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방에서 차 한 잔을 마신 후 다리를 다친 이화백 대신에 그의 부인이 마을 안내를 자청했다. 바로 집 앞에, 전생에 선을 세 번 쌓아야 얻을 수 있다는 문전옥답은 이 부인이 이화백의 도움을 받아가며 직접 우렁이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힘은 곱빼기로 들지만 꽤 소출이 있는 모양이다.
마을길을 돌아 '장작개울'(아마 마른 장작처럼 비 올 때 금방 물이 불었다 금방 물이 잦아드는 모양을 따서 붙인 이름 같다)서부터 마을 여행을 시작했다. 시작 지점에 박달대장군과 금봉낭자가 우리를 맞는다. 마을 노인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마을 정자는 꽤나 위풍당당했다. 이 정자에 솜씨 있는 노인들이 만든 목어는 비행기 모양의 유선형으로 절간의 목어보다 더 날렵해 보였다. 이 '장작개울'을 따라 왕복 2킬로의 산책로를 조성 중에 있단다. 길에 자갈도 깔고 모래흙도 덮었다. 중간 중간에 솟대군락지도 만들고 이 마을 출신인 오탁번시인의 시, 도종환시인의 시, "송알송알 싸리 잎에 은구슬"로 시작하는 동요 '구슬비'의 작사자로 이 마을에서 생을 마치셨다는 권오순 할머니의 노랫말이 이화백이 자기의 글씨와 그림도 맛깔나게 엮어서 산책로를 따라 전시돼 있었다.
개울을 따라 마을 산책길을 둘러보고 이화백의 집으로 들어오니 작업 공방에 따뜻한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차를 마시면서 이 화백이 이 마을로 들어오게 된 동기를 물었다. 원주에 사시던 장일순선생의 권유에 의해서란다. 이현주 목사가 잠시 있었던 이 마을을 소개했고 지금 살고 있던 집이 비어 있었는데 처음 보자마자 '딱'이라는 감이 왔다고 한다.
돌이켜 기억하건대 그의 작업들은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점점 더 정갈해지고 맛깔스러워진 게 아닌가 싶다. 80년대 초 그 어지러운 정국에서의 그림은 주제와 형식이 어쩔 수 없이 다 험했다. 그는 여기 들어와서 안정과 마을이 주는 영감을 얻은 게 아닌가. 그의 판화에서 특히 두드러진 특징은 그림에 맞는 예지가 가득 찬 짧은 문구와 판각으로 만든 독특한 글씨 모양이다.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 그의 판화는 점점 어떤 경지를 얻어 갔다.
그의 집에서 나와 동네 어르신 부부를(이영구씨 부부) 모시고 미리 예약해 놓은 면소재지 옆의 음식점으로 갔다. 맛깔스러운 곤드레나물밥으로 저녁을 먹으면서 이 두 어른의 얘기 보따리가 끌러졌다.
일제 시대 얘기, 육이오 전쟁 얘기, 또 간혹 가다 마을 전 부녀회장인 할머니와 그 밑에서 궁합을 맞춰 일한 부녀회 총무인 이화백의 부인은 마을 대소사 이야기하며 노인들 건강 이야기를 끝없이 이어갔다.
집안잔치에 쓸 술을 담그다가 세무서원이 들이닥쳐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긴 얘기와 육이오 전쟁 중 마을로 퇴각하며 들어온 인민군들을 동네 한 분이 어디서 버려진 기관총을 갖고 와 설치하고 쐈는데 이 기관총 소리에 자기 자신이 놀라 기관총을 버리고 도망을 쳤것다... 이 기관총 소리를 들은 인민군들이 다시 되 쳐와 마을사람들과 국군들이 여러 명 죽었다는 얘기는 가슴 아팠지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유달리 기억력 좋고 총기가 있으셨다. 할머니가 모든 얘기를 이끌어 가셨는데 일제에서 해방되던 무렵 어린나이에 일본 사람들 집과 주재소 앞에서 "동경은 을유년에 절단이 나고 지금은 조선이 제일이란다" 등의 몇 소절을 음정 박자 다 맞춰가면서 노래까지 불러 주신다.
