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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 강물처럼 글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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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 강물처럼 글이 흐른다

[이 많은 작가들은 왜 강으로 갔을까?]<14> 하성란 소설가

ⓒ이갑철

내린천은 소양강의 수많은 지류 중 하나이다. 그 많은 지류들을 끌어안고 유장하게 흘러가는 소양강도 한강의 제2지류이고 북한강의 제1지류이다. 어떤 강이든 원줄기로 흘러들거나 원줄기에서 갈려 나왔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 경중(輕重)을 따질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홍천군 내면 동쪽의 소계방산에서 발원한 계방천과 내면 남쪽의 흥정산 기슭에서 발원한 자운천이 내면 월둔동에서 합류해 홍천군과 인제군의 군계를 북서 방향으로, 구불구불 깊게 팬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데 이 물줄기가 바로 내린천이다. 방대천과 만나 소양호로 흘러들기까지 내린천은 60킬로미터 남짓한 여행을 한다. 돌부리를 만나면 스스럼없이 둘로 갈라지고, 절벽에서 곤두박질치며 속도를 좀 내보다가 여울목에서 사정없이 휘몰아치기도 하고 다른 물줄기와 합쳐져 도도하게 흘러간다.

특히 내면 월둔에서 미산리를 거치는 계곡은 풍광이 웅장해 여름이면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곳을 처음 찾았던 1991년 여름에는 객지에서 온 손님이라고는 우리 일행이 전부였다. 그해 여름은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낸 기암절벽과 울창하던 참나무 숲, 귀청 따갑도록 지겹게 울어대던 참매미 울음소리로 떠오른다. 생선 비늘처럼 반짝거리던 수면으로 거침없이 날아가던 선생의 낚싯대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호오익, 호익.

정기 교통편은 상남면에서 끊기고 미산리까지는 트럭을 빌려 타야 했다. 비포장도로에서 돌을 밟은 트럭이 튀어오르면 짐칸에 끼어 앉은 학생들도 튀어오르며 툭툭 몸이 부딪쳤다. 그때의 우리는 그런 불편함도 낭만으로 받아들이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었다. 나는 미역처럼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고 몸이 쟀다.

마을 어귀의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지나자 감자밭 사이에 들어앉은 작은 집이 드러났다. 오규원 선생은 학교 교지 《예장藝場》의 지도 교수였다. 건강이 악화된 선생의 요양 생활도 그해 여름부터 시작되었다. 폐가를 빌려 잡풀을 베고 도배를 한 선생은 유일한 군것질거리인 목캔디를 부적처럼 문마다 달아놓았다. 주인은 진작에 집을 떠났지만 주인이 뿌려놓았을 옥수수는 그 여름에도 어김없이 울창하게 자라 바람이 불면 옥수숫대가 서로의 몸을 휘감으면서 울었다.

감자가 지천이었다. 굵어질 대로 굵어진 감자알들이 붉은 흙 위로 몸을 드러냈다. 일손이 달려 그 많은 감자들을 제때제때 수확하는 것이 힘든 듯 보였다. 마을 어디에서도 젊은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나이 든 내외가 집을 지키는 가구도 몇 호 되지 않았다.

천변의 나뭇가지에는 상류에서 떠내려온 듯한 옷가지와 라면 봉지 들이 걸려 말라 있었다. 떠내려온 옷가지들은 불길했다. 수심 낮은 곳을 골라 물을 건넜다. 돌돌돌 물은 복사뼈를 간질이며 흘러갔다. 조금 수심 깊은 곳의 물은 정강이까지 올라왔다. 누치와 강준치, 끄리, 갈겨니, 버들치…… 선생은 물고기들을 찾아 이곳저곳 자리를 옮겨 다녔다. 호오익, 호익. 순식간에 릴에서 풀려나간 낚싯줄이 한참 앞의 수면으로 날아가 팽팽하게 꽂히는 장면은 봐도 또 봐도 물리지 않았다. 우리들은 선생 옆에 나란히 서서 애먼 떡밥만 물에 빠뜨려댔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온 탓일까. 물고기는 한 마리도 낚이지 않았다.

다시 강을 건널 때였다. 물은 고양이의 혓바닥처럼 종아리를 핥았다. 강을 건너면서도 우리들의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강을 건너올 때와는 달리 물살이 거세어졌다는 것도 강을 건너는 종아리에 단단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반쯤 강을 건너왔을 때였다. 까르르 웃어대던 후배의 눈이 동그래졌다. "몸이 떠요!" 후배의 눈이 공포로 커지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우리 몸은 걷잡을 수 없이 물에 휘말렸다. 지겹도록 울어대던 매미 울음소리가 끊기고 두 귓속으로 우렁찬 물소리가 쏟아졌다. 별안간 강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다. 물속에서 몇 번이고 몸이 곤두박질쳐졌다. 내가 만만히 보던 강물이 아니었다. 꼼짝없이 이렇게 죽는구나, 죽을 데를 제대로 찾아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속에서 몇 장의 그림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휙휙 지나쳤다. 나는 그 그림들에서 내가 살아왔던 날들을 보았다. 공포가 물러가고 일순 마음의 고요가 찾아왔다. 몸 아픈 스승과 친구들, 죽은 우리들을 데리고 서울로 가야 할 그들의 비통한 심정이 전해졌다. 미안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붉고 푸른 물이 거세게 흘러가고 있었다. 웅웅거리면서 누군가 내게 귓속말을 했다. 그리고 그 물속에서 선생이 놓친 누치와 끄리, 갈겨니를 본 듯도 했다. 용케 미끼를 피했구나, 여기 물고기가 이렇게 많다고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때 발끝에 커다란 바위가 툭 걸렸다. 나는 바위를 딛고 벌떡 일어섰다.

