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증세 위해서는 조세 정의 확립이 중요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의 주된 공약도 복지 확대였다. 이 공약 실천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도 무척 높았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재정이 부족하다며 복지 약속을 어기고 있다. 올해 경제가 어려워진 것을 이유로 들지만, 최근 국회 예산정책처 보고서에 의하면 애초 공약에 책정된 재정 방안 역시 부실했다. 세입 개혁을 통해서 임기 내 약 51조 원을 마련한다고 큰소리쳤지만 실제는 목표의 60%만 가능하다는 게 국회 예산정책처의 지적이다.
결국 증세 논의가 불가피하다. 현실적으로는 증세를 통해 안정적인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 근래 한국의 조세 역사는 낙수 효과를 통해 경기를 활성화한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진 법인세, 소득세, 종합부동산세 등 감세로 이어졌다. 이제는 양극화 해소를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증세에 나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들의 조세 저항을 넘어서야 한다. 최근 생겨나는 복지 체험도 강조해야겠지만, 국민들이 느끼는 조세 정의를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 증세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탈세를 물샐틈없이 잡아내겠다는 약속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지금 역외 탈세와 금융 투명성 확보는 증세 문제, 나아가 복지 확대를 통한 양극화 해소와 맞물려 있다.
드러나는 재벌의 역외 탈세
그런데 조세 도피처를 악용한 재벌의 역외 탈세 행태가 드러날수록 점입가경이다. 효성그룹은 국외 페이퍼컴퍼니를 이용해 800억 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동생으로 한국타이어 총수로 있는 조양래 회장 역시 그러하다. 한국타이어는 2003년 말레이시아에 있는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외국인으로 가장하여 역외 탈세를 한 뒤 회사에 막대한 위험을 전가하고 개인 비자금을 운영한 사실이 드러나 국세청에 80여억 원의 탈루 세금을 납부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조양래 회장의 아들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위이기도 하다.
이들 재벌 총수들의 역외 탈세 및 비자금 조성은 여러 면에서 수법이 같다. 페이퍼컴퍼니 설립 시기와 지역, 회사를 이용한 자금 조성 과정에서 발생한 손실이나 투자 위험을 전가하는 배임, 외국인 투자자로 위장한 국내 주식 매매, 막대한 자본 이득과 역외 탈세 등 비슷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효성과 한국타이어를 대리해 준 법률자문단도 김앤장으로 같다. 영화 <도둑들>에서와 같이 선수들이 모여 조세 도피처를 악용해 같은 수법으로 계속 대규모 탈세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 5월 23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세청 앞에서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와 민변 등 단체 회원들이 조세 피난처를 이용한 기업인 등에 대한 세무 조사를 실시하고 강력히 처벌할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박근혜 정부, 공약 축소가 아니라 탈세 근절에 나서라
박근혜 정부가 지금 집중해야 하는 일은 재정이 없다며 복지 공약을 줄줄이 후퇴시키는 게 아니라 효성과 한국타이어 같은 재벌의 대규모 역외 탈세 문제를 철저히 조사해서 세금을 받아내는 일이다. 그래야 국민들이 세금이 공평하다고 느끼고 복지 확대를 위한 증세에도 홀가분히 나설 수 있다.
지난 5월 <뉴스타파>가 조세 도피처 현황을 보도한 후 역외 탈세 문제는 거대한 빙산처럼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역외 탈세액을 받아내기 위한 국세청의 노력도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국세청이 해외를 무대로 하여 이루어지는 역외 탈세 행위에 대응하려면 무엇보다 해외 기반 정보 획득이 중요하다. 국세청 내에 역외 탈세 전담 부서인 역외탈세담당관실이 신설된 후, 추징 규모가 크게 늘어났다고 한다. 즉 정보만 찾으면 더 적발해낼 수 있다는 전망이다.
