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말을 멈춘 나는 결국 강연 포기를 선언했다. 그런 나에게 대한문에 데려가 달라고 누군가가 찾아왔다. 나는 시큰둥하게 그냥 저쪽으로 가면 된다고 대답하고 보니 길이 꽉 막혀있다. 그런 꿈에서 깨어나니 새벽인데 벌써 옆 공사장에서 철근을 우당탕탕 나르는 일꾼들의 소리, 부식 차량의 메가폰 소리가 골목을 채우고 있다. 또 아침이 시작되나 보다.
오늘 아침 따라 지난 5년간 첩첩 쌓여온 문제들이 더 무거워 보인다. 아니, 문제들이 아니라 그 짐을 짊어져 왔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와 외침들이 들린다. 어떻게 새겨듣고 챙겨야 할지 가슴을 긁어대는 외침들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2008년 5월 2일 청계천에서 '광우병 의심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촛불 문화제가 시작돼 두 달간 이어졌다. 대통령은 두 번씩이나 사과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물대포와 최루탄이 동원됐고 촛불시민들에 대한 무더기 사법처리가 감행됐다. 진압에 동원됐던 한 의경이 양심선언을 했다.
제게 있어 저항은 주체성을 가지고 제 삶을 만들어나가는 일입니다.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지니고 자신의 삶의 색채를 더해가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삶과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는 것은 누구에게든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억압하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지금껏 억압들에 대해 순응하며 살아온 제 삶을 내던지며 저항을 통해 제 삶을 찾아가야 한다고 느낍니다.
… 지난 몇 달 간의 촛불집회를 진압대원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전 이런 생각을 했어요. 촛불을 들며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들, 미국과의 쇠고기 재협상 요구, 공기업, 의료보험 민영화 반대, 경쟁으로 내모는 교육 제도에 대한 반대 같은 것들이 이런 목소리로 느껴지더군요. 권력은 언제든지 우리의 삶을 위협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해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으로 말이에요. … 우리를 사지로 내모는 권력은 어디 숨었는지 보이지도 않고, 암묵적으로는 그저 적으로 상정된 시위대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며 상처를 덮고 합리화를 시키는 거죠. 이런 나날이 반복되고, 저는 제 인간성이 하얗게 타버리는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저항한다' 2008년 7월 28일 이길준 이경 양심선언문)
촛불 집회가 계속되는 한편에서 노동자들의 긴 고통의 시간도 이어졌다. 2008년 5월에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힘겨운 싸움이 진행형이었다. 그해 5월 16일은 기륭전자 1000일, 재능학습지 150일, 뉴코아 330일, 이랜드 330일, KTX 승무원 800일 투쟁을 기록했다. 그 시간 동안 그녀들은 1인 시위, 점거투쟁, 단식, 3보 1배, 삭발 등 안 해본 것이 없었다.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해고와 징계를 받고 구속, 수배, 민형사상 손해배상청구와 형사고발 등 받을 수 있는 고통은 다 받은 그녀들은 이렇게 외쳤다.
그들이 ["우리는 더 이상 1회용 소모품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당한 인권을 가진 노동자입니다." 이 한마디를 지키는 일에 왜 이렇게 힘들고 긴 시간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탄식할 때, 그래도 우리는 그 탄식이 보여준 그들의 투쟁에서 움트는 희망을 봅니다. … 이제 우리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버틴 이 작고 여린 희망에 힘을 모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노동부와 검찰과 회사 스스로가 불법 파견을 인정하고도 그에 대한 피해를 복원하지 않는 회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는 법을 만들어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어처구니없는 국회를 우린 또한 이해할 수 없습니다. … 우리가 지금 이들과 함께 하지 못한다면, 비정규 법안을 바로잡는 일에 나서지 못한다면 우리도 시대의 죄인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 희망은 연대로 오는 것임을, 어둠은 끝내 희망으로 오는 빛을 이길 수 없음을 확인합시다. (2008년 5월 16일, 기륭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농성 투쟁 1000일, 1000인 선언문)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진전을 오랫동안 호의적으로 봐왔던 국제인권단체들이 염려의 눈길로 바뀌어 한국의 인권상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국제앰네스티(AI) 등이 한국의 인권상황에 대해 긴급호소와 권고 등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들끓는 분노로 일어선 이상, 사람들은 결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귀 기울이지 않는 지도자들은 분명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2008년 5월 연례보고서 발표 기자회견, 아이린 칸,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
2008년은 시작에 불과했다. 2009년 새해 벽두의 용산 참사, 한여름 쌍용자동차에서의 대규모 정리해고, 생수와 의약품의 반입까지 가로막힌 77일간의 공장점거파업, 그리고 이어진 살인진압이 남긴 상흔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이 두 사건은 "여기 사람이 있다!"는 절규와 "함께 살자!"는 호소를 남겼다.
