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임경구 프레시안 정치 선임기자 및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번갈아 담당하며, 경제는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남북관계·한반도는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국제는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 생태는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맡고 있습니다.
이중 매주 한두 편의 칼럼을 공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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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여야 대치로 2014년도 예산안을 처리되지 못해 미국 연방정부가 멈춰 선 사건을 기억하실 겁니다. 전 세계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셧다운(shut down. 정부의 업무정지)'이란 말이 한국 정치에도 등장했습니다. 내년도 예산안의 법정시한(12월 2일) 내 처리가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한국판 셧다운'까지 거론하며 국회가 제 할 일을 방기하고 있다는 비판합니다.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활동'을 정치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예산안 심의와 의결은 의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 법정시한도 지키지 못하는 국회,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국회를 못난이로 만드는 손가락질에, 그리고 우리 정치의 수준을 개탄하는 한숨 속에 다른 저의가 숨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미국 셧다운의 경우 예산 집행이 일체 동결되는 데 비해, 우리는 전 회계연도 예산에 준해 재정 지출을 할 수 있으니 '한국판 셧다운'이라는 용어는 매우 과장된 표현입니다. 또한 국회가 '민생'을 외면하고 '정쟁'만 일삼는다는 꾸짖음, (박근혜 대통령이 자주 쓰는 이 말은) 사뭇 준엄해 보이기는 하지만 정치의 여러 행위가 상호 연결된 맥락에서 결정된다는 본질을 호도하기도 합니다. 현재 상황에선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사건에 대해 그만 좀 떠들라'는 말일 겁니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8일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국회 시정연설을 마치고 국회 본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국가기관 대선개입 사건 등 정치권 현안에 대해서는 '국회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제삼자적 입장을 고수했다. ⓒ연합뉴스 |
지난 1년간 여야는 이 사건을 둘러싸고 내전(內戰)을 방불케 하는 갈등을 겪어오고 있습니다. 여야 모두 얼마간의 정치적 이익을 챙기려는 속내가 없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당파적 이해를 떠나, 다른 선거도 아닌 대통령 선거에 국가기관이 개입한 부정이 있었다면, 그 진상을 낱낱이 밝히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단속하는 게 마땅합니다. 여당은 관권개입이 선거 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며 뻗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거 부정이 당락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도 없고) 진상 규명의 필요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부정의 정도와 무관하게 국가기관이 선거에 의도적, 조직적으로 개입한 자체가 문제의 본질입니다. 이미 오래전 달성한 줄 알았던 '한국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중대하게 훼손시켰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본질을 애써 외면한 채 민생을 앞세워 예산안 처리를 재촉하는 건 민생조차도 내 멋대로 하겠다는 권위주의적 발상에 다름 아닙니다. 민생은 정치와 별개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실현이 곧 민생의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속 빈 강정 같은 시간제 일자리 정책은 박근혜 정부가 민생을 단순한 생계의 문제로 한정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흔히 '먹고 사는 문제'라고 하는 민생을 정치적·경제적 민주화와 그로부터 실현되는 삶의 질의 개선 과정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입에 밥만 넣어주면 해결되는 문제인 양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실업률 지표 관리를 위해 급조된 정책의 한계는 26일 떠들썩하게 열린 시간제 일자리 박람회 현장에서 터져 나온 불만으로 당장 드러납니다.
(☞ '속 빈 강정' 시간제 일자리 박람회, 아줌마들 뿔났다)
민생에 관한 통치자의 후진적 인식은 박 대통령의 아버지 시절엔 분명히 통했습니다. 새벽종이 울리면 너도나도 일어나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던 그 시절 말입니다. 배고팠던 시절, '경제 성장'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목표 때문에 국민들은 독재까지 인내해야 했습니다. 산업화 시대의 무소불위 통치를 연상케 하는 박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권력 운용은 민생을 시혜의 영역에 국한하고, 정치를 마음대로 주무른 박정희 식 통치와 맞닿아 있습니다. 기초노령연금 후퇴 파동에서 보았듯이 복지는 경제 활성화의 후순위 과제로 밀려났고, 이제는 그 틀에서 편성한 내년도 예산안을 통과시켜달라고 국회에 내민 겁니다. 국정원 사건 같은 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정부가 알아서 예산을 잘 쓸 테니 잠자코 따라오라는 거죠. 정치도 민생도 내 멋대로!
박 대통령의 협소한 민생 정책은 정치에 대한 '강요된' 무관심, 내지는 방관으로부터 자양분을 얻습니다.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 사건을 민생과 유리된 문제로 떼어내고 (대기업 위주의) 경제 살리기를 민생의 문제로 포장하는 겁니다. 친정부 성향의 언론과 방송, 종합편성채널이 이런 담론을 주도합니다. 객관을 가장한 주장 가운데에는 여론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정치 이슈에 매달릴 게 아니라, 민생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도 있습니다. 민생의 중요성을 강조한 순수함의 발로라고 쳐도, 광의의 정치에 관한 이해 부족이거나 동전의 한쪽 면만 본 단견입니다.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정치의 본령은, 자원을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배분할 수 있는 공존의 구조를 필요로 합니다. 정치의 퇴행을 방기하고도 경제 민주화와 복지를 달성할 수 있다는 건 모래 위에 집 짓자는 주장과 같습니다.