또다시 지겹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였다. 강 양안으로 정지 화면처럼 동작이 굳은 선생과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 앞으로 두 여학생이 한 덩어리가 되어 떠내려가고 있었다. 남학생들이 달려들어 여학생들을 건져내고 내 손을 잡아 끌어냈다. 한 여학생은 안경을, 나는 슬리퍼 한 짝과 모자를 물에 떠내려보냈다. 슬리퍼 한 짝만 신고 뒤뚱거리면서 일행을 뒤따랐다. 해가 중천에 떠서 그림자가 발끝에 마침표처럼 고여 있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눈을 가늘게 뜨고 울먹이던 여학생의 얼굴이 기억에 남아 있다. 센물에 젖은 머리카락은 엉켜 빗질이 잘 되지 않았다. 빗에 한 움큼씩 머리카락이 뽑혀 나왔다. 머리가 마른 뒤에도 물비린내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미산리에 두 번째로 간 건 그해 10월 말이었다. 트럭을 빌려 타고 산길을 들어갔다. 산골의 밤은 칠흑처럼 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트럭의 헤드라이트 불빛 밖은 절벽처럼 깜깜했다. 길 중앙에 나와 선 동물들 때문에 트럭은 자주 멈춰 섰다. 10월 말 산간 마을에는 겨울이 일찍 찾아왔다. 트럭 난간을 잡았던 손이 붉게 곱아들었다. 어둠 어디선가 돌돌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린천 소리였다. 검은 밤하늘을 가로지르면서 강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강의 발원지는 어쩌면 하늘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검은 물속을 혼자 헤엄치는 것처럼 오싹해졌다.

날이 밝자마자 나는 민박집을 빠져나와 강가로 갔다. 물은 시퍼랬고 한눈에도 차가워 보였다. 천변까지는 용케 갔지만 강물에 발을 넣지는 못했다. 시퍼런 손이 쑥 나와 내 발목을 채갈 것 같았다. 부리나케 강에서 벗어났다. 몇 개월 만에 선생이 여름 한철을 났던 집은 다시 폐가가 되어 있었다.

세 번째로 찾아간 미산리는 변화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천변 곳곳에 급조한 듯한 방갈로들이 들어서고 민박과 음식점 들을 알리는 간판들 천지였다. 새로 들어선 건물들 때문에 내가 빠졌던 곳을 정확히 집어내기도 쉽지 않았다. 두 번째와는 달리 나는 강 가까이에 갈 수 있었다. 십수 년이나 흐른 시간의 힘이었다. 나는 시추봉을 박듯 발끝을 강에 넣었다. 강은 영사막처럼 내 앞에 펼쳐졌고, 물은 흘러가며 젊은 우리들의 웃음소리를 다시 들려주었다.

또 세월이 흘렀다. 나는 가끔 꿈속에서 천변의 나뭇가지에 걸린 내 모자와 슬리퍼를 건져내곤 했다. 어떤 날은 현실과는 달리 물에서 건지지 못해 끝없이 물에 떠내려갔다. 샛강에서 흘러온 물과 합쳐지고 다시 큰 강에 합쳐지기도 했다. 검은 내 머리카락이 물풀처럼 물속에서 꿈틀거렸다. 그날 여학생이 잃어버린 안경은 깨져 파편이 되었을 것이다. 작고 투명한 모래알들이 되었을 것이다. 흠씬 물에 젖고 난 다음 날이면 몸이 가뿐해졌다. 그 사이 오규원 선생이 돌아가셨다.

선생의 1주기에서 나는 살아생전 선생의 모습들을 보다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1991년 여름 미산리를 떠나기 직전에 찍은 사진이었다. 우리 일행이 초췌한 모습으로 집 앞에 서 있다. 그 전날 죽을 고비를 겪었으니 그런 모습일 만도 했다. 매미가 그악스럽게 울고 내린천의 물소리가 중간중간 끼어들었을 것이다.

나는 내린천에 세 번 갔었다. 언제 또 그곳에 갈 수 있을까. 그날 잠깐 나는 강물이 되어 흘렀다. 내 곁에서 꼼지락거리며 흘러가던 그 문장들을 기억한다. 내가 읽었던 어느 책들보다도 풍성한 문장들이었다. 혈관처럼 전국을 흘러가는 수많은 지천들, 수많은 문장들. 이 땅을 풍성하게 하는 것들은 물의 말들이다. 그러니 그 말들이 저 스스로 풍성해지도록 그냥 내버려두라.

모든 물길은 사람들의 마을로 향해 있다. 좋은 문장들도 사람들 사이를 파고든다. 그날 물이 내게 해준 말이다.


▲ <강은 오늘 불면이다>(강은교 외 지음, 한국작가회의저항의글쓰기실천위원회 엮음, 아카이브 펴냄). ⓒArchive
그들은 왜 강으로 갔을까. 강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파괴'의 현장에서, 그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기록했을까.

이제는 막바지로 치달은 4대강 사업에 관한 세 권의 책이 출간됐다. 고은 외 99명이 쓴 시집 <꿈속에서도 물소리 아프지 마라>(한국작가회의저항의글쓰기실천위원회 엮음, 이하 아카이브 펴냄), 강은교 외 28명의 산문집 <강은 오늘 불면이다>(한국작가회의저항의글쓰기실천위원회 엮음), 성남훈 외 9명이 참여한 <사진, 강을 기억하다>(이미지프레시안 기획)가 그것들이다.

저자와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문인들과 사진가들이 기록한 '강의 오늘'을 <프레시안> 지면에 소개한다. 오늘도 포클레인의 삽날에 신음하는 '불면의 강'의 이야기는 한 달여 동안 독자들을 찾아갈 예정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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