예술인, 종교인은 진선미를 추구한다.
고통받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
… 진실은 임기가 없다. 임기 후에 보자!
치부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드러나면 비틀거리게 될 것이다.
진선미, 아름다운 인간성을 추구하는 마음을 훼손하고 있다.
안될 일이다. … 공권력이 백성을 저버리고 권력의 조종을 받으면 똥개가 된다.
그 때부터는 저항할 수밖에 없다. (2009년 4월 4일 용산참사 현장미사에서 문정현 신부)
같이 살자는 상생의 요구가 묵살되고 일부만이라도 살아남자는 정글의 법칙이 관철된 것이 쌍용차 노동자가 아닌 누군가의 성공일까요? 인권이 설자리를 잃고 경제적 계산만이 남은 자리에서 소수가 살아남았음을 합리적인 해결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회는 그 구성원 모두가 노동을 통하여 행복하여질 기회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믿는다면, 사회가 개인의 가치추구 기회를 보장함과 함께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하여야 한다고 동의한다면 쌍용자동차의 해결 방안이 최선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쌍용차 사태는 어느 누구만의 패배이고 누군가의 승리가 아니라 모두가 그리고 가치가 패배한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만의 실패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총체적 실패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우리 현실은 이러한 실패와 패배를 지금 이 시점에서 바로잡을 힘과 비전을 모아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점입니다. 그러나 쌍용차 사태에서 보여준 우리 사회의 실패가 최종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리 되어서도 아니됩니다. (2009년 11월 쌍용자동차 인권침해 백서 발간사)
여러 분야의 인권상황이 악화되는 가운데 공권력의 인권침해에 대해 감시‧비판하라고 만든 국가인권위원회마저 퇴행을 거듭했다.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국가인권위원회에 대한 21% 조직축소를 단행했고 '무자격자'란 별칭을 얻은 현병철 인권위원장이 임명됐다. 정권의 인권위 무력화는 현실이 되었고, 국가인권위는 피디수첩 사건, 촛불시위 등 정권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사안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북한인권만을 유독 강조했다. 현병철은 이명박 정권 말기에 연임되기까지 했다.
5년 내내 국가인권위에 대한 비판과 반발이 끊이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그중 하나의 사건은 수상거부였다. 2010년, 국가인권위가 세계인권의 날에 수여하는 상을 받게 된 수상 예정자들이 "인권위는 상을 줄 자격이 없다"며 수상거부를 한 것이다.
인권에세이로 선정된 작품들을 살펴보면 많은 내용들이 '언론, 표현의 자유'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위가 직접 선정한 작품들에서 이야기하는 인권의 '반도 못 따라가고 있는' 인권위의 모습을 제대로 돌아보아야 한다. 인권위원장으로서 자격이 없는 현병철 위원장은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어온 것에 대해 책임지고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내가 에세이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인권'을 지금 현병철이라는 사람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끝도 없이 밑바닥으로 추락시키고 있다. 인권을 보장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애를 써야 할 국가인권위가 오히려 인권을 모욕하고 있는 것만 같다. 정말로 지금 상황에 심각성을 느끼고 조금이라도 성찰할 의지가 생긴다면, 감히 인권에세이 수상자인 청소년들에게 "참 잘했어요. 그러니 우리가 상 줄게요" 같은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현재의 국가인권위원회를 제대로 된 국가인권위원회로 인정할 수 없으며 현병철 위원장이 위원장으로 앉아있는 인권위에서 주는 상은 받고 싶지 않다. 현병철 위원장은 나에게 상을 줄 자격조차 없다. 나는 2010 인권에세이 대상 수상을 거부한다. (2010년 12월 7일, 인권에세이 대상 고3 김은총, "현병철 위원장은 나에게 상을 줄 자격조차 없다")
그나마 우리를 술렁거리게 한 것은 '희망버스'의 출현이었다. 2011년 크레인에 올라가 309일 만에 내려온 김진숙 씨의 고공농성을 지지하기 위해 전국에서 여러 차례 희망버스가 모여들었다. 왜 숱한 이들이 그 버스에 올랐는지를 김진숙 씨는 이렇게 얘기했다.
2차 희망버스 때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평택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왔습니다. 물집이 터져 온통 상처투성이가 된 저 발들을 사진으로 보면 생각했습니다.
저들은 어떤 마음으로 걸었을까? 15명의 목숨을 자기 손으로 묻은 저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 먼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을까?