최근 국정감사 때 제출된 국세청의 자료에 의하면 역외 탈세 관련 추징 건이 대부분 고액이어서 소송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고, 국외에 조세 기반을 두고 있어 증거 수집이 쉽지 않아 과세를 하더라도 패소 위험이 높다고 한다. 결국 정보 싸움이므로 역외 탈세의 해결책은 자발적 신고율을 높이고 자발적으로 신고하지 않는 경우를 대비한 국세청의 정보 수집력을 강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국세청의 역외 탈세 정보 확보를 위한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 현재 10억 원 이상의 해외 계좌만 신고 대상으로 하고 있는 국제 조세 조정에 관한 법률의 신고 대상을 주식과 부동산까지 확대하는 방안, 자발적 신고를 하지 않을 경우 처벌을 강화하는 방안, 관세청과 한국은행과 같은 유관기관의 국세청에 대한 정보 제공 의무를 확대하는 방안 등 여러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역외 탈세를 막기 위한 입법 과제들
모두 국회에서 입법돼야 하는 사항들이다. 국회의 적극적 노력도 필요하다. 지난봄 <뉴스타파>가 조세 도피처 악용 사례에 대해 보도한 이후 국회에서는 여러 개정 법안이 쏟아져 나왔다.
정의당 박원석 의원의 역외 탈세 방지 특별법은 역외 탈세 집중 관리 지역과 역외 탈세 집중 관리 대상자를 정할 수 있게 하고, 이들에 대한 세무 조사권을 강화하는 한편 국외 재산 부정 신고자가 재산 출처를 설명해내지 못하면 세금을 부과하도록 하며, 국세청장 소속의 국제 과세 정보 분석원을 설립하고 역외 탈세 고발자에 대한 포상금제를 신설하도록 했다.
민주당 이인영 의원의 조세 회피처 남용 방지를 위한 특례법안은 기획재정부 장관이 매년 조세 회피처 남용 방지 기본 계획을 수립·시행하고, 조세 회피처 재산 정보를 국회에 제공하게 하며, 조세 회피처를 이용하여 조세를 포탈하거나 재산 신고 의무를 불이행하는 경우 가중 처벌할 뿐만 아니라 취업 제한 및 인허가를 금지하고 금융회사 등의 임직원이 이 법에 규정된 죄를 범한 정황을 알았을 때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이 낸 국제 조세 조정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는 현재 금융계좌로 한정돼 있는 해외 재산 신고 의무를 부동산과 주식 등 전반으로 확대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민주당 김영환 의원이 낸 국제 조세 조정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해외 금융계좌 신고 의무 불이행 시 내는 벌금과 과태료를 신고 의무 위반 금액의 30%로 대폭 강화하는 내용이다. 현행법에 따르면 신고 의무 위반 금액의 10%에 불과하다.
최근 박근혜 정부도 국제 조세 조정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조세 도피처로 의심되는 지역 외국법인에 한국인이 대주주인 경우 외국법인 내부 유보 소득을 한국인의 소득으로 간주하여 과세하는 현행 제도 중 유보 소득의 종류를 더욱 확대하여 늘리고, 해외계좌를 신고하지 않거나 부정 신고한 자에 대해서는 돈의 출처를 국세청에 설명하게 하는 한편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부정 신고 금액의 10%를 과태료로 받아내는 등의 내용이다. 이 규정이 통과될 경우 현행 미신고 자체에 대한 과태료 10%가 부과되는 것에 더해, 돈의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것에 대한 10%의 과태료가 더 부과된다.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탈세로 보고 10%를 세금으로 과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오는 셈이지만 이름은 과태료로 하여 과세 요건 입증 책임 전환 논란을 피해가는 방법으로 보인다.
더불어서 역외 탈세를 막기 위해서는 금융 실명제도 함께 도입되어야 한다. 현행 우리 금융 실명 거래 및 비밀 보장에 관한 법률은 법명만 금융 실명제법이지 사실은 금융기관의 실명 거래 의무를 규정한 것에 불과한 정도이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실명으로 거래하지 않는 자의 경우 그 계좌에 대한 소유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고 형벌을 부과하는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 우리 부동산실명법의 경우 부동산을 실명이 아닌 다른 자의 이름으로 등기하는 부동산 차명 계약은 효력을 부인하고 부동산의 주인으로 등기된 자가 이를 모르는 제3자에게 부동산을 팔아버려도 실제 주인이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여 강력한 불이익을 주고 있다.
국회는 역외 탈세 근절 입법에 적극 나서라
이처럼 역외 탈세 근절을 위한 입법화가 시급함에도 국회는 자기 일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지금까지 김재연 의원 법안이 한 차례 회의에 상정된 것이 전부이다. 사실상 논의가 중단되어 있는 실정이다.
국회 국정감사가 지난 2일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제 곧 법안 심사가 시작되므로 입법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때가 되었다. 이번 정기국회에서 반드시 조세 도피자들을 잡을 법안이 통과되어야 한다. 그래야 복지국가로 가는 길도 가까워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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