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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전주국제영화제가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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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전주국제영화제가 남긴 것

[오동진 칼럼] 그 훌륭함에 대하여

지난 한달간 이런 저런 영화들을 봤지만 이런 저런 글들을 쓰지는 않았다. 물론 게으름이 1차 원인이다. 예전처럼 웬간해서는 후딱 써지지가 않는다. 몸과 마음이 따로라는 것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게 '내 탓'도 있지만 '네 탓'도 없지는 않다. 도저히 쓸 말이 마구마구 쏟아지는 영화들이 아니었다. 기대를 했던 영화들이 더욱 그랬다.

길예르모 델 토로가 프로듀서를 했느니 어쨌느니 소문이 돌았던 <줄리아의 눈>은 오랜만에 만나는 스페인 국적의 영화인 만큼 신선할 줄 알았다. 기대가 컸던 탓일까. 실제로는 2%가 정도가 아니라 20% 정도가 부족한 영화로 보였다. 물론 무슨 얘기를 하려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보인다고 해서 꼭 다 보는 것은 아니며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꼭 다 못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영화의 테마였다. 뭐, 그건 알겠는데 영화의 만듦새가 이런저런 의문과 회의를 만들어 냈다. 살인자는 줄리아의 남편을 살해하면서 왜 꼭 목 매 자살하는 것처럼 위장했을까. 살인자의 어머니는 줄리아에게 왜 맹인인 것처럼 굴었을까. 디테일이 떨어졌다. 여러 군데에서 앞뒤가 맞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종종 짜증이 일었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 하품까지 하게 됐다. 단 하나. 영화에서 좋았던 것은 줄리아 역을 맡았던 벨렌 루에다란 배우의 외모였다. 매력적이었다. 영화를 끝까지 보게 한 것은 전적으로 이 여배우 덕이었다.

액션 스릴러 <한나>도 그랬다. 스타일, 컨셉 등등은 나쁘지 않았는데 영화 속 인물들의 행동동기가 하나같이 빈약해 보였다. 특히 에릭 바나가 맡았던 한나의 아버지 역이 그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빠도 아니었다는 얘긴데, 첩보 스릴러에서 갑자기 도덕경을 읽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페이스 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한나>를 보고 있으면 안느 파릴료의 <니키타>가 얼마나 걸작인가를 알 수 있다고. 한나 역을 맡은 시얼샤 로넌은 애쓴 만큼 얻은 게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키라 나이틀리 주연의 <라스트 나잇>은 좀처럼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마이크 피기스의 <원 나잇 스탠드>가 극적 긴장감이 얼마나 팽팽했었는가. 무엇보다 <라스트 나잇>에는 <원 나잇 스탠드>같은 섹시함이 부족하다. 극중 인물들은 고민하기 보다 몸을 더 섞었어야 했다. 영화가 너무 점잖았다. 이런 류의 영화는 파격적인 베드 신이 나오는 게 옳다.

이런 외화들을 포함해 <위험한 상견례>니 <위험한 고객들>이니 <세상에서가장 아름다은 이별>이니 하는 요즘의 영화들을 거론하면서 다소 심드렁하게 굴었던 건, 영화가 새롭지가 않아서다. 물론 영화를 보는 나 자신이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숱한 영화들을 봐왔다. 이제는 어떤 영화를 보면 다른 어떤 영화와 비슷하다고 느낄 때가 많고 그래서 새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 자신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래도 영화는 늘 새로워야 한다. 그게 생명이다. 물론 새로운 영화들이 적지 않다. <무산일기>도 그렇고 <파수꾼>, <엄마는 창녀다> 등등이 다 신선한 충격의 영화들이다. 마이크 리 감독의 칸 영화제 수상작 <세상의 모든 계절>도 좋았다.(이 영화에 대해 한줄도 쓰지 않은 건 전적으로 게으름 탓이다.) 문제는 이들 영화들이 여전히 변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영화판이 새로워지려면 이런 류의 영화들이 한 발 정도는 주류권에 걸치고 있어야 한다. 여전히 절대적인 비주류 취급을 받고 있다. 이래서는 영화판이 흥이 나지 않는다.

ⓒ전주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여러 영화들을 보면서 힘이 빠져 있을 때 전주국제영화제가 다크 호스로 나타났다. 영화제 작품들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 달 28일 저녁, 전주 소리의 전당에서 열렸던 영화제 개막식 얘기다.(올해로 제13회인 전주영화제는 지난 5월 6일 폐막됐다.) 한마디로 개막식이 너무 훌륭했다. 개막식 중간에 열렸던 '백현진의 어어부 프로젝트' 밴드의 공연이 훌륭해서? 진행을 맡았던 김상경, 김규리의 사회가 휼륭해서? 다 아니다. 아주 간소하게 약 40분만에 식을 끝냈기 때문이다. 개막식은 지루한 법이다. 빨리 끝내고 개막작을 보는 게 최고다. 게다가 이번 전주의 개막작은 베를린에서 금곰상에다 남녀주연상까지 휩쓸었던 이란 영화 <씨민과 나데르, 별거>였다.

이번 전주처럼 모든 영화제의 개막식은 짧게 끝낼 수 있다. 많은 영화제들이 그러지를 못한다. 인사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지역자치단체의 무슨무슨 대표들이 그렇게나 무대에 오르고 싶어하고 또 기를 쓰고 오르기 때문이다. 특정 영화제를 거론할 필요가 없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영화제들이 지금까지 다 그래 왔다. 장관에 차관에 시의회 의장에 문화위원회 위원장에, 사람들은 아무도 듣지 않는데, 나 홀로 축하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영화제가 관변단체의 행사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모두들 얘기한다. 축사를 좀 줄여야 한다고. 문제는 지자체의 절대적 지원과 후원 속에 열리는 영화제들로서는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 전주는 그런 면에서 과감성을 선보였다. 올바른 표본이 됐다. 인사말은 딱 세명, 조직위원장인 시장과 집행위원장 그리고 심사위원장 뿐이었다. 영화제 개막식은 이래야 한다. 군더더기를 빼야 한다. 그건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이 된다. 영화제가 이런 저런 행정 권력의 것이 아닌, 시민들과 관객들의 것임을 보여주는 일이다. 영화제들은 진작에 이런 행동방향을 보여줬어야 했다.

영화는 시대의 무엇인가. 무엇이 돼야 하는가. 그냥 버라이어티 쇼처럼 재미만 있으면 되는 것인가. 그렇다고 버라이어티 쇼가 재미가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영화 스스로가 답을 내지 못할 때 영화제가 그 방향을 보여주는 건 매우 유의미한 일이다. 거기서부터 뭔가 동력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제를 사랑하고, 영화제의 영화들을 사랑하고, 영화제의 영화 같은 새로운 영화들이 일반 상영관에서 많이 걸렸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건 그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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