3차때는 우리 조합원들이 쌍용차에서 자전거를 타고 부산까지 왔습니다. 지친 해고자동생의 자전거에 끈을 묶고 달리던 비해고자 형의 사진을 봤습니다. 형은 동생이 얼마나 안쓰러웠을까요. 동생은 형한테 얼마나 미안했을까요.
최루액, 물대포를 맞고 곤봉에 찢겼던 그 무서운 밤을 보내고, 애가 타는 거리를 두고 돌아서야 했던 그 무참한 낮을 보내고, 다시와준 여러분 전 여러분이 참 눈물겹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같은 곳을 쳐다보며, 같은 기도를 올리며, 같은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마음이 이리도 간절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랑이 이리도 뜨거울 수 있을까요. 그런 간절함이 있었기에 우린 당당했고, 저들은 초조해 했습니다. … 젊음이 희망을 이길 수 없듯이 돈에 대한 집착만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은 생에 아무런 집착을 없는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 사심없이 하나가 된 우리를 저들은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영세상인, 철거민, 비정규직과 해고된 노동자들, 장애인, 성적소수자, 여성, 등록금 많이 내는 학생들, 도처에 무너지고 짓밟히는 삶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탄압할 버스가 없었습니다. 부정과 부패와 파괴와 야만을 향해 질주하는 이 절망의 버스에서 내릴 생각을 못했습니다.
이제야 우리는 비로서 우리손으로 새로운 버스를 장만했습니다. 희망으로 가는 버스, 미련을 향해 힘차게 전진하는 버스, 우리가 모두 주인이고 우리 모두가 승객인 버스. 희망버스 승객 여러분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길거리로 내몰린, 길거리에서 쫓겨다니는 우리 조합원들의 유일한 희망이고 간절한 기다림이었던 여러분. 평생을 일한 공장에서 내쫓고 그 노동자들을 서슴없이 외부세력이라 부르는 저들의 오만과 독선에 피멍이 든 우리 조합원들을 지켜주신 여러분. 퇴거 명령이 언제 집행될지 몰라 함께 모여 밤을 세우며 부업을 한다는 우리 가족들을 지켜주신 여러분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머지않아 우리 모두 웃게 될 것입니다. 머지않아 여러분들과 함께 얼싸안을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날까지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2011년 7월 30일, 3차 희망버스 김진숙 지도위원 연설내용)
'혹시나, 혹시나' 하다가 '결국'이었다. 2012년 3월 7일 구럼비 바위 발파가 시작됐다. 달려가 본 현장은 아비규환이었고 지금도 24시간 공사강행으로 아비규환일 것이다. 보다 못한 이들이 최근 11월 말에는 강정해군기지 예산안 통과를 막겠다고 한겨울 국회의사당 앞에서 머리를 깎고 단식노숙농성을 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대선이 끝났고 그 예산안에 대한 처리를 어떻게 할지가 새 정권이 내놓는 우리의 인권과 자연을 향한 대답의 시작일 것이다.
강정아 너는 이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지만,
너에게서 온 나라의 평화가 시작되리라
너는 부서지고 깨어져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너의 슬픔 너의 아픔 너의 피눈물 고통과 함께 한단다.~♬ ('강정아' 노래가사, 강우일 주교 글, 권성일 곡)
대선과 더불어 실시된 보궐선거로 당선된 서울시 교육감의 첫마디가 '학생인권조례를 시급히 손보는 것'이라 한다. 거리에서 학생인권조례 발의를 위한 서명 운동에 발을 동동거리며 갈증과 배고픔을 참던 숱한 얼굴들이 아른거린다. 9만 7천여 명의 주민발의로 성사된 서울학생인권조례를 간단히 손보는 일은 없어야 한다. 얼마 전에는 서울시 어린이‧청소년 인권조례까지 통과된 마당이다. 인권에 대한 의무에는 '역행과 퇴행의 금지'라는 것이 있다. 지금 손보겠다는 인권의 주인인 아동이 이런 말을 했었다.
가끔 어른들을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에 먼저 다가서면 '넌 아직 애라서 안돼' 라는 말과 '넌 못 하는거야' 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하지만 어린 저도 할 수 있는 일인데 그런 말을 들으면 많이 속상합니다.
