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 나라 대통령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놨다. 신규 일자리 가운데 10%를 '시간제 일자리'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다. 이렇게 하면, 90개의 전일제 일자리와 20개의 시간제 일자리가 시장에 생긴다. 비취업자 110명이 이를 나눠 갖게 되면, 고용률은 '손 안 대고 코 푼 격'으로 61.1%가 된다.
이것이 박근혜 정부가 추진 중인 '시간선택제 일자리' 확대 정책의 민낯이다. 일자리를 새로 만들지 않고도, '쪼개기'만으로 고용률 지표를 끌어 올릴 수 있는 정책이란 것이다. 정부는 이미 공무원과 교원 신규 인원의 3~9%, 공공기관 신규 인원의 3~10%를 2배수로 키워 시간제로 뽑으란 지침을 각 기관에 하달한 상태다.
저성장 시대에 본격 진입한 한국의 고용률 지표가 우려스러운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고용률을 억지 부양해선 곤란하다. 일자리는 개개인의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정부의 시간제 일자리 정책은 '정부 스스로 괜찮은 일자리 만들기 포기를 천명한 꼴'이라는 비판마저 나오는 상황. '시간제 일자리' 논란을 4회로 나누어 짚어본다. <편집자>
시간제 일자리 논란 ① '투잡' 뛰어 한 달 150만 원, 이래도 양질의 시간제? ② 정부의, 정부에 의한, 정부를 위한 정책, 시간선택제 ③ "시간제 교사 늘어난 학교에 내 아이 안 보내고 싶다" ④ 대기업 "시간제요? 언론에 솔직히 말하기 어려워요" |
미리 보는 시간제 일자리…워킹맘 박 씨, 시간제 '덫'에 빠지다.
2016년 1월 15일. 시간직 '투잡'을 뛰고 있는 박하선(38) 씨는 오늘도 자정이 다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진작에 잠들었고, 집안은 너저분한 상태.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생활비가 부족해지더라도 일을 줄여야 하나'란 생각이 든다.
박 씨는 약 2년 전, 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했던 '시간제 일자리'를 통해 사회생활을 재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몇 년간 다닌 첫 직장은, 육아 휴직을 받아주지 않았다. 둘째 아이를 낳으며 결국 일을 그만둔 박 씨는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 정책을 보며 '저거라도 어디야'란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한 시간제 생활은 기대와는 달랐다. 처음 일을 구한 곳은 2년 기간제로 하루 4시간에 100만 원을 약속한 대기업 자회사.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4시간을 넘겨 일을 시켰고, 시간제는 '잡부'란 시선 때문에 직장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기도 어려웠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남편의 월급 153만 원(2013년 비정규직 평균 임금 143만 원+10만 원)과 자신의 월급을 합쳐도 네 식구가 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멈출 줄 모르고 오르는 아이들의 학원비와 보육비, 그리고 전셋값을 보며 박 씨는 결국 시간제 '투잡'을 뛰기 시작했다. 최저임금을 간신히 맞춰주는 음식점 식당 보조였고, 4대 보험은 보장되지 않았다.
이렇게 한번 파트 타임 인생은 영원한 파트 타임 인생이 되고 말았다. 풀 타임(전일제)으로 전환되는 아주 드문 행운은 박 씨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다. 이제 와 박 씨에게 안정적인 전일제 일자리를 줄 기업도 찾기 어렵다. 하루 10시간 넘게 투잡을 뛰어 네 식구가 간신히 먹고사는 덫, 박 씨는 '시간제 덫'에 걸렸다.
ⓒ프레시안(최형락) |
최저임금 현실화는 '양질의 시간제' 필요조건
물론 이는 소설이다. 그러나 충분히 개연성 있는 소설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추진 중인 시간제 정책이 종국엔 위와 같은 사례를 양산시키며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는 양질의 시간제가 자라나기에는, 한국 노동 시장 토양이 너무 형편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로 꼽히는 것은 최저임금 문제다. 한국의 법정 최저임금(2014년 5218원)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2개국 중 14위로, 적정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게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최저임금을 인상하지 않고는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는 애초에 창출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애림 방송대 교수는 "시간제 일자리가 정말 양질이 되려면, 몇 시간을 일하든 먹고살 수 있는 임금이 보장돼야 하는 것"이라며 "그를 위한 가장 구체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시간당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현재 시간직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급여가 대체로 최저임금 선에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 통계청의 '2013년 3월 경제활동조사-근로형태별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 주 평균 21.4시간 일하는 단시간 근로자의 임금은 월 65만 1000원이었다. 시급으로 계산하면 최저임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 하는 5914원이다. 이들 노동자의 급여가 최저임금이 얼마로 결정되느냐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박근혜 대통령이 시간제 일자리 모범 국가로 내세우는 네덜란드의 법정 최저임금(11.38달러)은 한국의 3배에 가깝다. 또 다른 모범국가로 제시하는 독일은 2015년부터 11.57달러를 최저임금으로 도입할 계획이다.
