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안전성의 효과
올해 6월 나는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이창곤 소장과 김연명 중앙대 교수가 주도하는 스톡홀름포럼과 함께 스웨덴과 덴마크를 방문하여 배우는 즐거움을 누렸다. 코펜하겐에서 덴마크 경총(DA), 노총(LO), 집권당인 사회민주당을 잇달아 방문했는데, 이구동성으로 덴마크의 복지를 한마디로 '유연안전성(Flexicurity)'라고 말했다.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실업자를 지원하는 사회안전망이 결합된 '유연안전성'으로 일자리를 잃어도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안정감이 높다.
놀라운 일은 기업이 노동자를 맘대로 해고할 수 있지만, 노동조합의 반발이 적다는 점이다. 사실 덴마크의 고용보호 수준은 독일과 프랑스보다 낮다. 최저임금제도 없다. 그러나 실업급여 수준은 매우 높다. 과거에는 4년간 실업수당을 지급했지만, 최근 2년으로 축소했다. 그래도 2년 동안 이전 직장 임금의 80%를 받는다. 또한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통해 실업자의 재취업을 돕는다. 정부 예산 중 직업훈련 비중이 높아 한국의 3배 수준을 넘는다. 그러니 노동자들이 해고와 직장 이동을 꺼리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유연안전성은 고용보호보다 고용창출을 강조한다.
유연안전성의 효과는 청년 고용에서 더욱 빛이 난다. 덴마크 경총 해닝 가데 수석 고문은 "덴마크의 청년 실업률은 유럽에서 가장 낮다"고 강조했다. 그는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직업 교육을 강조하기 때문에 취업 연계 효과가 크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유럽연합 평균 청년 실업률이 22%인데 비해, 덴마크는 13%에 그쳤다. 에스파냐는 50%에 달하고, 영국과 스웨덴은 20% 수준이다. 덴마크의 청년들은 일찍부터 직업기술 교육을 받는다. 학생이 기업의 견습생으로 일해도 급여를 제공한다. 정부 차원에서도 대학과 산업, 연구 인력과 중소산업체의 협력을 지원한다. 뱅앤울프슨, 레고, 머스크, 노보 노디스크 등 세계적 기업도 보유하고 있지만, 기업의 70%가 20인 이하 직원을 고용하는 회사이다. 대기업이 거의 없고 중소기업을 중시하지만 고숙련 기술자의 수준이 높다.
▲ 공원에서 여유를 즐기는 덴마크 사람들. ⓒ덴마크 언론 BT (www.bt.dk) |
노사 타협과 사회적 대화의 지혜
덴마크의 유연안전성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은 아니다. 특히 사회보호 시스템을 만든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는 매우 길다. 18세기부터 노동운동이 등장했으며, 1871년 사회민주당(SDP)이 창당되었다. 1899년 노동총파업으로 기업과 노조가 4개월간 대립한 끝에 역사적인 '9월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사회적 동반자 관계를 만드는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세기 초부터 노동자와 소농의 정치적 역량이 커지면서 정치적 목소리가 높아졌고, 1930년대 최초로 사민당에서 노동자 출신 총리가 배출되었다. 이때 기업과 노조의 대화와 타협을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노사 교섭과 자율적 협상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또한 정치권의 합의를 통해 건강보험, 노령연금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복지제도가 사회적 약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만들었다.
정치권에서도 한 정당이 권력을 독점한 적이 없다. 사회민주당, 사회자유당, 자유당, 보수인민당 등 4개 주요 정당이 덴마크 정치를 지배했다. 1960년대까지 사민당이 주도적으로 정치를 이끌었다. '68혁명'으로 4대 정당의 지지율은 80% 수준에서 60%로 떨어졌지만, 좌파와 우파 연정이 형성되면서 서로 다른 정당들이 협상하는 기술을 터득했다. 하지만 덴마크의 모든 정당은 이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복지국가를 유지해야 한다는 정치적 합의를 존중하고 있다. 노인, 어린이, 환자, 실업자를 위한 사회적 보호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갖고 있다.