마을 어르신들 얘기를 듣다보니 11시가 가까워진다. 붙잡는 어르신들을 "빨리 주무셔야 오래 사신다."고 달래놓고 겨우 이화백의 공방으로 돌아왔다.
이화백 부인이 비장의 '사과주'와 이화백이 발을 찌어가며 딴 은행과 집 앞 논에서 잡은 메뚜기볶음(유기농법으로 짓는 논이라 메뚜기가 지천이라고 한다)이 안주로 나왔다. 술이 50도가 넘는 데 사과향이 쌈박하다. 목줄기를 타고 넘어가는 화주의 느낌이 좋다. 앞으로 '이철수 사과소주'가 명품 술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몇 년 전부터 원래 마을 땅이었던 뒷산에 어느 기업체가 리조트로 개발을 시작하려고 했다. 이화백은 이때부터 마을 주민들과 함께 법정투쟁을 벌여 왔다. 이 화백은 치밀한 성격대로 이 산의 대부분이 마을 땅이었다는 마을 노인들의 증언과 이 마을에 관한 일제시대 부터의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일종의 마을조사사업이었다.
이 마을은 바로 그 즈음 '생명의 숲'에서 벌이는 마을 조사사업의 대상지였다. 묘하게도 '생명의 숲'에서 벌이는 마을 조사사업은 진안의 '백운면'과 제천의 '백운면' 두 군데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마을조사사업이 상당히 의미가 있는 사업이라고 판단하여 진안 백운면의 마을조사사업의 자문위원을 자청하여 수시로 진안을 드나들었다. 제천 백운면의 마을조사사업은 이 리조트개발사업 때문에 아쉽게도 일 년 차로 끝나고 말았다.
이 법정투쟁은 대법원의 화해조정안을 받아들이는 걸로 끝났지만 그는 지금도 산을 오르내리며 이 합의안이 잘 이행되고 있는지를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생계에 지장을 줄 정도로 자기 작품도 못하고 시간을 빼앗겨 가며 법정투쟁을 벌인 이화백은 대신 소중한 것을 얻었다. 바로 마을 주민들의 신뢰를. 그래서 지금 그는 마을유공자(?) 대접을 받는다.
새벽 한시까지 얘기가 진행됐다. 논농사는 주로 남정네들의 몫이라 이화백의 부인이 혼자 논에 들어가 있을 때 마을 주민들이 나타나면 여자가 너무 유난떠는 것 같아 몸을 숨겼다는 얘기. 우렁이 유기농법이 너무 힘들어 부부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농약가게로 달려 갈 뻔 했던 얘기, 시골 마을에서 자식들을 자립심이 강한 얘들로 키운 얘기부터 최근의 문화예술계의 어두운 현안들에 대한 얘기로 이어졌다.
이화백 부부와 헤어져 밖으로 나오니 밤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그들이 정해준 인근의 숙소로 자리를 옮겨 답사팀만의 뒷담화를 풀었다. 답사 첫 날이라 다들 흥분했는지 새벽 서 너 시가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혼자서 뒷산으로 산책을 나섰다. 얼마쯤 올라가니 정말 이화백이 말했던 대로 산을 잘라내고 도려내는 끔찍한 개발이 진행 중에 있었다. '공사관계자 외 출입금지' 입간판을 붙여 놓은 산의 입구에는 돌을 실은 대형 트럭들이 계속 오르내리고 있었다. 향약까지 있는 마을이었지만 이런 개발에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허망한 마음으로 중장비의 굉음을 뒤로한 채 산 중간에서 돌아와 버렸다.
팀의 총무인 김송희(이곳 제천여고 출신이다)의 안내를 받아 제천 시내의 유명한 올뱅이(올갱이의 제천식 방언?) 해장국집을 찾았다. 여독, 주독이 일시에 풀리는 것 같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