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의 '옥쇄파업'이 23일로 벌써 8일째다. 파업과 함께 진행된 노사 간 협상은 회사 측에서 1조2000억 원 규모의 투자계획을 내놓으면서 접점을 찾아가기 시작한 듯하지만, 정상조업이 재개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더 걸릴 전망이다. 이번 쌍용차의 노사 간 갈등은 다른 기업들의 경우와는 사뭇 다른 쟁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노조 측이 회사 측의 인력 구조조정 방침 외에 중국으로의 기술유출 의혹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쌍용차 노조 안팎에서는 '기술유출' 의혹과 관련해 민족주의적 감성에 근거를 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중국이 쌍용차의 대주주인 중국 상하이자동차그룹(상하이차, SMC)을 통해 우리 기업이 땀 흘려 성취한 기술을 빼나가려 한다는 이유에서다. 쌍용차 노조는 그런 점에서 이번 싸움을 '애국투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표현과 관점이 타당한지는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 어렵다. 다만,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으로 국내 자동차 기술이 유출되는 게 사실이라면 그런 기술유출은 국내 자동차 산업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경제 전체에도 불이익을 안겨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겨 버릴 사안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중국 정부의 정책적 지원 아래 관련 중국 업계가 이미 조속히 독자적인 자동차 생산기술을 확보해 2010년까지 독자모델을 개발하겠다고 공언해 놓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쌍용차 사태는 단위 기업의 차원을 넘어서는 예사롭지 않는 일이다. 따라서 쌍용차의 기술유출 논란은 '중국의 산업정책'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들여다봐야 그 실체가 제대로 드러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인수 때부터 시작된 '기술유출' 논란
2004년 말 중국 국영기업인 상하이자동차그룹이 쌍용차 인수전에 뛰어들었을 때 그 배경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당시 국내 자동차 업계는 쌍용차가 보유한 SUV(스포츠 유틸리티 차량) 생산기술에 상하이차가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마침 그 해에 중국 정부는 독자적인 자동차 기술 확보를 위한 장기계획을 내놓았다. 외국 기업과의 합작 등을 통해 2010년까지 독자 생산기술을 확보하고 독자모델을 내놓겠다는 선언이었다. 연간 자동차 생산대수가 400만 대에 이르지만 독자모델은 아직 내놓지 못한 중국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중국의 독자기술 확보 욕망이 노골화된 시점에 상하이차가 쌍용차 인수전에 뛰어들었으니 국내 업계에서 "상하이차가 쌍용차의 기술을 보고 인수전에 뛰어들었다"고 분석한 것도 당연했다. 더 나아가 일각에서는 상하이차가 쌍용차의 기술을 확보하고 나면 쌍용차 자체는 매각처분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이런 의혹 속에서도 상하이차는 지난해 1월 인수전에 뛰어든 미국의 GM, 프랑스의 르노와 시트로엥, 인도의 타타그룹 등을 제치고 쌍용차를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경쟁사를 제칠 수 있었던 주요 이유는 상하이차가 지난해 한 해에만 4000억 원의 투자를 하겠다고 약속했고, 노조가 요구한 고용승계를 보장했기 때문이었다.
기술유출 논란의 정점에 선 '엘-프로젝트'
그러나 상하이차가 쌍용차를 인수한 뒤에도 '신규투자는 하지 않고 기술만 빼간다'는 의혹이 그치지 않았다. 상하이차에 인수된 뒤에 쌍용차의 경영실적이 더 나빠지자 이같은 의혹은 더욱 커져 갔다. 상하이차가 경영은 신경 쓰지 않고 기술 빼가는 데만 주력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더욱 설득력 있게 나돌았다.
게다가 상하이차가 지난해 10월 이후 소진관 전 쌍용차 사장을 전격 경질하고 중국인들이 대거 포함된 이사진을 구성하자 업계에서는 "본격적으로 기술을 빼가기 위한 정지작업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기도 했다.