보편적 복지국가의 사회적 합의
덴마크는 어떻게 관대한 복지국가를 유지할 수 있을까? 당연하게도 높은 세금과 사회보험료 때문이다. "복지국가는 의료도 공짜, 교육도 공짜, 연금도 공짜"라는 말을 하면 덴마크 사람은 모두 웃을 것이다. 덴마크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5만 달러가 넘지만, 평균 소득세율은 50% 수준이기 때문에 관대한 복지제도를 제공할 수 있다. 부자들은 수입의 67%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모든 국민이 납부하는 부가가치세는 25% 수준으로 매우 높다. 상대적으로 저소득 노동자들에게 불리하다. 하지만 덴마크 노총(LO) 엔스 에릭 오흐트 수석 고문은 "덴마크의 세금은 높지만 복지국가를 위해서는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다른 한편 자동차 세금은 무려 250%나 된다. 3000만 원짜리 차를 사려면 7500만 원의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지위 경쟁을 위해 대형차를 선호하는 한국과는 달리 덴마크에서는 소형차가 대세이다.
덴마크 국민이 복지국가를 지지하는 또 다른 이유는 높은 사회적 신뢰이다. 덴마크 사람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도 매우 크다. 2012년 국제투명성기구 보고서를 보면, 덴마크의 국가 청렴지수가 100점 만점에 90점이었다. 또한 덴마크에서는 다른 유럽 국가보다 가족과 공동체의 소속감이 높다. 인구 550만의 작은 나라이며 동종적 문화를 유지하는 점도 사회적 결속력을 높이는 이유일 것이다. 다른 한편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높다는 점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코펜하겐에서 일주일을>의 저자 유승호 교수는 덴마크에서는 "직업에는 귀천이 없는 게 아니라 직업의 귀천이란 표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회적 평등을 강조한 18세기 프랑스 사상가 루소는 <에밀>에서 이 세상 최고의 직업은 농부라고 말했다. 그다음이 대장장이, 목수의 순서이다.) 내 친구 유승호 교수에 따르면, "덴마크에서는 변호사와 목수가 서로 직업의 우열 없이 아무렇지 않게 친구로 지낸다"고 전한다. 납세 후 소득이 변호사나 목수나 별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덴마크의 상대적 빈곤율과 사회적 불평등의 수준도 매우 낮다.
자전거를 타고 다녀도 행복한 사람들
코펜하겐은 '자전거 천국'으로 유명한 도시이다.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페달을 밟는 대학생뿐 아니라 양복 정장을 입고 자전거를 타는 나이 지긋한 노신사도 볼 수 있다. 직장인의 35%가 자전거로 통근한다. 국회의원도 자전거를 타고 등원한다. 1970년대 자동차 사용이 늘어나 환경오염이 심각해지자 덴마크 정부는 자전거를 대중교통으로 장려하기 위해 자동차에 '세금 폭탄'을 부과하고, 자동차 생산을 아예 포기했다. 자동차 산업으로 돈을 벌고 일자리를 만들려고 애를 쓰는 한국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원전과 4대강 사업으로 환경을 파괴해도 돈만 벌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한국의 상당수 사람은 북유럽 국가를 말할 때마다 "그 나라들은 우리와 너무 달라요"라고 말한다. 물론 다른 점이 많다. 그러나 북유럽 복지국가의 경험에서 배울 점을 찾는 노력을 포기하는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덴마크 사민당 사무실에서 만난 20대 청년 사이몬 레더 국제위원장은 덴마크의 행복 비결로 "사회정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복지제도, 낮은 부패율, 높은 사회적 신뢰"를 꼽았다. 우리나라에서 국정개혁을 위해 단골로 등장하는 의제이다. 북유럽의 역사적 맥락을 잘 이해하면서도 한국적 적용의 가능성을 고민해보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몫일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비결이 무엇인지 깊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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