민주화 이후 등장한 정부 가운데, 지금처럼 공존을 외면한 정부는 드뭅니다. 비판세력에 대한 호전적 태도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박창신 원로신부에 대해 "용납하거나 묵과하지 않겠다"는 박 대통령의 발언으로 확인됩니다. 보수단체의 고발을 접수한 검찰은 곧바로 박 신부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공안정국이냐 아니냐로 의견이 분분하지만, 분명한 건 온 국민의 피를 반공의 순수혈통으로 갈아치우려는 듯 '종북 사냥'이 이어지고 있고, 공안당국이 앞장서 활개를 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을 찍어낸 빌미가 된 혼외 자식 문제와 관련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한 때 '모셨던' 서초구청 공무원이 개인정보를 유출한 의혹의 중심으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구청 공무원은 아마도 '보이지 않는 손'의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일 테고, 유출된 정보를 언론사에 흘리고 이를 재활용해 검찰총장을 낙마시킨 거사를 꾸밀만한 실력 발휘는 국가기관이 아니고선 불가능해 보입니다. 순응하지 않으면 개인이건 집단이건 어떤 식으로건 손을 보고야 마는 정권 같습니다.
그러나 무작정 몽둥이를 휘두르는 서툰 짓이 아닙니다. 박근혜 정부의 통치술을 '반대의 동원'으로 명명한 분석이 인상적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지층의 열정을 동원하는데 탁월했던 반면, 박 대통령은 반대 진영을 고립시키는 통치술을 구사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선 통합진보당, 전교조, 친노 등 여론의 반감이 심한 반대 진영의 상대들만 정확히 골라 자극합니다. 결집력 강한 소수파인 이들은 강경하게 반발합니다. 반발의 정도가 세면 셀수록 여론으로부터 멀어져 더욱 소수화·고립화됩니다. 그러면 세상은 시끄러운 듯 보이지만 중도층, 중산층을 '방관하는 다수파'로 묶어둘 수 있는 것이죠. 이런 패턴을 집권세력이 훤히 읽고 있다는 얘깁니다. '종북몰이' 같은 시대착오적인 매카시즘을 난사하는 것도 북한에 대한 대중들의 공포 내지 거부감의 효과를 노렸을 개연성이 큽니다. 중간층을 내 편은 아니어도 적어도 반대편이 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통치술, 여기에 박 대통령의 안정적인 지지율의 비밀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약한 놈만 골라 패는 '약한 정부')
'반대의 동원'이라는 치밀한 계획에 따르는 정권에 비해, 127석이라는 덩치의 민주당은 덩치 값을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박 대통령의 독주는, 뒤집어 말하면, 야당이 자신들의 지지층을 대표해 대통령을 제어할 만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취약한 리더십, 국면 대응 능력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민주당은 집권세력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집권여당조차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서 소외된 마당에 이렇게 빈약한 야당을 상대로 박근혜 정부가 양보와 타협의 정치를 구사할 것 같진 않습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의 주장처럼 야당은 좀 강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 [정동칼럼]야당이 강해져야 하는 이유)
독자 세력화에 시동을 건 안철수 의원이 야권에 활력을 불어넣을까요?
<프레시안>과 <더플랜>이 안철수 신당을 포함해 정당 지지도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새누리당 47.8%, 민주당 13.4%, 안철수 신당 13.0%로 나타났습니다. 이와는 달리 27일 발표된 KSOI(한국사회여론연구소) 정기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안철수 신당 창당 시 지지정당은 새누리당 37.9%, 안철수 신당 27.3%, 민주당 12.1%로 나타났습니다. 두 조사의 편차가 큰 만큼 안철수 신당의 파괴력을 섣불리 예측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다만, KSOI 조사에서 신당에 대한 지지 이유를 묻자 '현재 지지하는 정당에 대한 실망 때문'(41.6%), '새로운 정당에 대한 기대감 때문'(34.1%)이라는 응답이 '안철수 의원이 마음에 들어서'(12.4%)라는 응답을 압도했습니다. 기존 정당에 대한 반감이나 신당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혼합된 결과일 뿐, 아직은 '안철수 정치'의 실체에 대한 반응으로 보기 어렵다는 풀이가 가능합니다. 11월 21일 발행된 <주간 프레시안 뷰> 15호를 통해 "안철수도 변해야 한다"고 한 김윤철 교수의 지적에 공감합니다. 김 교수는 "행동과 성과로 승부하는 정치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달리 덧붙일 말이 필요 없는 깔끔한 정리입니다. 다만, 기왕 시작된 야권의 재편기인 만큼, 새로운 에너지를 통해 사실상 '셧다운' 된 우리 정치가 정상 궤도에 정(正) 위치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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