상하이차가 쌍용차 인수 이후 꾸준히 추진해 온 '에스-100(S-100) 프로젝트'도 상하이차의 기술 빼가기 의혹을 더욱 확산시켰다. 상하이차와 쌍용차가 중국 현지에 합작공장을 세워 SUV 카이런을 생산한다는 이 계획은 노조에서 강력하게 반대하고 중국 정부에서 연구개발단지 설립 등 지나친 요구를 해 옴에 따라 지난해 말에 공식적으로 폐기됐다.
그러나 상하이차는 지난 6월 쌍용차와 '엘(L) 프로젝트 라이선스' 계약을 맺음으로써 이미 폐기된 'S-100 프로젝트'를 사실상 부활시켰다. 엘 프로젝트는 쌍용차가 반조립제품(KD)을 만들면 상하이차가 이를 받아 중국 현지에서 '카이런' 변종모델을 생산한다는 것을 뼈대로 하고 있다.
최근 노조가 공개한 '엘 프로젝트 라이선스' 계약의 내용은 그동안 '기술 빼가기' 의혹을 일관되게 부인해 온 상하이차를 난처한 상황에 빠뜨렸다. 카이런의 설계, 개발, 제조, 판매, 마케팅과 관련이 있는 도면, 자료, 소프트웨어 등 사실상 카이런 생산에 필요한 대부분의 기술이 망라된 기술이전 계획이 계약서에 명시돼 있음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상하이차가 '기술유출' 의혹을 계속 부인하기가 궁색한 처지가 된 것이다.
중국의 '신 자동차산업 발전정책'
상하이차가 쌍용차의 기술을 중국으로 이전시키려고 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상하이차가 기술유출 의혹에 시달리면서도 지속적으로 이런 태도를 보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 정부의 자동차 산업정책을 살펴보면 그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난다.
중국의 자동차 산업정책은 지난 2004년에 발표된 '신(新) 자동차산업 발전정책'에 요약돼 있다. 모두 13장 78조로 이뤄진 이 발전정책은 △대형 자동차그룹 육성 △부품산업 육성 △관련 제도와 법 정비 등 여러 측면에서 중국 자동차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전략들을 담고 있다.
이 발전정책에서 가장 무게가 실린 대목은 바로 '자동차 업체의 기술역량 강화'다. 1990년대 중반까지 '경쟁난립의 시기'를 거친 중국 자동차산업의 가장 큰 고민은 독자 생산기술 확보와 독자 브랜드 제품 제작이었는데, 이와 관련된 중국 정부의 고민이 이 발전정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발전정책에는 독자기술 확보에 대한 언급뿐 아니라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할 기술과 자동차 독자모델 생산의 시기까지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이 정책에 따르면, 중국은 해외 완성체 업체들과의 적극적인 합작을 통해 우선 자동차 섀시와 엔진의 생산기술을 확보해 2010년까지 독자모델을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예정이다.
현재 중국 정부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중국의 자동차 업계가 이같은 정부의 산업정책에 순응하는 경영활동을 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중국 상하이차가 쌍용차 인수에 나선 것도 그 연장선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상하이차는 이 발전정책이 발표된 2004년에 쌍용차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산업자원부는 '산업정책' 포기했나?
이처럼 중국 정부가 앞장서서 자국의 자동차 산업 육성을 위한 정책을 내놓고 자국 자동차 업체들을 움직이고 있는 마당에 우리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특히 쌍용차 사태와 관련해 정부의 산업정책 담당부서인 산업자원부는 기술유출 논란 등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정책적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산업자원부의 한 관계자는 "중국 정부의 산업정책과 이번 쌍용차 사태와의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며 "그러나 중국의 자동차산업 정책에 대응하기 위한 우리 나름의 대응전략을 수립하고 있는 중"이라고만 밝혔다.
중국 정부가 이미 2004년에 공식화한 자동차산업 발전정책에 대한 대응정책을 2년이나 지난 지금에야 '수립 중'이라는 우리 정부의 답변은 궁색하게 들린다. 우리 정부는 이제 자동차산업에서 대해서도 '산업정책'을 포기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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