저희 학교에 가난하고 약간의 장애가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에게서 냄새가 난다고,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는 친구들이 몇 명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난하거나 조금의 장애가 있는 친구를 오히려 도와주고 함께 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5학년 2반 회장입니다. 하지만 공부를 아주 잘하지는 못합니다. 시험 점수가 잘 나오지 않으면 회장인데 모범이 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면 좋지만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다른 친구들과 비교를 하거나, 무시를 당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는 나이도 어리고, 몸도 작고, 힘도 약하고 배워야 할 것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어린이도 어른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생명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어린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말보다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특히 소수자라고 따돌림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사람일수록 더 소중히 아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어른들은 임신, 출산, 성적 지향 같은 말은 빼야된다고 했다고 합니다.
차별받는 어린이가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것은 되고, 어떤 것은 안된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이유로든 괴롭힘을 당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어린이들 모두를 소중하게 대해주세요.
우리 어린이들이 서로 존중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해주세요.
우리 어린이들이 매일매일 즐겁게 지낼 수 있게 해주세요.
우리 어린이들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아주세요. (2012년 10월 12일, '서울시 어린이 청소년 인권조례 통과 촉구 기자회견'에서, 초등학생 장준하)
지난 5년 숱한 장례식을 지켜봐야 했다. 23분의 쌍차 노동자와 가족들, 박지연, 황유미, 이윤정, 김주영 ….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병을 얻은 노동자들과 활동보조인 없이 화마에 쓰러져 간 장애인뿐만이 아니다. 살인단속에 쫓겨 다치고 병든 이주노동자들, 일제고사와 경쟁강화에 자살한 청소년들,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고 애도하지 못한 죽음, 살아 있을 때 그 손을 붙잡지 못한 죽음들이 너무 많았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심정으로 서울 대한문 앞에 '함께 살자!' 농성장이 들어선지 한 달이 넘었다. 이들의 요구엔 늘 '대선 이후에'란 답이 돌아왔다. 이제 그 때가 왔다. 이제 '이후'는 없다. 지금 우리의 삶이 요구하는 바에 대답해야 한다. '함께 살자'를 고민하면서 나는 아래와 같은 구호들을 지어보았다. 내 컴퓨터 한 귀퉁이에 저장돼 있던 것인데 오늘 아침 문득 열어보고 싶었다.
함께 살자! 서로 돌보자! 쫓겨난 이들을 제자리로!
상처뿐인 성장 그만하고 함께 살기 시작하자!
승자독식 살인경쟁 그만하고 서로존중 시작하자!
엘리트와 자본 정치 걷어내고 민심정치 시작하자.
노동자를 존중하자.
비정규직 정리해고 그만하자.
청년을 존중하자.
스펙경쟁 그만하고 지금 여기서 행복하자.
생명자연 존중하자.
골프장, 송전소, 핵발전소 걷어내고 생태를 복원하자.
생명평화 존중하자.
해군기지 중단하고 강정마을 살려내자. 대결안보 그만하고 평화안보 세워내자.
살림살이 존중하자.
대기업의 폭식횡포 모든 살림 뒤흔든다. 영세상인 자영업자 골목에서 함께살자.
강제퇴거 금지하고 삶의 터전 존중하자.
누군가 쫓겨나면 그 다음은 내 차례다.
사회적 약자를 존중하자.
구분 짓고 차별 말고 보편복지로 함께 살자.
밥이 하늘이다. 농민을 존중하자.
농업포기 죽음이요 농업증진 살길이다.
대선이 끝난 아침에 급하게 이 글을 썼다. 글을 쓰는 동안 예고 없던 방문객이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여기 오면 인권을 공부할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겨울 동안에 준비하여 봄에 할 것이라고, 새봄에 공부 일정이 잡히면 꼭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갑자기 내 손가락을 잡아 걸더니 '꼭 약속한 거다'고 다짐하고 돌아갔다. 손가락을 건 그녀의 손이 따뜻했다. 하지만 나는 '과연 봄이 올까'하고 자문했다.
선거기간 동안 숱한 약속과 다짐이 있었다. 지키지 않는 게 차라리 좋을 약속도 있고 꼭 지켜야 할 약속도 있다. 그들이 약속을 내건 대상 속에 과연 나와 동료들이 끼는 사람인지 끼지 않는 사람인지조차가 고민이 되는 오늘이다. 잠시 후 평택 쌍용차 앞 송전탑에 올라있는 노동자들을 응원하러 가는 버스가 대한문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지금 자리에서 다시 시작한다. 나와 우리의 자리를 지키고 우리의 돌을 함께 굴리련다. 봄이 올까란 물음은 오래오래 간직한 채.
(이 글은 "MB정권 5년 동안의 외침들"이라는 제목으로 주간인권신문 <인권오름>에도 실렸습니다. <인권오름> 기사들은 정보공유라이선스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정보공유라이선스에 대해 알려면, http://www.freeuse.or.kr 을 찾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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