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에서 "도둑질이나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 교통 규칙을 지켜야 한다." 등의 옳고 그름이 명확한 사항에 대한 판단은 이미 법이나 규정으로 정해져 있다. 사실은 이러한 것들도 이미 그러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는데, 얼마만큼 지원하는 것이 적당한가?" 또는 "사회 복지를 얼마나 더 늘릴 것인가, 이를 위해 세금을 얼마나 더 낼 것인가?" 등의 문제는 명확한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각 국가나 사회는 서로 다른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 그 서로 다른 기준이란 각각의 서로 다른 사회적 합의를 토대로 결정된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기초 생활 수급자에게 2인 기준 한 달에 약 80만 원(독일의 경우, 2009년 약 1300유로/190만 원)을 지급하고 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원래 그렇게 해야 한다는 법칙이나 규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자는 사회적 합의의 결과인 것이다. 물론 기초 수급액으로 80만 원을 결정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여러 시민단체들의 주장이나 여론의 형성, 정부 부처의 예산 및 복지 담당자의 의견과 국회의원들의 입법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겠지만, 결국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합의가 법과 규정을 만들어 실제 지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150만 원을 주어야 한다고 합의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고, 전혀 도와주지 말자고 합의하면 지원을 중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사회적 합의의 결과는 그것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그 사회의 경제적 형편이나 사람들의 생각, 의견 등이 모두 종합적으로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적 합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이 사회적 합의는 많은 부분 그 사회 내 정당들의 정치 행위를 통해 형성된다. 각 정당은 자신의 이념이나 강령에 따른 프로그램을 통해, 또는 총선이나 대선 등을 앞두고 제시하는 공약들을 통해 여러 가지 사안들에 대한 입장을 발표한다. 그러면 사회 구성원들은 투표에서 그것들에 대한 지지와 반대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표현한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각 현안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 18대 독일 총선 당시 최저 임금제에 대한 각 정당의 공약들에서 그에 대한 독일사회의 의견들을 확인할 수 있다. 사민당과 녹색당은 시간 당 8.50유로(약 1만2000원)를, 좌파당은 10유로(약 1만4000원)를, 기민당은 최저임금을 지역별, 산업별로 도입하는 방안을, 자민당은 도입에 반대하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선거 결과를 보면 기민당(CDU)에 대한 지지율이 가장 높았는데, 이를 감안한다면 최저임금에 대한 사회적 의견은 CDU의 입장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예를 든다면, 세금 문제와 관련하여 사민당은 최상위층(연간소득 10만 유로/약 1억4500만 원) 이상)에 대한 소득세율을 42%에서 49%로 인상할 것을 주장하였다. 반면에 기민당은 재정 건전화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세금 인상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기민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했는데, 이는 그러한 인상에 반대하는 것에 사회적 합의가 모였다고 할 수 있다. 혹시 이것을 보고 세금을 올리지 않는 것이 세계적 추세라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미 독일의 세율은 우리(최근 35%에서 38%로 인상)와 비교가 안 되게 높은 상황이니까.
새누리당의 공약파기, 독일에서라면 놀랄 일
그렇다면 다른 당을 지지한 국민들의 의견은 무시되는가? 독일의 경우에는 의회 중심의 '의원내각제 또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실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한 정당이 의회에서 절반을 넘지 못하면, 반드시 다른 정당과 협상을 통해 연립정부를 구성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제1당이 같이 연정을 꾸리려는 상대 정당의 공약들을 일정 부분 수용하여야 하는데, 그래서 다른 의견도 반영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8대 총선 후 기민당은 사민당(SPD)과의 연정을 위해 SPD의 일부 공약들을 수용하였다. 물론 최저임금제 도입의 경우, 협상을 통해 그 제도의 도입 시기를 2015년 1월 1일로 다소 늦추기는 했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정치 상황을 돌아보면 조금 황당한 측면이 있다. 새누리당은 경제민주화 실시, 복지 제도의 강화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고 지난해 총선과 대선에서 모두 승리하였다. 정치 체제가 다르기 때문에 독일처럼 연정을 구성하면서 서로의 공약을 주고받지는 않고 또 양당제 중심이라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반수가 넘어서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다른 당의 공약을 수용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들이 제시한 공약조차도 바로 걷어차 버리는 데에는 할 말이 없다.
예를 들어 기업 지배 구조 개선, 금산 분리 강화, 신규 순환 출자 금지 등의 경제민주화 공약이 사라지고, 행복 주택 20만 호 건설이 14만 호로 축소되고, 기초 노령 연금 20만 원 지급과 같은 구체적인 공약이 바로 후퇴하는 일은 독일에서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갑자기 경제 상황이 바뀐 것도 아니고 급작스레 노인 인구가 증가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공약을 포기하는 것은 국민들을 상대로 하지 않을 일(또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겠다고 사기를 친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인지 궁금하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정당에 대한 지지율이 여전히 제일 높다는 사실이다. 다시 한 번 할 말을 잃는다.
