고맙게도 내가 먼저 온 6개월 후 가족들도 내려왔다. 그런데 중학교 다니는 아들은 정말 힘들었다.
"난 친구들이 다 여기 있는데. 나는 프로야구도 LG 팬인데 내가 왜 롯데 소굴로 가야 되냐."
"야, LG가 원래 롯데자이언츠 준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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