최저임금 130%가 '양질'이라고?
정부가 시간직의 '저임금'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는 지적도 있다. 정부는 '양질의 시간제'의 기준으로 △자발성 △비차별 △기본적 근로조건(최저임금과 4대 보험)을 내세웠을 뿐, 저임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구체적 로드맵을 그리지는 못하고 있다.
그나마 정부가 제시한 '양질'의 급여 기준이 최저임금의 130%란 점도 문제다. 고용노동부가 민간 시간제 확대를 지원하기 위해 지난달 28일 발표한 '시간선택제 일자리 도입‧운영 안내서'를 보면, 정부는 기업이 최저임금의 130% 이상을 지급하는 등의 기준을 충족하면 급여의 50%(월 80만 원 한도)를 지원할 방침이다.
최저임금의 130%이면 2014년 기준 시간 당 6783원이다. 주 20시간을 일한다고 하면 월 급여가 약 70만5000원인 셈이다. 이런 시간제 일자리론 '투잡'을 뛰어 봐도 한 달 근로 소득이 150만 원 정도에 머무른다. 이는 2014년도 4인 가구 최저생계비(163만820원)에 미달하는 금액이며 노동계가 요구하는 적정 생활임금엔 더욱 못 미치는 수준이다.
▲ 박근혜 대통령 대선 공약집의 일부. |
'최저임금 인상 기준' 공약은 사라지고, 난데없이 '시간제' 등장
이런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때 공약한 '최저임금 인상 기준' 도입 공약은 이미 '공염불'이 돼 우려를 더욱 키운다. 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최저임금 인상 기준을 '경제성장률+물가상승률+소득분배 조정치'로 마련하고, 근로감독 강화와 징벌적 배상제도를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 처음 열렸던 지난 6월 최저임금위원회에선, 노사가 인상률을 두고 대립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정부 추천 공익위원들은 법정 기한까지 어떠한 중재안도 제시하지 않았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최저임금 공약은 돌연 사라지고, 공약에 없던 시간제 일자리가 등장한 상황"이라며 "이 때문에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 정책을 신뢰할 수가 없다. '양질'은 공허한 수식어고 '시간제'에만 방점이 찍힌 형국이다"라고 지적했다.
김 위원은 "대통령이 공약한 최저임금 공약만 지켜져도 경제성장의 과실을 노동자들에게도 나눈다는 면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시급으로 월급을 받는 사람의 60% 가까이가 5000원 이하의 시급을 받고 있는 상황인 만큼, 노동 시장의 밑바닥을 끌어올리는 최저임금 현실화 정책을 우선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저임금 현실화하고 전일제 전환 보장하면 자연히 늘어날 것"
최저임금이 현실화되고 시간제에서 전일제로의 전환 창구만 보장되면, 시간제 일자리 수요는 '자연히' 늘어날 것이란 설명도 나온다.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지금까지 발표된 정부 계획을 종합해 보면, 전일제 전환 창구는 사실상 차단돼 있는 상태"라며 "한번 시간제는 영원한 시간제로 남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시간제 일자리는 외려 기피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안전행정부가 시간제 공무원 도입을 위해 지난 9월 발표한 '공무원 임용령 개정안'을 보면, 시간제 노동자에게 전일제 전환 우선권은 아예 부여되지 않았다. 시간제 공무원으로 일하다 전일제가 되고 싶으면, 별도의 임용 절차(공무원·교사 시험)를 밟아야 해, 전환 창구는 사실상 차단돼 있다.
이 소장은 "전환권도 보장되지 않는 억지로 만든 시간제는 결코 양질이라 부를 수 없다"며 "시간제로 일해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게 한다면 양질의 시간제는 자연스럽게 늘어날 것"이라고도 설명했다.
시간제 정책이 정부가 실행하고 있는 사실상의 유일한 일자리 정책이란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정부가 나서 기업들에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가 아니라 저임금 시간제 일자리를 '표준'으로 창출하란 그릇된 신호를 보내고 있단 것이다.
이 소장은 "지불 능력이 있는 대기업이나 공공 기관은 양질의 정규직 일자리를 표준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시간제 일자리는 필요한 사람과 원하는 사람을 위한 부수적 일자리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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