지난해 18대 독일총선에서 기존 여당이었던 기민/기사당(CDU/CSU)은 압도적인 승리를 하여 다시 제1당이 되었고, 의석수도 과반수에서 불과 5석이 모자란 311석을 얻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굉장한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하지만 지난 17대 연정에서 파트너였던 자민당이 몰락함으로써(최소득표율 5% 기준을 넘지 못해 최초로 연방하원 진출에 실패), 엄밀하게 말하면 범야권에 졌다고도 할 수 있다. 사민당이 193석, 녹색당이 63석, 좌파당이 64석을 얻었는데, 이 3개의 정당이 합의할 경우, 총 320석으로 반을 넘어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들 야권은 왜 연정을 꾸리지 않았을까?
공약파기 막으려면?…'정당의 독과점'부터 해결해야
그것은 국민들을 바보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사민당은 총선을 앞두고 좌파당과는 연정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연정 가능성을 열어둘 경우, 사민당 지지표가 좌파당으로 옮겨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약속을 무시하고 연정을 꾸릴 경우, 당장은 집권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다음이 없다고 봐야 한다. 야권 연정을 안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선거에서 승리한 제1당이 갖는 '연정구성의 우선권'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명확한 법이나 규정은 없지만 이러한 정치적 관행들을 무시할 경우, 마찬가지로 미래는 없다. 그것은 국민들이 눈을 치켜뜨고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정당의 구성 요건이 비교적 간단한 까닭에 다수의 정당이 존재한다. 실제로 최근 18대 총선에 참여한 정당들의 수는 30개가 넘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최소 득표율 5%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연방 차원에서는 주로 5개의 주요 정당들이 활동하고 있다. 각 정당은 에너지 문제에서 사회적 약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주제들에 대해 나름대로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다. 정당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보다 많은 사람의 의견을 반영할 것이라는 가정은 당연한 것이다.
반면에 한국의 정당들은 독과점이 아주 심한 모습이다. 당연히 국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데 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비정규직 등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을 대변하지 못하는 현재의 정당 시스템은 서둘러 개선해야 할 우리의 과제이다. 그러한 독과점을 유발하는 원인은 바로 '소선거구 선거제도' 때문이다. 이 제도는 다수 유권자의 의사를 전혀 반영시키지 못하는(다수가 사표가 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지역 구도에 기반을 둔 특정 정당들의 독과점을 고착시키고 있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정당의 진입을 구조적으로 막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정당의 출현을 가능하게 해 줄 '정당 투표제를 강화한 비례대표제'의 확대가 시급한 상황이다. 독일은 이미 전체 의원의 절반을 정당 투표에 의한 비례대표제로 선출하고 있다. 또한 이렇게 선거 제도를 변경하여 다수의 정당이 국회에 진입하게 될 경우, 정당정치가 활성화되면서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면 기존의 대통령제를 이러한 다당제에 걸맞은 '분권형 대통령제' 또는 '의원내각제' 등으로 바꾸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소선거구 선거제도를 그대로 두어 양당제인 상황에서 권력 구조를 바꾸는 개헌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드시 선거제도의 개선이 먼저여야만 한다.
대선 이후 지난 2013년 내내 지속한 여야의 대치 국면은 타협할 줄 모르는 우리 정치 문화의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대통령제'라는 제도상의 문제이기도 하다. 즉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정치 권력이 대통령과 국회로 나누어져 있어서 이 두 개의 권력이 맞설 경우, 정치 과정상 제도적으로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양측이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의혹, NLL 문제, 철도공사의 민영화 문제 등에 대해 완전히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며 맞서고 있지만, 이를 양보하여 설사 양측의 대립이 그리 크지 않는 작은 사안이라고 하더라도 서로가 양보할 생각이 없다면 마찬가지로 정치 시스템상에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다.
이러한 문제는 지난해 하반기 미국에서도 똑같이 발생하였다. 의회에서 여야가 차기 연도 예산안 의결에 실패함으로써 결국 연방정부가 일정 기간 폐쇄(shut down)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의료보험의 개혁(소위 오바마 케어)을 추진하려는 의회 내 소수인 민주당 행정부와 이를 반대하는 다수 야당인 공화당이 서로 양보 없이 대립했기 때문이다. 즉, 대통령(행정부)과 의회가 맞설 때 이를 해결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말이다. 누가 옳았고, 누가 틀렸나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교착 상황을 해소할 제도적인 방법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의원내각제에서는 최소한 이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보다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물론 언론이나 시민단체 등 여러 주체가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한 사회의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정당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그러한 정당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 대신에 사회적 갈등만이 난무하고 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기존 정당들의 독과점 때문이다.
이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한편으로는 정치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새 정치'에 대한 열망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의 정당 독과점 현상은 오히려 더 심화하고 있다. 그러한 독과점이 지속하는 이유는 새로운 정당의 국회진입을 막고 있는 현행 소선거구 선거제도에 있으며, 그 책임은 자신들의 기득권 때문에 이를 고치지 않고 있는 새누리당과 민주당에 있다.
조성복의 '독일에서 살아보니' - 사회정의란 무엇인가 ① '사회적 정의' 강조한 메르켈, 박근혜와 차원이 다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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